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이야기]돈 없으면 군대도 못 가겠네

정글모, 귀덮개, 목토시, 장갑, 핫팩, 세탁세제, 면도날 등 자비로 마련하는 ‘사제’ 수두룩…

신세대 장병 자율성 확대한다면서 개인에게 경제적 부담 지워

한국군을 경험한 예비역이라면 보급품 대신 ‘사제’ 물품을 쓴다는 것의 의미를 잘 안다. 보급받은 물품이 아닌 민간용 제품을 사서 쓴다는 것은 ‘짬밥’의 상징만은 아니다.

굳이 사비를 들여가면서 보급품을 거부할 정도로 열악한 병영 내 생활상을 말해주는 것이다. 국방부 시계는 돌고 돌아 말년 고참들이 ‘신세대 장병’이라며 혀를 차던 그 신병들도 어느덧 전역을 한다.

민무늬 전투복이 얼룩무늬를 거쳐 디지털 무늬로 바뀌고, 페치카가 있던 내무반이 침대형 생활관으로 변신했다. 그러나 좋아진 군대에서도 돈 들여 사제 쓰는 군생활 모습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방한복을 껴입은 장병들이 철책선을 따라 경계근무를 하고 있다. | 김영민 기자

겨울 되면 필요한 사제품목 더 늘어
2011년 10월부터 디지털 무늬 전투복이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했다. 디지털 전투복을 지급받은 초기 세대인 이근일씨(23)는 지난해 전역해 예비역이 됐다.

육군은 전투복 복제를 바꾸면서 챙이 있는 전투모 대신 베레모를 도입했다. 베레모 착용은 새로운 사제 물품의 수요를 불러일으켰다. 이씨는 “여름에 작업할 때 정글모를 쓰는 게 짬밥의 상징이 됐다”고 말했다.

일명 나까오리 혹은 부니햇이라고도 부르는 정글모는 둥글고 넓은 챙 덕에 여름철 야외작업 중 햇볕으로부터 얼굴을 가리기에 용이하다. “챙 있는 전투모는 보급이 안 나오는데 예전 얼룩무늬 전투모는 못 쓰게 하니 결국 디지털 무늬 정글모가 인기를 끌었다. 한때는 군장점에서 없어서 못살 정도였다.”

원칙적으로는 옥외작업 시에도 모자를 착용해야 하는 군인들에게 베레모는 전투모에 비해 단점이 많다는 지적은 도입 이전부터 나왔던 것이다. 문제는 베레모 외에 다른 모자가 전혀 지급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작업할 때는 물론이고 일과 후 활동복을 입고 지내는 시간에도 베레모를 착용해야 한다.

이전까지는 사제 전투모를 구입하는 이유가 보급받은 전투모의 모양이 펑퍼짐해서 멋이 나지 않기 때문이거나 여분의 모자가 필요해서였다면, 베레모 도입 이후부터는 활동에 편리한 모자 자체가 없기 때문에 울며 겨자먹기로 사제품을 구입하게 된 것이다.

미 육군의 경우 역시 2001년부터 베레모를 기본으로 하는 복제를 도입했다가 동일한 문제가 불거져 2011년부터 다시 챙이 있는 전투모로 회귀한 바 있다.

일선부대에서 베레모 외의 모자를 지급해달라는 요구가 빗발치자 국방부는 부랴부랴 올해부터 다양한 활동에 쓸 수 있는 활동모를 지급하겠다고 나섰다.

그나마 여름철은 사제품에 대한 수요가 적은 계절이다. 방한피복이 부족한 겨울에는 구입해야 할 사제품목의 종류도 늘어난다. 국방부의 자료를 보면 지난해 기준 기능성 방한복의 보유율은 33%에 불과했다.

이마저도 방한복이 부대 단위로 지급되는 피복이어서 전체 병력으로 따지면 5명당 1명 꼴로 지급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실제로는 15명에 1벌 꼴로 방한복을 갖춘 실정이다. 장병들은 개인 용도로 귀덮개와 목토시, 장갑은 물론 핫팩까지 구비하려면 한 번에 2만~3만원은 기본으로 깨진다고 말했다.

예비역 이씨는 “디지털 무늬는 고사하고 10년도 더 넘어 때도 안 빠지는 옛날 얼룩무늬 방한복도 없어서 못 입는다”며 “귀도리(귀덮개)나 목토시도 원래는 보급품으로 나와야 되는데 (안 나오니) 다들 사제를 사서 쓴다”고 말했다.

겨울철 기온이 영하권에 머물러 있는 때가 대부분인 전방지역에선 빨래를 말리기 위해 건조기를 써야 할 경우도 심심찮게 생긴다. 빨래를 옥외 건조장에 널었다가는 마르기는커녕 얼어붙어 찢어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민간 업자가 운영하는 세탁실에서 세탁기나 건조기를 쓰는 데도 당연히 돈이 들어간다. 병력 대비 세탁기나 탈수기 등이 부족한 부대에서는 돈이 드는 사제 세탁기·건조기마저도 한참을 줄을 서야 겨우 돌릴 수 있는 실정이다. 돈을 아끼기 위해 최대한 많은 빨래를 꾸역꾸역 집어넣는 것은 물론이다.

대부분의 병사들은 세탁에 필요한 세제 역시 사제품을 사서 쓴다. 보급으로 나오는 세탁용 세제의 품질이 사제품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세탁용 세제뿐 아니라 샴푸 등 세정용품도 장병들이 영내 매점에서 구입해서 쓰는 대표적 품목이다.

그나마 비누의 경우 유일하게 현금 지급 대상에 포함돼 취향에 맞게 사서 쓸 수 있었다. 현금 지급 대상이 되는 개인 일용품으로 올해 치약과 칫솔이 추가됐지만 휴지나 세탁세제, 면도날 등은 내년에야 현금 지급 대상 품목에 포함될 예정이다.

육군의 경우 지난 2월 기획관리참모부에서 운동화와 속옷, 양말 등의 개인용품에 대해서도 “민간용품 사용을 확대할 수 있게 선택적 자율성을 보장할 예정”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당장 시행이 아닌 향후 검토과제로 선정된 것”이라고 밝혀 구체적인 시행시기에 대해서는 언급을 피했다.

한편 휴가나 외출·외박 시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군 전세객차(TMO)마저도 지난해 말 지원예산 부족으로 장병들이 이용하지 못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국군 수송사령부에서 전세해 운영하는 객차에 대한 이용료를 납부하지 못해 지난해 11월부터 서비스가 중단된 것이다. 여비가 지급되지 않는 휴가에 한해 탑승할 수 있었던 TMO 열차였기 때문에 별도의 휴가 여비를 지급받지 못한 장병들은 역시 제 돈을 내고 기차에 탑승할 수밖에 없었다.

기본생활 충족 투명한 예산책정 시급
영내 병사들이 일과 후 정비 및 여가시간에 가장 많이 활용하는 것으로 나타난 ‘사이버지식정보방’(사지방) 역시 공짜가 아니다.

군인공제회의 사업으로 운영되고 있는 사지방은 2007년 시간당 180원의 이용료를 부과하는 것을 시작으로 유료화됐다. 사지방 이용료는 3년 후인 2010년에는 시간당 540원으로 3배나 오르면서 병사들에게 부담으로 작용했다.

게다가 컴퓨터 기기에 대한 업그레이드가 이뤄지지 않아 7~8년 전 사양의 컴퓨터를 교체 없이 사용하는데도 요금은 그대로라는 불만이 지속적으로 제기됐다. 국방부와 군인공제회는 지난해 12월 시간당 50원을 인하했다.

예비역 육군 준장인 표명렬 평화재향군인회 상임대표는 “군은 무형의 전력인 사기를 진작해야 함에도 장병들이 필요로 하는 부분에 귀를 기울이지 않아 오히려 사기를 저하시키고 있지는 않은지 점검해야 한다”면서 “현역 병사들이 가장 절실하게 느끼는 월급문제를 비롯해 기본적인 생활수준을 갖출 수 있도록 군 내부의 예산 책정 과정이 투명하게 공개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