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이야기]스트레스, 우리는 회사서 푼다

직장인 10명 중 7명이 직무 스트레스로 고통 …

근로자의 마음치료에 눈뜬 기업들 심리상담센터ㆍ명상 프로그램 등 운영 늘어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좋은 평판을 얻기 위해 앞만 보고 달렸다.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나중에 다른 소리가 나오지 않도록 맡겨진 업무는 치밀하고 꼼꼼하게 처리했다. 야근은 생활이었다. 상사에게 평가를 잘 받기 위해, 후배에겐 약점을 보이지 않기 위해 몸부림을 쳐야만 했다.

“스트레스 관리요? 술을 많이 마셨죠. 하루에 한 갑 이상 담배도 피웠습니다. 식사시간보다 일이 중요했으니까, 제때 밥을 못 먹은 적도 많았어요.”

윗사람에겐 ‘일 잘하는 직원’으로 평판이 좋았지만, 후배들은 그를 무서운 선배로 여겼다. “치열하게 살았던 것 같습니다.” 두 아이에겐 좋은 아빠였지만, 주말에 가족과 여행을 한 적이 별로 없었다.

기업의 상담센터에서 직원이 상담을 받고 있는 모습. 상담센터의 특성상 개인 프라이버시 노출을 막기 위해 연출해서 촬영했다. | 이상훈 선임기자

주말에는 아내가 힘들어하는 남편을 위해 “아빠 힘드시니까, 우리 나가서 놀자”라며 아이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가곤 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기업에서 살아남기 위해, 승진하기 위해,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 그는 그렇게 살았다. 그게 당연한 줄 알았다. 입사 후 10여년 동안 그렇게 앞만 보고 달렸다.

2010년 4월 어느 날, 그에게 브레이크가 걸렸다. 몸에 이상이 왔다. 수술을 받아야만 하는 큰 병이었다. 초기에 발견한 게 불행 중 다행이었다. 회사에 병가를 냈다. 병가를 낸 후에야 진짜 소중한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주위의 평판이나 성과보다 나와 가족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큰 병을 앓고 난 후에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나중으로 미루는 게 얼마나 부질없는지 알게 됐죠.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바로 하자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내 눈 앞에서 애들이 노는 모습을 보면 얼마나 예쁘던지. 가족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습니다.”

심리상담 처음엔 꺼리다 나중엔 권유
수술 후 몇 개월을 쉬고 회사에 복귀했다. 그는 변했지만, 회사는 여전했다. 경쟁과 성과, 속도만을 요구했다. 그에게 일도 쏟아졌다. 큰 수술을 마치고 직장에 돌아왔지만, 변한 게 없었다.

“큰일을 치르고 온 사람한테 너무 하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스트레스는 쌓여가고, 몸은 안 좋아졌다. 힘들다는 하소연을 해봤지만, 상사는 “너무 나약해진 것 아닌가”라며 그의 정신자세를 지적했다. 급기야 “심리상담 한 번 받아봐”라는 말까지 들었다.

회사를 위해서, 팀을 위해서, 성과를 위해서 달려온 그에게 심리상담사의 도움을 받으라는 조언은 자존심 상하는 말이었다. 반발심까지 생겼다. “좋다, 회사에서 그렇게 하라니 하면… 하는 생각으로 심리상담센터를 방문했습니다. 아무런 기대도 없었죠.” 회사에 다닌 10여년 동안 한 번도 이용해보지 않은 심리상담센터였다.

무심하게 앉아 있는 그에게 심리상담사가 몇 마디 했다. 그도 뾰루퉁하게 대꾸했다. 심리상담사의 이어진 말. “일을 왜 잘해야 합니까?” 회사에서 운영하는 심리상담센터인데도,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을 들었던 것이다.

신선한 자극이었다. “몸이 아플 때까지, 병이 생길 때까지 야근을 해가면서까지 왜 일을 했던 것일까라는 반문을 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그 이후로 심리상담센터를 계속 이용하게 됐습니다.”

어느덧 15년차 대기업 차장이 된 박모씨의 이야기다. 박 차장은 사내 심리상담센터를 이용하면서 삶의 태도까지 변했다. 그동안 중요하게 생각했던 주위 평판이나 성과보다는 자신의 자존감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SK이노베이션 상담코칭센터인 ‘하모니아’에 구비돼 있는 심리상담 관련 조사지.

가정이나 회사에서 그를 두고 “여유가 보인다. 사람이 달라졌다”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박 차장은 지금도 직장 선·후배들에게 “스트레스를 술로만 풀지 말고, 심리상담센터를 적극적으로 이용해보라”고 적극적으로 추천하고 있다.

박 차장이 겪었던 직장 내 스트레스는 한국 직장인에게는 평범한(?) 이야기다. 그만큼 한국 직장인의 스트레스가 높기 때문이다. 각종 자료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2009년 OECD가 내놓은 ‘Society at a Glance 2009’ 자료에 따르면 직장인이 직무 스트레스를 받는 비율이 한국 직장인은 87%로 OECD 가입 국가 평균 78%보다 9%포인트나 높았다. 가까운 일본 직장인은 72%, 미국 직장인은 79%가 직무 스트레스를 받았다. 멕시코는 60%에 불과했다.

한국 직장인은 직무 스트레스에 반비례해 직무 만족도는 매우 낮았다. OECD 평균 직무 만족도는 81%, 미국 82%, 멕시코 92%의 직장인이 직무에 대해 만족한다고 대답했지만, 한국과 일본 직장인의 직무 만족도는 69%에 불과했다.

한국 직장인은 직무 스트레스는 세계 최고 수준으로 높고, 직무 만족도는 세계 최저 수준으로 낮은 최악의 환경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셈이다.

임원은 물론이고 직원 가족 이용도
한국 통계청이 내놓은 자료에서도 직장인의 스트레스가 과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통계청은 2008년, 2010년, 2012년 직장인의 스트레스를 조사한 바 있다.

2012년 13세 이상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이들을 대상으로 스트레스 조사를 한 결과 74.1.%(매우 많이 느낌 17.5%, 느끼는 편임 56.6%)가 스트레스를 느꼈다고 대답했다.

2010년은 77.1%, 2008년은 77.8%였다. 직장인 스트레스가 완만하게 줄어들고 있지만, 여전히 높은 수치를 보여주고 있다. 정신질환으로 진료를 받는 환자수도 늘어나고 있다.

삼성경제연구소 보고서(2013년 6월)에 따르면 2010년 정신질환으로 진료를 받은 직장인은 약 231만명에 달했다. 2004년에 비해 1.5배나 증가했다.

직장인이 직장에서 스트레스를 받는 가장 큰 요인은 대인관계다. 1월 취업포털 커리어가 직장인 752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직장에서 우울증을 느끼는 요인으로 ‘직장 내 인간관계’가 16%로 가장 높았고, ‘회사의 비전이 없다고 느낄 때’라는 대답이 13.8%로 뒤를 이었다.

업무량이 많은 것(11.1%)에 대해서는 예상보다 스트레스가 적었다. 서울성모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채정호 교수는 “대부분의 직장인은 돈을 받고 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일이 많고 적음에 대해서는 잘 견디는 편”이라고 설명했다.

직장인의 스트레스가 높으면 기업에도 손해다. 업무 집중력이 떨어져 기업의 생산성 저하로 이어진다. 스트레스로 인한 이직률 상승은 기업의 인적자원 손실로 나타난다.

한국 기업은 직장인 스트레스를 개인문제로만 국한시키지 않고,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1970년대 외국에서 먼저 시작된 ‘근로자 지원프로그램’(Employee Assistance Programs·EAP)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근로복지공단은 EAP를 ‘근로자의 개인·가정·직장·스트레스·재무·법률 등의 문제를 관련 전문가를 통해 해결토록 지원함으로써 직장과 가정의 균형에 대한 욕구를 충족해주는 프로그램’이라고 정의내리고 있다.

2010년 12월 9일 시행된 ‘근로복지기본법’에 선진기업복지제도로 EAP를 명시하고 이를 도입하도록 하는 지침을 포함했다.

EAP의 대표적인 형태가 바로 심리상담센터다. 심지어 명상프로그램을 도입한 게임회사도 나오고 있다. 삼성, 현대·기아차, SK, LG, 포스코, 롯데, CJ 등 대기업을 중심으로 심리상담센터를 도입하기 시작했다.

1990년대 중반 삼성과 포스코가 가장 먼저 나섰고, 2000년대 중반부터 LG와 SK 등이 뒤를 이었다. 자료에 따르면 EAP를 도입한 기업과 공공기관은 1000여개에 이르고 있다.

기업이 운영하는 심리상담센터는 크게 두 가지 모델이 있다. 기업이 직접 상담실을 만들고 상담사를 채용해 운영하는 내부 모델과 다인C&M과 같은 전문기관과 기업이 협약을 맺어 심리상담센터를 외부에서 운영하는 방식이다.

기업의 심리상담센터 역사를 잘 아는 이가 LG전자 MC연구소 심리상담실을 운영하는 전재영 실장이다. 전 실장은 삼성 여성상담센터 설립에 관여했고, LG 심리상담실 초창기 멤버다.

전 실장은 “삼성의 경우 기업 오너가 상담실 설립을 주도했고, LG는 직원들의 요구로 심리상담실이 만들어졌다”면서 “어느 기업이든 심리상담실 문을 열 때 ‘이게 될까’라는 의구심과 함께, 기업 이미지가 안 좋아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가진다. 하지만 직원들의 이용이 늘어나고, 이를 통해 직장 분위기가 좋아지는 효과를 얻게 된다”고 설명했다.

심리상담실 이용 직원의 변화도 눈에 띈다. 전 실장에 따르면 초창기에는 20~30대 직원의 이용률이 많지만, 심리상담센터가 활성화되면 30대 후반~40대 부서장들의 이용률이 높아지게 된다. 나중에는 상담실을 이용했던 경험을 가지고 있는 임원이 이용하는 경우도 생긴다.

기업들도 심리상담실을 운영하면서 여러 효과를 보고 있다. 박 차장의 경우처럼 심리상담실을 통해 직장 내 대인관계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도 한다. 직장과 가정의 양립이 어려워 이혼위기에 처해 있던 직원이 심리상담실을 통해 화해하는 경우도 있다.

전문가로부터 성공적이라고 평가받는 사내 심리상담센터로 꼽히는 곳이 SK이노베이션에서 운영하고 있는 심리상담센터 ‘하모니아’다. 2005년 설립 이후 매해 500여명의 임직원이 이용하고 있다.

임직원뿐만 아니라 가족까지 무료로 심리상담을 받을 수 있게 한 것이 성공 요인이다. 무엇보다 상담 내용은 상담사만이 알고 있을 뿐 기업 내 어떤 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직원의 프라이버시가 보호되기 때문에 일과 중에도 편안하게 이곳을 이용할 수 있게 했다. SK이노베이션 하모니아 상담코칭센터 윤정순 상담사는 “꾸준하게 이용률이 높은 것이 가족 상담이다. 가족 상담을 하다 보면 나중에는 직장 조직에서 일어나는 일로 상담 범위가 넓어진다”고 설명했다.

비밀보장ㆍ기업주 태도가 성패 관건
전문가들은 EAP 서비스의 확대는 필수라고 예측한다. EAP 도입에 드는 비용 대비 8배의 수익효과가 있다는 해외 연구조사 결과도 나왔다.

다인C&M 이상하 부장은 “힐링 바람이 불면서 심리상담센터에 대한 편견이 많이 줄었다.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심리상담센터를 찾기 어려워졌지만, 이제는 쉽게 찾아볼 수 있게 됐다”면서 “앞으로 기업에서 심리상담센터나 명상프로그램 도입이 크게 확대될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기업 오너의 인식 변화가 가장 중요하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서울시청 심리상담센터 쉼표의 임정민 상담사는 “기업이 됐건 공공기관이 됐건 상담사와 CEO가 어떤 인식을 가지고 있느냐가 가장 중요하다”면서

“박원순 시장은 공무원 한 명 한 명이 모두 건강해야 시정이 잘 돌아간다는 철학을 가지고 있다. 보수적이라는 공무원 조직에서 쉼터의 이용률이 높은 것은 시장의 마인드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최영진 기자 cyj@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