[톱스타 성공 키워드]한국의 메릴 스트립, 이미숙

배우 이미숙은 스스로 말하길 “자신과 타협한 적이 없는” 배우라고 했다. 인기를 위해서 연기하지 않은 정신이 지금의 이미숙을 만들었을 것이다. |MBC제공

여배우가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세월이라고 한다. 여배우에게 세월은 독일까 약일까. 예쁘장한 이미지에 갇혀 있다면 독이요, 깊이 있는 삶의 연륜을 연기하고 싶다면 약일 터. 젊은 시절에는 꽃 같은 외모로 승부해도 결국 세월 앞에 남는 것은 자신만의 색깔이다. 얼마나 자신을 풍부한 연기자로 만들어왔는지에 대한 결과물이다. 사람의 표정은 살아온 내력을 숨길 수 없고, 내면을 반드시 담고 있다.

믿기지 않지만 올해 쉰이 넘었다는, 이미숙은 표정 가득 자신감과 당당함을 담고 있는 배우다. 그녀에게는 어쩐지 ‘연예인’이나 ‘스타’라는 단어만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여배우’만의 포스가 있다. 그렇다, 그녀는 천생 ‘배우’다.

최근 그녀를 보고 두 번 놀랐다. 드라마 <에덴의 동쪽>을 보면서 그녀의 연기력에 감탄했고 <무릎 팍 도사>에 나와 솔직하고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는 데 또 한 번 놀랐다. 중년의 배우가 보여주는 그 강력한 카리스마가 고마웠고, 우리가 살아보지 못한 시절의 아픔을 다부지게 뿜어내는 양춘희의 삶에 마음이 아팠다.

중년의 배우가 보여주는 카리스마
그리고 충격이었다. 20대보다 더 당당한 50대의 모습. 적어도 내 눈에는, 남에게 보이기 위한 당당함이 아니라 가슴 깊이 우러나는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으로 보였다. 그 당당함을 갖기까지 그녀는 얼마나 스스로 다그치고 또 못살게 굴었을까. 당당함이란 외적인 조건에서 나왔다기보다 언제나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해 살 때’ 저절로 생긴다. 그렇다면 그녀는 얼마나 매순간 최선을 다해 살아온 것일까. 얼마나 자신의 삶을 빈틈없이 꾸려왔다는 얘긴가.

몇 년 전, 그녀가 출연한 영화를 인연으로 토크쇼를 함께 할 기회가 있었다. 듣던 대로 시원시원하고 거침없는 화법이었다. 몇 번의 회의에 직접 참여하고, 이러쿵저러쿵 아이디어를 제안하는 모습에서 여배우에게 금기시하는 질문이나 해서는 안 되는 말 따위를 지정하는 일은 없었다. 당시만 해도 여배우는 예쁘게만 보이고 싶어 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고만고만한 뻔한 질문, 식상한 질문은 싫다며 이를테면, 여배우의 성형 문제라든지, 사회 문제에 관한 인식을 묻는 질문을 해달라고 주문했다. 숨어서 즐기던 가십도 정면에 꺼내놓자고 했다. 아무것도 문제될 게 없노라고. 그러자 옆에 있던 까마득한 후배 연기자들은 사색이 되었다. 큰언니가 그러고 나서니, 뭐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물론 친절한 토크쇼를 하느라 언제나 게스트 눈치를 보던 작가 입장에서는 쾌재를 불렀다. 기회였고, 요령도 없이 야박하다 싶을 정도로 강한 질문과 독한 구성을 넣어 큐시트를 짜갔던 나는 후배 연기자에게 온갖 서러운 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얼굴을 붉히며 출연이 무산될 뻔했으나, 여배우 이미숙의 카리스마에 모든 상황은 잠식되었다. “뭐가 그렇게 자신이 없어서 세상과 당당히 마주할 수 없냐.” 당시 그녀가 남긴 그 호령과 태도에 나는 적잖이 놀랐다.

그 당시 필자가 본 이미숙은 자기 관리의 귀재였다. 집안이 온통 체육관이라고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로 체력 관리에 많은 시간과 꾸준함을 보였다. 머릿결 하나에도, “배우스러워야 한다”며 정성을 기울이던 모습, 누군가를 가르치려 하기보다 젊은 친구들의 말에 귀를 열며 트렌드를 읽으려고 노력하는 모습.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그렇게 자신에게 엄격한 그녀였다.

일례로 미국에서 잠시 거주할 때 이야기다. 고등학교 때부터 연예계 활동을 하느라 공부에 소홀했던 그녀는 배우가 영어 못하는 모습을 보이기가 죽기만큼 싫었다고. 집에서 10시간씩 영어 공부를 한 탓에 원형 탈모증까지 걸렸다고 한다. 덕분에 그녀는 영어를 완벽하게 마스터했다고. 여배우 이미숙이 집과 도서관만 오가던 시절이 있었다니. 그렇게 대한민국 배우의 이름으로, 그녀는 못해낼 것이 없었고 세상 그 어떤 장막도 거침없었다고 했다.

자신과 타협한 적이 없는 배우

이미숙은 <에덴의 동쪽>에서 무섭고 감동적인 양춘희의 삶을 보여주고 있다. |MBC제공

세상 그 어디에 공짜가 있을까. 세상은 가만히 앉아 있는 사람에게 좋은 성과를 주지 않는다. 평소 준비가 된 사람, 단련이 된 사람에게 인내의 대가로 좋은 일이 생기게 마련이다. 그러니 지금 양춘희의 삶을 보여주는 그 무섭고, 감동적인 연기력, <에덴의 동쪽>이 주는 그 중독성도 평소 이미숙이 배우로서 치밀하게 자신의 삶을 준비해온 대가가 아닐까.

삶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만들어 가기까지는 얼마나 많은 노력과 희생이 필요한가. 매 순간 자신과 싸움일 것이고, 매 순간 자신과 ‘조금 더 편한 삶’을 위해 타협하고 싶다. 1분 더 자고 싶고, 운동 하루 거르고 싶고, 좀 더 편한 작품을 하고 싶은 것.

그러나 배우 이미숙은 본인도 말하길 ‘자신과 타협한 적이 없는’ 배우라고 했다. 어쩌면 부러질 만큼 꼿꼿하게 자신의 원칙을 지켜왔다고. 인기를 위해서 연기하지 않고, ‘자신만의 색깔’을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여배우의 권위를 들먹거리지 않았다. 결혼 후 10년 동안 연기를 하지 않은 이유도, 기혼자 역할만 들어와서라고 했다. 그 서슬 퍼런 자존심이야말로 자신에 대한 확신이요, 그때 적당히 타협했다면 지금의 명배우 이미숙이 있을까.

성공하는 사람들은 대개 자신의 삶에서 반드시 지키는 확고한 원칙이 있다. 짧게 마주친 탓에 그 원칙 중 100만 분의 1도 직접 목격하지 못했지만 내면을 지키는 힘에 크게 자극을 받았더랬다. 가수 박진영도 그랬다. 자신의 자신감은 ‘정직하게 사는 삶’에서 나온다고.

톱스타 성공 키워드

여느 20대 신인 못지않게 치열했던 배우의 열정. 여느 30대 못지않게 화려하고 유연했던 사고. 여느 중년 못지않게 돈이나 권력, 그 어떤 외부 요인도 흔들 수 없을 정도로 세상을 관조하며 볼 수 있을 삶의 경륜. 그 복잡 미묘한 편안함과 말로 다 뿜어낼 수 없는 당신의 자신감을 나는 존중한다. 세월이 갈수록 어쩔 수 없이 여배우의 선택이 좁아질지언정, 단 한 장면의 등장에서도 그 깊이는 어디에도 가늠할 데 없이 깊어지기를. 넓이 대신 깊이를 택하며, 그렇게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여배우로 오래오래 남아주기를!

<남미영 방송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