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의 재구성]뱀파이어의 변신 - 드라큘라가 멋진 보이프렌드로 환생

순정만화풍으로 각색된 현대판 뱀파이어 소설 <트와일라잇> 시리즈의 남녀 주인공 에드워드와 벨라를 그린 한국어판 표지 일러스트.

'샤방샤방~ 뱀파이어!’

미국의 젊은 여성 작가 스테프니 메이어의 <트와일라잇>(2008) 시리즈가 상한가 행진을 계속 하고 있다. <트와일라잇> <뉴문> <이클립스> <브레이킹 던>으로 이어지는 4부작은 전 세계에서 8500만부가 팔렸고 국내에서도 150만부를 돌파했다. 이 작품은 뱀파이어 서사의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충혈된 눈, 창백한 안색, 날카로운 송곳니를 지닌 흉측한 모습으로 젊은 여성의 목에 입을 대고 피를 빨아먹던 전통적인 중년 뱀파이어가 집안 좋고 ‘쿨’하며 강력한 힘을 지녔으면서도 지극히 헌신적이고 멋진 보이 프렌드로 격상했다. 여기에 나오는 뱀파이어족은 인간의 피 대신 동물의 피를 주식으로 삼아 생명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 진화에 진화를 거듭했다. 뱀파이어 퇴치제로 여겨지던 십자가나 마늘도 소용없다. 일몰에서 일출까지의 활동시간 제약도 사라졌다. 단 햇빛이 비치면 창백한 뱀파이어 보이 프렌드의 피부에서 반짝반짝 빛이 나는 바람에 그가 보통 사람과 다르다는 걸 들키게 된다. 그나마도 혐오감보다는 신비감을 더해 준다.

말쑥한 뱀파이어와의 금지된 사랑
<트와일라잇> 시리즈는 황량한 미국 도시 포크스를 배경으로 하여 벨라라는 17세 소녀와 에드워드 켈런이란 뱀파이어 소년(실제로는 90세)의 가슴 떨리는 첫사랑의 완성을 그렸다. 에드워드가 뱀파이어라는 사실은 1권에서 일찌감치 밝혀진다. 나머지는 벨라와 에드워드가 어떻게 물리적·관습적인 장벽을 뚫고 진실한 사랑을 성취하는 지에 모아진다. 여기서 물리적 장벽은 오랜 수련 덕분에 인간의 피를 먹지 않게 된 에드워드조차 너무 달콤한 벨라의 피 냄새에 억누른 본능이 발동할 정도로 뱀파이어와의 사랑에는 위험이 따른다는 점이다. 또 관습의 장벽은 에드워드라는 색다른 ‘종족’과 맺어져도 좋을지를 놓고 벨라가 겪는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이다. 여기에 에드워드와의 사랑의 상처 때문에 고통 받을 때 벨라를 도와준 제이콥이란 연하 소년이 늑대인간이란 사실이 드러나면서 인간과 뱀파이어, 늑대인간 사이의 삼각관계가 만들어진다.

<트와일라잇> 시리즈에서 취급하는 뱀파이어가 전통적인 뱀파이어와 너무 다른 나머지 이 시리즈를 뱀파이어의 계보에 놓기보다는 금지된 사랑의 대명사인 <로미오와 줄리엣> <폭풍의 언덕>의 계열로 취급하거나 티격태격하는 서로 다른 신분의 연인을 그린 <오만과 편견>에 비유하기도 한다. 뱀파이어가 인간과 공존하는 데 따른 갖가지 제약이 사라진 상태에서 등장한 에드워드라는 존재는 금지된 사랑의 메타포에 가깝다는 것이다. 과거의 유부남, 외국인, 연하남, 신분이 다른 상대의 자리에 들어선 쉽지 않은 사랑 정도의 의미다. 그러나 공포와 두려움을 동반한 성적 욕망, 소수자로서 인간 세계에 공존하는 이질적 존재에 대한 호기심 어린 시선 등 뱀파이어에 얽힌 코드의 성공적인 변주임에는 틀림없다.

지난해 개봉돼 화제를 모은 박찬욱의 영화 <박쥐> 역시 뱀파이어의 성애적 코드를 작품의 전면에 끌어들였다. 영화 속에서 뱀파이어가 된 인물은 뱀파이어의 대척점에 서 있는 신부다. 병원에서 절망적인 환자들을 돌보던 신부 상현(송강호)은 자원해서 엠마뉴엘 수도원의 치명적인 바이러스 ‘이브’를 퇴치하기 위한 연구에 실험 대상이 된다. 이곳에서 뱀파이어 유전자가 들어 있던 피를 받은 그는 기적적으로 살아난다. 그런 그에게 어릴 때 친구인 강우(신하균)의 부인 태주(김옥빈)가 유혹의 대상이 된다. 병약한 강우와 의남매처럼 자라다가 결혼한 태주는 강우의 가학적 농락의 대상일 뿐이다.

이 작품에서도 뱀파이어라는 존재는 소외된 자들의 현신이다. 고아인 상현은 성당에서 신부의 손에 키워지고, 자연스럽게 신부의 길을 걷는다. 그는 신부 시절에 한 수녀가 고해성사에서 “자살하고 싶다”고 토로하자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우울증 약을 먹으라”고 말한 뒤 스스로 자살과 별 차이가 없는 순교(엠마누엘에서 실험 대상이 된 일)를 택할 정도로 자신의 삶에 열의가 없다. 태주 역시 고아로서 강우의 어머니 라여사(김해숙)가 운영하는 행복한복집 앞에 버려져 키워지며 불행한 결혼생활을 하게 된다. 이들의 억눌린 욕망은 뱀파이어라는 형태로 발현되지만 이들을 기다리는 건 파멸뿐이다.

이처럼 뱀파이어가 강력한 성적 욕망을 지닌 인간의 그림자로서 등장한 것은 근대 이후다. 물론 흡혈이란 모티브는 신화시대로부터 면면히 이어져 왔다. 이집트 신화에서 저승과 곡물의 재배를 관장하는 신 오시리스는 열네 조각으로 찢겨져 죽은 뒤 부인인 이시스 여신의 도움으로 피를 마시고 되살아난다. 또 누구나 홀릴 정도로 아름답고 관능적인 외모를 지닌 인도의 토착 여신 야크시는 남자를 유혹해 피를 먹었다고 전해진다. 과학계에서는 유전병인 포르피리아병, 또는 광견병에 걸린 환자로부터 뱀파이어의 전설이 나왔다는 분석을 내 놓기도 한다. 포르피리아병은 혈액 속의 헤모글로빈이 철분과 결합되는 것을 돕는 단백질 포르피린이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해 다른 사람의 피를 받아야만 살 수 있는 병이다. 이 병의 환자는 잇몸이 내려앉아 정상인보다 이가 크게 보인다. 또 광견병은 여성에 비해 남성이 걸릴 확률이 7배나 높아서 뱀파이어가 주로 남성인 이유를 설명해 주며, 물어뜯는 증상을 보이고 불면증을 앓아서 밤에 돌아다니는 습성이 있다는 것이다.

혐오스러운 뱀파이어 드라큘라
그러나 뱀파이어가 성적 욕망으로 이글거리는 혐오스러운 소외자 이미지로 확립된 것은 빅토리아 시대로 불리는 19세기 영국 작가 브램 스토커의 소설 <드라큘라>(1897)가 등장하면서부터다. 영어로 뱀파이어, 한자로 흡혈귀, 동유럽에서는 노스페라투로 불리던 이 종족이 ‘드라큘라 백작’이란 대표적인 캐릭터로 탄생한 것은 스토커의 작품 때문이다. 스토커는 현재 루마니아의 중부지방인 트란실바니아에 내려 오는 전설을 토대로 하여 고딕풍 소설인 <드라큘라>를 집필했다.

전설에 따르면 15세기 중반에 오스만 투르크의 지배를 받던 루마니아의 옛 왕국 왈키아의 왕자 블라드 테페슈는 어렸을 때 터키와 헝가리에 인질로 끌려가 성장했다. 청년이 되어 돌아온 그는 왕위 계승자의 칭호를 얻고 터키의 침략에 대항해 나라를 비호한다. 볼모로 잡혀 있는 동안 애국심과 적국에 대한 적개심을 키워 온 왕자는 긴 막대나 가시 달린 바퀴를 사용해 터키인 포로를 잔혹한 방법으로 처형했다. 테페슈 왕자가 뱀파이어로 서유럽에 알려지게 된 것은 밀수와 무관세 무역으로 부당하게 돈을 거둬들인 색슨족 상인과 충돌했을 때 그들을 무참하게 살육했기 때문이다. 드라큘라라는 명칭은 그의 아버지가 헝가리 왕으로부터 용이란 작위를 받아 자신을 루마니아어로 용을 뜻하는 드라큘이라고 명명했고, 여기에 드라큘의 아들이란 의미에서 어미에 a가 붙어서 생겨났다.

뱀파이어가 된 신부와 친구 부인의 성적 욕망을 그린 영화 <박쥐>의 한 장면.

스토커의 <드라큘라>는 한 세기가 지나도 여전히 무척 흥미로운 소설이다. 트란실바니아의 고립된 성에서 살던 드라큘라 백작이 영국으로 건너가기 위해 변호사 사무실에 부동산 구입을 의뢰함으로써 조너선 하커라는 젊은 사무원이 드라큘라성에 가게 되고, 거기서 늑대를 마음대로 움직이고 성벽을 박쥐처럼 오르내리며 관속에서 잠을 자는 백작의 실체를 보게 된다. 가까스로 풀려난 그가 약혼녀인 미나 하커의 극진한 보살핌으로 건강을 회복하는 사이에 드라큘라는 화물선을 타고 자신의 고향에서 가져온 흙 상자와 함께 횟비라는 항구도시에 도착한다. 그곳에서 드라큘라는 미나의 친구인 루시 웨스턴라를 제물로 삼는다. 드라큘라에게 물려 뱀파이어가 된 루시는 무덤에서 나와 아이들의 피를 빨다가 연인이던 아서를 비롯해 구혼자이던 존 수어드 박사와 퀸시 모리스, 수어드 박사의 스승인 반 헬싱 박사의 손에 처형된다. 런던에 도착한 미나와 조너선은 드라큘라를 잡기 위해 이들과 협력한다.

이 과정에서 미나가 드라큘라의 피를 마신다. 그러나 드라큘라의 심안이 된 미나 덕분에 그들은 도버 해협을 건너 자신의 고향으로 도주하는 드라큘라를 추격하고 끝내 그를 처단한다.

드라큘라는 뱀파이어의 한 명일 뿐이지만 뱀파이어를 대표하는 대명사가 된다. 그는 엄격한 얼굴과 긴 수염, 당당한 체구를 지녔으며 재력과 능력이 뛰어나다. 자신의 성에서 조너선을 처음 만났을 때 상당히 귀족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 그는 변호사를 고용하고 계약서를 작성하는 등 주도면밀하게 일을 처리한다. 그러나 악의 화신으로서 그는 기독교적 윤리와 이성, 지식으로 무장한 반 헬싱 일행에게 진압된다. 특히 그와 상반되는 이미지를 띠는 정결하면서 지적이고 용감한 부인 미나의 결정적인 도움으로 인해 소멸한다.

<드라큘라>는 전설을 차용하면서도 19세기 말 영국의 분위기를 고스란히 담아낸다. 당시의 법률·교역·병원·우편제도와 함께 증언을 녹취하는 녹음기 등 기계가 등장한다. <트와일라잇> 시리즈가 평범한 여학생의 일상에 나타난 ‘에일리언’을 다루듯이 드라큘라 역시 수백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대도시 런던에 나타난다. “이런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전설과 미신에 기댈 수밖에 없다”는 반 헬싱의 말대로 드라큘라는 문명의 도시에 나타난 비이성적이고 불합리한 존재다. 문명의 억압과 변종의 출현은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1818)과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지킬박사와 하이드씨>(1886)의 주제이기도 하다. 이 시기에는 또 억눌린 욕망으로 인해 히스테리 증상을 보인 여성들을 치료한 프로이트가 등장했으며, 런던에서 다섯 명의 매춘부를 살해한 연쇄살인범 잭의 공포가 장안을 휩쓸었다.

문명 도시에 나타난 비이성적 존재

드라큘라라는 뱀파이어의 전형을 만들어 낸 브램 스토커의 소설을 충실히 옮긴 영화 <드라큘라>의 한 장면.

절대악을 퇴치하는 십자군 원정대를 연상시키는 <드라큘라>는 대개의 순교문학에서 고문 장면이 가학적이거나 피학적인 포르노그래피와 비슷한 것처럼 성적 환상으로 가득하다. 조너선은 드라큘라성에서 여성 뱀파이어의 위협에 시달리는 장면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금발의 여자가 무릎을 꿇고 몹시 만족스러운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풍만한 몸매에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거기에는 어쩐지 매스껍게 느껴지는 불쾌감이 있었다. 게다가 그녀는 목을 길게 빼고 짐승처럼 혀로 입술을 핥았다. 뾰족하고 흰 이빨을 감싼 붉은 혀와 선홍빛 입술의 물기가 달빛에 비쳐 번들거렸다. 그녀의 머리가 점점 다가오면서 그녀의 입술이 내 입술과 턱을 지나 목을 깨물 것처럼 아래로 내려갔다. … 나는 두 눈을 감고 나른한 황홀경에 빠져 다음 순간을 기다렸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작가 스토커의 동성애 성향이 <드라큘라>에 들어있다는 점이다. 더블린 트리니티 칼리지를 졸업한 뒤 공무원 생활을 한 스토커는 당대의 유명한 연극배우 헨리 어빙에게 매료돼 공직을 떠난 뒤 어빙이 운영하는 런던 라이시엄 극장의 비즈니스 매니저로 30년 동안 일한다. 어빙에 대한 숭배는 광적인 것이었으나 스토커는 이를 억누른다. 마침 <드라큘라>가 나오기 2년 전인 1895년에는 작가 오스카 와일드가 동성애 죄로 기소된다. 그래서 평론가인 크리스토퍼 크래프트는 드라큘라의 조너선에 대한 지속적 관심을 환기시키면서 “이 작품의 근본적인 불안은 드라큘라가 다른 남성을 유혹하고 뒤흔들고 고갈시킬 가능성에서 온다”고 지적한다. 작품 전반에 깔린 성에 대한 작가의 강박관념은 루시와의 결혼이 좌절되고, 그녀가 뱀파이어가 됐을 때 루시의 약혼자인 아서가 신경질적으로 그녀의 가슴에 여러 차례 말뚝을 박는 장면에서도 두드러진다.

명작의 재구성

<드라큘라>는 전설의 변용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 반영이다. 19세기가 지닌 문명의 억압성이라는 문제에 대해 스토커는 드라큘라라는 존재를 빌어 암시적으로 대응했다. 외견상 드라큘라는 빛의 전사들에게 처형되지만 문명사회의 미덕을 체현한 여성 미나의 몸에는 드라큘라의 피가 섞여 들고, 이것은 자손들에게 은밀하게 대물림된다. 작가는 드라큘라를 완전히 죽이지 않은 채 삶의 의외성, 선과 악의 공존, 욕망과 도덕 사이의 갈등이라는 주제를 넌지시 드러낸다. 이런 점에서 순정만화 풍으로 각색된 <트와일라잇> 시리즈와 매너리즘의 양식화된 스타일로 변한 <박쥐>는 원작소설인 <드라큘라>의 다채롭고 풍부한 결들 가운데 지극히 일부를 취했을 뿐이다.

<한윤정 기자 yjhan@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