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이야기]“이러면 안 되는 거니까”

영화 ‘변호인’에 대한 열기가 뜨겁다. 1년 전 ‘레미제라블’의 열풍을 훨씬 뛰어넘는다. 관객들은 왜 ‘변호인’에 환호하는 걸까.

지난해 12월 31일, 서울 신촌의 한 술집에서 10여명이 참석한 송년회가 열렸다. 참석자의 대다수는 40대 중반~50대 초반에 걸쳐 있었다. 소주와 막걸리가 한참을 오간 뒤 누군가 “오늘 <변호인>을 보고 왔다”며 슬며시 말을 꺼냈다. 그러자 저마다 “나도 봤다”며 소감을 한마디씩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어떤 이는 1980년대 대학생 시절의 경험담을 이야기하며 “고문 경찰관이나 공안검사들의 이야기가 낯설지만은 않다”고 말했다. 또 다른 이는 “속물 변호사 시절의 송우석에게서 나의 과거 모습을 봤다”고 이야기를 이었다. “나는 노빠인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전제하면서도 “영화 속의 장면들이 옛날얘기만은 아닌 것 같아 씁쓸했다”는 반응도 있었다. “법과 원칙”만 이야기하는 박근혜 정부를 비판하는 목소리도 이어졌다.

<변호인> 열풍이 뜨겁다. 지난 1일 개봉 보름 만에 관객 600만명을 돌파했다. 1월 5일쯤에는 700만명을 넘어설 것이라는 관측이 나올 만큼 파죽지세다. 1년여 전 열풍을 이끌었던 <레미제라블>의 관객동원 기록(590만명)은 이미 경신했다.

“영화 속 장면 옛날 얘기만은 아냐”
<레미제라블>은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지지가 낮았던 2030세대를 중심으로 인기몰이가 시작됐다. 영화계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종합해보면 1000만 관객을 넘보는 영화들의 경우 우선 젊은층이 흥행을 주도한다. 그 이후에 40대 이상 기성세대가 영화관을 찾으면서 엄청난 관객수를 기록하는 패턴을 보인다.

하지만 <변호인>의 경우 이런 전형적인 과정과는 달랐다. 1월 3일 현재 영화 예매사이트 맥스무비의 집계에 따르면 <변호인> 예매자의 46%가 40대 이상이다. <용의자>, <어바웃 타임> 등 비슷한 시기 인기를 끌고 있는 영화의 경우 예매자 중 40대 이상이 차지하는 비중이 30% 중반에서 40% 초반에 그쳤다.

<변호인>의 홍보대행사인 퍼스트룩 관계자들도 “일반적으로 시사회에선 40대 이상을 찾아보기 어려운데, <변호인>의 시사회에는 40대 이상 관객이 약 20~30%를 차지했다”고 말했다.

현장에서도 이런 분위기를 감지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12월 30일 서울 종로 한 영화관의 <변호인> 상영관의 모습은 독특했다. 40~50대 관객이 절반 이상으로 보였다. 가족 단위로 영화를 보러 온 사람도 제법 눈에 띄었다. 영화관마다 넘치는 젊은 커플들의 모습은 상대적으로 적어 보였다.

50대 초반 남성 ㄱ씨는 이번 송년회를 지인들과 <변호인> 이야기를 하며 다 보냈다. 1980년대 대학을 다닌 ㄱ씨는 <변호인>의 주인공 송우석처럼 속물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스스로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가결되기 전까지는 정치·시사와는 연이 없었던 사람이었다고 소개했다.

“많은 이들이 영화 후반부에 감동을 받았다고 하는데 저는 전반부가 더 기억에 남아요. 사회생활을 시작한 뒤 빨리 돈을 벌고 집을 사려는 송우석의 모습에서 예전의 제 모습이 보였으니까요.”

<변호인>에서 송우석은 재벌기업의 세무변호사가 될 수 있는 길을 버리고 인권변호사가 된다. 과거 노무현 전 대통령은 ‘속물 변호사’ 시절을 회고하며 “출세를 하고 보니 마음도 달라졌다”며 “눈 딱 감고 이웃의 고통을 애써 외면하며 살았다.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이 ‘왜 변호사는 돈 있는 사람 편만 드느냐’고 물으면 ‘세상에 있는 것 치고 돈 있는 사람 편리하게 안 돼 있는 게 어딨냐’며 무시했다”고 말한 바 있다.

1984년 11월 경찰이 가스차를 투입해 연세대학교에서 벌어진 학생 데모를 진압하는 모습. | 경향신문 자료사진

1980년대를 살았던 여러 학생운동가들은 당시 대학생으로서의 권리를 포기하고 노동운동, 빈민운동에 몸을 담았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어진 인생경로를 충실히 걸었을 뿐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ㄱ씨는 “나와 달리 과감하게 세상사에 뛰어든 송우석의 모습에서 감동을 받았다”고 말했다.

박근혜 정부 정치적 퇴행 맞물려 공감
정윤수 문화평론가는 “40~50대의 <변호인> 열풍은 이들의 집단적 경험과 관련이 있다”고 말한다. 이 세대는 1987년 민주화 운동과 1997년 IMF 외환위기라는 두 번의 큰 역사적 사건을 경험했다. 민주화 운동은 4050세대에게 ‘국민 주권’에 대한 인식을 심어줬고, IMF 외환위기는 반대로 ‘국가는 결코 개인을 지켜주지 않는다’는 냉혹한 현실을 깨닫게 했다.

민주주의의 퇴행을 걱정하는 한편으로 본인과 자녀들을 생존경쟁으로 내몰고 있는 4050세대의 인식의 근저에는 이런 역사적 경험이 있었다는 게 정 평론가의 설명이다. 특히 야권 성향의 4050세대에게 있어 박근혜 정부는 정치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퇴행한 낡은 국가주의적인 정부다. 이런 공감대와 박근혜 정부 1년이라는 시기가 절묘하게 맞아들어가 <변호인>이 흥행하게 된 원동력이 됐다.

물론 2012년 대선 직전, 야권 지지층을 겨냥한 듯한 영화들이 여럿 개봉됐지만 <변호인>만큼 성공하진 못했다. <26년>과 <남영동 1985>가 대표적이다. 영화의 완성도 부족이나 정치의식의 과잉을 지적하는 평론도 많았다. 이에 비하면 <변호인>에 대한 평가는 주로 긍정적인 편이다. 보수성향 인터넷 매체에서 <변호인>을 ‘노무현 찬양 영화’라고 비판하긴 했지만, 일부에 그쳤다.

하지만 관객들의 호불호가 갈리는 장면이 없었던 건 아니다. 특히 젊은 세대의 관객들은 송우석이 ‘속물 변호사’에서 단숨에 ‘인권 변호사’로 각성하는 부분에 고개를 갸웃거린다. 영화의 고문 장면이 “지나치게 잔혹하다”거나 송우석의 변신을 “납득하기 어렵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30대 초반 여성 ㄴ씨 역시 송우석의 변신에 100% 공감하진 못하는 경우다. ㄴ씨는 “주변에서 영화가 좋다는 추천이 많아서” 영화관을 찾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해서 큰 호감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는 재판정에서 고문 경찰과 검사가 ‘애국심’과 ‘법’에 목소리 높이는 부분이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철도노동자들이 파업하는 이유에 귀를 기울이기보다는 ‘법과 원칙’을 내세우는 현 정부의 모습과 겹쳐 보였다는 게 ㄴ씨의 말이다.

정윤수 평론가는 “야만적인 고문 등을 직접 겪지 못한 젊은 세대가 송우석의 변화에 잘 공감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과거의 탄압과 고문이 얼마나 잔혹했는지 ‘과거사 진상규명위’ 등에서 실체를 완벽히 밝혔어야 하는데, 이명박 정부 들어 모두 흐지부지됐다”고 말했다. <변호인>을 보고 특정인에 대한 추억을 그리는 데 그칠 게 아니라, 영화의 성공을 계기로 미래 세대가 과거의 잔혹한 역사를 정확히 알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난해 12월 29일 서울 용산의 한 영화관에서 관객들이 <변호인>을 보기 위해 표를 예매하고 있다. | 정지윤 기자

물론 <변호인>도 그 시대상을 온전히 담고 있다고 보긴 어렵다. 1980년대는 많은 학생운동가들이 ‘법과 원칙’의 미명 아래 구속과 수배에 시달렸다. 물론 영화에 나온 것처럼 공권력의 조작에 의한 희생양도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학생운동가들을 ‘순진하고 불쌍한 학생들’인 것처럼 묘사하는 것은 정확한 역사인식이 아니라는 지적도 있다.

이택광 경희대 교수는 “1980년대는 사실 혁명의 시대였고, 사회주의적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세력도 있었다. 영화에서 표현된 것과 달리 학생운동권이 노무현 대통령 등을 견인한 것”이라고 말했다.

1980년대 당시 시대상을 주도한 것은 참여정부 인사들이 아니라 군사정권 체제를 ‘혁명’을 통해서라도 뒤엎으려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현실 패배 보상 효과 ‘힐링 영화’ 한계도
부림사건의 피해자들도 ‘순진무구한 학생들’인 것만은 아니었다. 부림사건 피해자 고호석씨는 지난해 12월 28일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제가 (노 변호사에게) 우리를 변호하려면 ‘전환시대의 논리’와 ‘후진국 경제론’ 등은 꼭 읽어보라고 했어요. 그것을 읽고 노 변호사가 많이 변한 게 느껴졌어요”라고 말했다.

정윤수 평론가는 “<변호인>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극악한 반공주의 때문에 국가 폭력의 희생자들을 순진하게 그리는 경향이 많다. 지금과 같은 노동운동, 시민운동이 없었던 1980년대 상황에서 가장 선도적이었던 학생운동 세력을 ‘착한 우리 새끼들’이라는 관점에서만 보는 것은 아쉬운 부분”이라고 말했다.

<변호인>과 <레미제라블>을 비교하는 시각도 있다. 박근혜 정부 1년을 전후로 성공한 두 영화는 관객들에게 현실의 패배를 영화를 통해 보상받는 효과를 줬다. 그래서 ‘힐링 영화’라고 불리기도 한다. 1832년의 실패한 혁명을 다룬 <레미제라블>은 마지막에 모든 등장인물이 나와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관객들은 좌절된 혁명이 성공한 것 같은 인상을 받으며 ‘힐링’을 받은 것이다.

이 마지막 장면은 1848년 프랑스 2월 혁명을 암시한 것이다. 하지만 실제 1848년 혁명은 나폴레옹의 조카인 나폴레옹 3세에게 정권을 넘기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레미제라블> 흥행 당시 하재근 문화평론가는 야권 세력이 영화의 ‘힐링’에 도취될 것이 아니라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레미제라블> 당시 하 평론가의 글을 <변호인>에 맞게 고쳐보면 다음과 같다.

“민주화세력 입장에서 지금은 영화의 카타르시스, 눈물에 도취될 때가 아니다. 영화 속 송우석의 후계자들이 왜 민중의 마음을 얻지 못했는지를 냉정하게 읽어내야 한다. 이 점을 놓치고 감동에 빠져 힐링만 하다가는 <변호인>이 민주화 세력에 마취주사가 될 것이다.”

<백철 기자 pudmaker@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