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이야기]더 개악된 고무줄 방송심의규정

기계적 불균형 강요하는 ‘공정성’ 조항 그대로 놔둔 채 애매모호한 ‘민주적 기본질서’ 조항 신설… 심의위원들의 자의적 해석 여지 커져 논란

“다른 종편의 방송을 선정적 보도와 마녀사냥으로 걸면 백 번은 걸 수 있다. JTBC가 정부에 입바른 소리를 하니까 미운털이 박힌 것 아니냐.”

중앙미디어네트워크(중앙일보·JTBC)에 소속된 ㄱ기자는 톤이 높아졌다. 그는 JTBC에 대한 방송통신심의위(이하 방통심의위)의 연이은 제재에 불만이 많아 보였다.

지난 15일 방통심의위는 방송심의소위를 열어 지난해 11월 26일 방송된 ‘JTBC 뉴스9’을 심의했다. 당시 방송에는 김형태 변호사가 출연해 박창신 신부에 대한 검찰 수사가 고발 하루 만에 이뤄진 것에 대해 “이례적으로 빠른 수사”라고 지적했다. 여당 추천 인사들은 김 변호사를 “이념 편향을 가진 사람”으로 몰며 JTBC가 공정성을 위반했다고 주장했다.

지난 1월 9일 민주언론시민연합 등 방송 관련 단체들이 서울 양천구 방송회관 앞에서 방송 및 통신 심의규정 개정안 반대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신설된 조항은 국보법 방송심의 버전”
반면 이들 여당 추천 심의위원들은 박창신 신부에 대해 “북에 가서 활동해라”, “엄창” 등의 막말을 방송에 내보낸 TV조선 ‘돌아온 저격수다’에 대해서는 “정치 풍자 프로그램에는 이해될 수 있는 부분이 꽤 있다”며 공정성에 문제가 없다고 주장했다.

ㄱ기자는 “중앙일보·JTBC 구성원들이 이런 입장을 내는 것 자체가 이례적인 일이다. 방통심의위 조치 자체가 너무 잘못된 것이라 내부적으로 참을 수 없다는 목소리가 있었다”며 “방통심의위에 비하면 방송사는 약자다. 특별보고서 때문에 오히려 회사가 피해를 볼 수 있기 때문에 성명서도 너무 세게 내지 못했다”고 전했다.

ㄱ기자가 언급한 ‘특별보고서’는 지난해 12월 20일 중앙일보와 JTBC 평기자들이 속한 공정보도위원회에서 낸 것이다. 당시 공정보도위는 ‘JTBC 뉴스9’이 공정성 위반을 이유로 벌점 4점에 해당하는 ‘관계자 징계 및 경고’의 법정 제재에 처해진 데 대해 “방통심의위 판단을 수긍할 수 없다”는 취지의 특별보고서를 발표했다. 벌점 4점의 제재는 광주민주화운동이 북한군에 의한 폭동이었다는 취지의 방송을 한 TV조선, 채널A가 받은 것과 같은 수준의 징계다.

법원이 방통심의위의 고무줄 잣대에 제동을 걸었지만 방통심의위 여당 추천 인사들의 태도는 크게 달라진 것같지 않다. JTBC 뉴스9의 징계 수위를 논의한 방송심사소위가 열리기 일주일 전 서울고법은 방통심의위가 CBS ‘김미화의 여러분’에 내린 주의조치가 부당하다고 판결했다. 뉴스보다 논평에 가까운 방송 내용에 기계적 균형을 지나치게 적용했다는 취지다.

JTBC와 CBS가 징계를 받은 근거 조항은 방송심의규정 9조 ‘공정성’의 2항이다. ‘방송은 사회적 쟁점이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된 사안을 다룰 때에는 공정성과 균형성을 유지해야 하고 관련 당사자의 의견을 균형 있게 반영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여러 언론단체들은 9조 2항이 ‘공정성’에 대한 구체적인 기준을 제시하지 못할 뿐 아니라 ‘기계적 균형’에 입각한 심의를 부추긴다며 개정 또는 폐지를 주장해 왔다.

정민영 참여연대 공익법센터 변호사는 현재의 공정성 조항을 ‘50대 50 조항’이라고 불렀다. 심의과정에서 여권 추천 인사들이 이 조항을 ‘기계적 균형’으로 해석하고 징계를 남발하는 일이 많았다는 설명이다. 실제 방통심의위 여당 추천 인사들은 JTBC, CBS 등을 징계하면서 특정 부분만 콕 집어 ‘야당 편향적인 인사만 출연시켰다’고 지적했다. 방송 전체적으로 양쪽의 입장을 반영했는지는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또한 정 변호사는 ‘공정성’이 제멋대로 적용되는 사례로 KBS 스페셜 정율성 편에 대해 방통심의위가 법정 제재인 주의조치를 내리기로 한 것을 들었다. 조선족 출신의 정율성은 중국에서 유명한 음악가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공산주의자였다.

9일 방통심의위 전체회의에서 권혁부 부위원장은 “6·25에 참전해 우리에게 피해를 준 사람을 왜 다큐로 미화하느냐”고 말했다. 권 부위원장은 친일 행적이 있는 백선엽에 대한 프로그램에 대해선 “백선엽 장군 미화 좀 하면 어떠냐”고 발언한 바 있다.

이희완 민주언론연합 사무처장은 “지금의 공정성 기준이라면 정치심의를 통해 방송을 억압할 수 있다. 최대한 자의적인 해석을 줄이는 방식으로 고쳐야 한다”며 고 말했다.

하지만 방통심의위는 공정성 조항을 고치지 않았다. 오히려 방통심의위는 9일 방송심의규정을 개정하면서 자의적 해석의 소지가 있는 조항을 추가시켰다. 신설된 제29조의 2 ‘헌법의 민주적 기본질서’ 항목이다.

방심위 “상위법인 방송법 따랐을 뿐”
이 조항의 1항은 “방송은 헌법의 민주적 기본질서를 해치는 내용을 방송해선 안된다”는 것이고, 2항은 “방송은 남북한 간의 평화적 통일과 적법한 교류를 저해하는 내용을 방송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특히 언론단체들은 29조의 2 1항에 대해 “애매모호한 조항이 하나 더 늘었다”며 “국가보안법의 방송심의 버전”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정민영 변호사는 “여야가 방통심의위원을 6대 3으로 추천하는 구조가 있는 한 정치심의 의혹은 끊이지 않을 것”이라며 “지금의 방통심의위는 언론·출판에 대한 허가나 검열을 허가하지 않는 헌법 21조 2항을 위반하고 있는 것으로 볼 소지도 있다”고 말했다.

언론단체 관계자 ㄴ씨는 2항 역시 1항만큼이나 문제가 많다고 지적했다. ㄴ씨는 “조항만 보면 평화통일을 지지하는 진보세력에 유리한 것처럼 보일 수 있다”면서도 “진보 쪽의 통일정책이 오히려 통일에 방해가 된다는 시각을 가진 단체들이 이 조항을 이용해 다수의 민원을 제기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방통심의위 측은 언론단체의 문제제기를 ‘오해’로 치부하고 있다. 애매모호함을 지적받는 조항들도 사실 상위법인 방송법을 따른 것이라는 설명이다. 김형성 방통심의위 방송기획팀장은 “공정성, 민주적 기본질서 등은 방송법 33조 2항에 규정된 심의규정일 뿐”이라고 답했다.

심의규정의 구체성이 부족해 다수를 점한 여당 측 위원의 정치적 성향에 따라 심의가 이뤄지지 않겠느냐는 질문에 김 팀장은 “한 번 규정을 정했다고 영원히 가는 것이 아니다. 명확성과 구체성에 대한 지적이 계속되면 다음 규정 개정 때 반영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김 팀장은 “애초 심의규정 개정안에는 ‘민족의 존엄성’, ‘역사적 위인 폄훼 금지’와 같은 조항이 있었지만 외부의 지적과 비판을 수용해 철회했다”며 “방통심의위가 마치 방송을 통제할 의도를 가지고 규정을 개정한 것으로 보진 말아 달라”고 덧붙였다.

개정된 심의규정 중에는 웃지 못할 조항도 포함돼 있다. 13조 “시사프로그램의 진행자와 출연자는 타인을 조롱, 희화화해서는 안된다”는 항목이 그것이다.

이희완 사무처장은 “워낙 종편 대담·토론프로그램에서 명예훼손을 하고 상식에 맞지 않는 인신공격성 이야기가 오가다 보니 이런 제재조항까지 생겼다”면서 “방송에서 성숙한 토론문화가 있었다면 굳이 이런 조항까지 만들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백철 기자 pudmake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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