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인문학은 우대해도 전공자는 앙~돼요

‘현차고시’ ‘삼성고시’ 키워드 역사문항이지만 인문학도 취업은 오히려 좁은 문

4월 12일과 13일 전국에서는 ‘현차고시’ ‘삼성고시’로 불리는 현대자동차 인적성시험(HMAT)과 삼성직무적성검사(SSAT)가 각각 치러졌다. 올해 두 입사시험에서 키워드는 역사 문제였다. 지난해 현대차가 입사시험에 역사 문제를 내기 시작한 후 올해 삼성 시험에서도 역사 문제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난이도가 높은 역사 문제가 대기업 입사시험에 등장해 응시자들이 앞으로 취업에서도 인문학이 필수가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예상을 낳게 했다.

토론면접 퇴조도 인문학 출신들에 불리
역사 같은 인문학이 입사시험에 대세로 등장하는 데도, 인문계 출신 대학생들에게 취업의 문은 점점 좁아지고 있는 아이러니한 현상이 전개되고 있다. 현대차 같은 경우 올해부터 ‘현차고시’에는 이공계 출신들만 응시가 가능해져 인문계 출신 대학생들은 더 좁아진 취업문을 실감했다. 지난해 처음으로 입사시험에 역사 문제를 넣은 현대차는 올해 이공계 출신을 대상으로 역사 문제를 물어본 것이다.

이 같은 현상 때문에 대기업이 입사시험에서 인문학을 중시하지만 인문학 전공자에게는 취업의 문을 닫아걸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비판이 일고 있다. 취업 컨설팅 업체인 TGS커리어컨설팅의 이상연 대표는 “기업에서 인문학은 필요하되 인문학 전공자는 필요로 하지 않는 역설적인 현상이 나타나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 대표는 “예전에는 기업에서 이공계 출신에게 이공계 쪽의 전문적인 지식만 요구했지 인문학적인 지식을 요구하지 않았다”며 “하지만 최근 입사시험 추세를 보면 이공계 졸업자들에게 교양인문학 수준의 지식을 요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 대기업의 영업분야는 일반영업 중심에서 기술영업 중심으로 바뀌고 있다. 전문적인 IT산업뿐만 아니라 여러 다양한 산업에도 기술분야 영업이 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전문적인 영업에는 인문학 출신자보다 공대 출신자들이 다소 유리할 수밖에 없다. 인문학 출신자들이 어려운 기술분야 영업을 하는 것보다 공대 출신자들이 인문학적 소양을 갖고 영업을 하는 것이 오히려 유리한 환경인 것이다. 이런 추세 때문에 기업으로서는 이공계 출신자들에게 인문학적 지식 수준을 묻는 문제를 입사시험에 출제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4월 13일 서울 강남구 대치동 단국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에서 시행된 삼성의 직무적성검사(SSAT)가 끝난 뒤 응시생들이 고사장을 빠져나오고 있다. / 홍도은 기자

동국대 박서진 취업지원센터장은 “최근 입사시험에 역사 문제가 등장하는 것은 하나의 과도기라고 볼 수 있다”면서 “취업을 준비하는 대학생들이 사실 수능처럼 요령을 습득하려 하기 때문에 역사 문제가 출제된다고 해서 인문학이 취업에 필수요소가 될 것 같지는 않다”고 말했다. 박 센터장은 “SK의‘바이킹(Viking)형’ 인재 양성 프로그램이나 삼성의 통섭형 SW 인재 양성 프로그램인 SCSA프로그램처럼 여러 가지 다양한 방식이 도입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설명했다.

인문학 전공자들에게 불리하게 적용되는 또 하나의 취업 트렌드가 있다. 최근 토론면접이 퇴조하는 추세라는 것이다. 한때 대기업 취업에서 유행한 토론면접은 여러 명이 한 가지 특정 주제를 놓고 토론하는 방식을 말한다. 학력이나 스펙에서 높은 점수를 받더라도 사실상 인문학적인 배경이 요구되는 주제의 토론에서 인문학 전공자들은 이공계열에 비해 상대적으로 유리한 결과를 나타냈다. 하지만 이 토론면접이 점점 줄어들면서 인문학 전공자들이 설 자리도 좁아지고 있다.

‘인문학 바람’이 출판계와 강연계에서 다소 불고 있지만 정작 인문학의 요람인 대학에서는 오히려 이중고를 겪고 있다. 인문학 출신자들의 취업률이 떨어지고 있는 데다, 설상가상으로 교육부의 특성화 대학 방침으로 인문학 관련 학과들이 구조조정의 대상으로 몰리고 있다. 강원대 인문대학 독어독문학과 김유동 교수는 “밖에서는 인문학 열풍이 분다지만 대학교 안은 오히려 찬바람이 불고 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법대나 사범대, 공대 계열의 학과는 전공 특성상 취업 방향이 정해져 있지만, 인문학은 이런 방향성이 없다”면서 “인문학에 이런 다른 학문의 취업 잣대를 들이대면 인문학 자체가 이뤄질 수 없다”고 말했다.

입사시험에 역사 문항을 출제하는 것에 대해서 기업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삼성 관계자는 “올해 역사 관련 문항이 상식 영역 50문제 중 14문제 출제됐다”면서 “인문·이공계 학생 모두 좀 더 역사에 관심을 갖고 공부를 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삼성에서는 인문계 전공자를 대상으로 6개월간 소프트웨어를 교육시킨 후 SW 엔지니어로 활용하는 SCSA프로그램을 2013년부터 도입해 1기 200명, 2기 200명이 교육 중이고 3기 200명을 선발하고 있는 중”이라고 말했다. 현대차 관계자는 “현대차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기업으로서 차를 만들고 파는 것이 바로 대한민국의 문화를 파는 것이라는 점에서 입사시험에 역사 문제를 출제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입사자뿐만 아니라 현직 사원들도 외부 강사들을 초빙해 역사와 인문학에 대한 강의를 듣고 있다”고 덧붙였다. 인문계 출신자의 수시채용에 대해 현대차 관계자는 “인문계 출신 입사자 규모를 줄인 것은 전혀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이 관계자는 “취업준비생들이 한날 한시에 대거 시험을 치르는 부작용을 없애기 위해 인문계 출신자는 원하는 직무를 등록하고 현대차는 이를 보고 수시채용하는 방식을 선택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인문학 열풍, 정작 캠퍼스는 찬바람
취업시험 시즌 중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의 인문학 관련 발언은 인터넷에서 관심을 모았다. 정용진 부회장은 4월 8일 연세대 대강당에서 열린 강연에서 “취업을 위한 인문학 공부를 해선 안 된다”며 “취업난 속에서 대학생들이 스펙 쌓기에만 열중해 정작 인간과 삶에 대한 통찰력을 키우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취업에서 인문학이 강조되지만 실제로는 인문학적 성과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상연 대표는 “기업이 단기적인 성과를 눈앞에 두고 교양인문학 수준을 갖춘 실용학문 출신자들을 뽑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면서 “하지만 전쟁에서 졸병만 데리고 전쟁을 하는 것이 아니고 전쟁의 성패가 결국 전략가에게 달려 있는 것처럼 인문학적 정신을 가진 창의적인 인물이 기업의 장기적인 전략에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김유동 교수는 “인문학은 근본적으로 강의를 통해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직접 책을 읽고 삶에 부딪히는 리버럴한 분위기 속에서 이뤄진다”면서 “기업에서는 이런 리버럴한 분위기를 살려줘야 한다. 개성이나 끼를 허용해야 창조적인 사유가 나올 수 있다”고 강조했다.

<윤호우 선임기자 hou@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