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더그라운드 넷]일본어능력시험 출제위원회도 오타쿠가 장악?

TV와 극영화 등으로 제작된 <신세기 에반게리온> 시리즈 이미지.

“문제. 라디오로 드라마를 듣고 있습니다. 방송 속에서 누가 무엇을 하기로 하였나요?”

지난 12월 6일 시행된 일본어능력시험(JLPT) 청해(듣기) 문제가 인터넷에서 화제를 모았다. 먼저 지문을 들어보도록 하자. “대원: 대장님! 제2차 방어선이 돌파되었습니다! 거대 괴수는 곧바로 중앙관리시스템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이 상태로라면 앞으로 30분도 못 버팁니다. 대장: 지금 발진시킬 수 있는 모빌 파이터는? 대원: 제로호기뿐입니다. 대장: 어쩔 수 없다. 4호기를 내보낸다. 대원: 4호기는 아직 테스트가 완료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조종할 수 있는 파일럿이 현재 아무도….” 이날 시험을 본 한 학생의 증언. “졸면서 풀다가 이 문제 때문에 웃느라 잠이 확 깼다.” 시험감독도 엄숙한 표정을 유지하지 못했다는 전언도 나왔다. 시험 본 학생들만 인터넷을 하란 법은 없다. 이날 시험감독으로 추정되는 이도 자신의 블로그에 이런 후기를 남겼다. “처음엔 들으면서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더니 아스카 이야기에선 다들 개 폭소…이후로 더는 엄숙하게 (시험감독을) 할 수 없었다.”

사실 일본애니메이션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저 대사는 매우 낯익은 대사다. 바로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 반복되는 유형의 대사다. 그러나 그냥 ‘애니메이션 대사가 언어능력시험 지문으로 출제되었다’는 것만으로는 화제가 될 수 없다. TV에서 방영된 지 벌써 10년도 넘었지만 이 애니메이션의 위상이 각별하기 때문이다. 실제 대부분의 평론가들은 이 애니메이션을 전후로 관련 역사가 나뉜다고 말한다. 인터넷에서는 익숙한 ‘싱크로율(동화율)’ ‘AT필드’ 등도 이 애니메이션에서 유래했다. 그렇지 않아도 시험문제를 듣던 이들이 ‘혹시 이건 에바(흔히 신세기에반게리온을 줄여 지칭하는 말)?’라고 의심하던 찰나에 ‘아스카’가 등장해 확인 사살한다. 아스카는 에반게리온에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다. 이것만이 아니다. 이 애니메이션 그 자체가 오타쿠, 한국식으로 말하면 ‘오덕’의 상징이다. 이번 문제에 대한 누리꾼의 특별한 관심도 그래서 나온다. “이제 오덕이 일본어능력시험 출제위원회까지 진출한 건가?” 애니메이션을 추종하는 일부 누리꾼은 “성우도 원래 캐릭터의 성우가 했으면 좋았을 텐데, 돈 때문이었을 것”이란 식의 풀이도 내놓았다.

일본대사관 공보문화국 일본어능력시험사무국에 문의해 봤다. JLPT시험은 1년에 두 차례 치른다. 이번 시험엔 1급부터 4급까지 약 11만명이 응시했다.

문제는 전 세계가 똑같다. 누리꾼이 제시한 증거에 따르면 중국 누리꾼들도 에반게리온 문제를 ‘화제’로 올렸다. 누리꾼의 예상과 달리 ‘비용 때문에’ 에반게리온에 등장하는 원래 성우를 섭외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사무국 김연기 국장은 “외국에서 공부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극영화 목소리를 캐치하는 것이 굉장히 힘들기 때문에 시험문제용 목소리와 일반 극영화 목소리는 다를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언어능력시험에서는 최대한 알아들을 수있도록 무디게 처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 국장은 “일본 애니메이션이 출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면서 “이전에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이웃집 토토로> 대사가 지문으로 출제된 적도 있다”고 덧붙였다.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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