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윤수의 도시 이미지 읽기]혈색 좋고 토실한 벽보 속 얼굴들

입후보자들은 오랜 관습에 따라 정형화된 구도와 포즈로 유권자들에게 다가가려는 전략을 쓴다. 예술가가 아니라 한 표라도 더 호소해야 하는 현실 정치인인 까닭에 신뢰할 만한 인상, 호감어린 웃음 등을 익숙한 시각 문법으로 전달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평균적인 인상보다 영양 상태가 좋고 피부색도 훤하다. ‘나를 찍으면 다들 나처럼 건강하고 다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고 무언의 연설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세월호 이후, 일상으로 돌아가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하긴 돌아가야 할 것이다. 그런데 어디로…. 어떤 일상으로? 세월호의 아이들이나 여러 탑승객들이 비일상의 무슨 대항해 모험을 떠난 것도 아니지 않는가. 그들의 시간도 지극한 일상이었으며 그들이 이용했던 교통수단도 지구 어디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일상적인 것이었다. 세월호 이후에도 끔찍한 사건·사고가 연이어 터졌는데, 그 모든 것 역시 이른바 ‘일상’의 시공간에서 벌어진 일이다. 출퇴근 시간에 전철이 멈춰섰고 터미널과 쇼핑몰에서 불이 났다. 과연 돌아갈 만한 일상이 우리에게 있단 말인가? 그러니 일상으로 돌아가라는 말은 어찌 보면 ‘잠자코 가만히 있으라’는 강력한 위협처럼 들린다.

디지털시대라고 해도 선거벽보는 필요
이 대도시의 오랜 관습과 이미지로 보건대, 세월호 이후 일상으로 돌아간 것은 정치였다. 예년보다는 차분해졌지만 그래도 수많은 현수막과 유세차량과 저열한 비방전이 재탕되었으니 역시 한국 정치지형만큼 금세 일상으로 돌아가는 경우도 없어 보인다. 그 엄청난 비극과 슬픔과 무서운 분노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대중을 향한 정치행위만큼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인다.

6월 지방선거 포스터가 담벼락에 붙어 있다. | 정윤수

나는 길거리에 나붙은 선거벽보를 보고 있다. 21세기 첨단의 인터넷 디지털 시대에 이토록 길고도 복잡하게 벽보를 붙여야 한단 말인가 하고 잠깐 생각했지만, 그러나 아직은 아니었다. 우선 인터넷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말 자체가 매우 위험한 문화계급적 차별의 시선이다.

아직 유권자의 대부분은 20세기 중엽을 살고 있다. 컴퓨터로 인터넷에 접속하거나 스마트폰으로 실시간 정치 뉴스를 읽는다 해서 세상이 온전히 그렇게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면 큰 착각이고 오만이다. 이러한 매체에 가까이 할 수 없는 사람이 너무나 많고 설령 그러한 매체에 익숙하다 해도 세상 사람 모두가 책상에 앉아서 일을 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가능한 한 거리 곳곳에 아직은 벽보를 붙여 공람해야 한다.

컴퓨터나 스마트폰을 능숙히 사용한다 해도 자기 지역구에 출마한 단체장, 교육감, 도의원, 시의원 등등의 면면을 일일이 검색하면서 누구를 찍을까 골똘히 생각하는 사람도 퍽 드물다. 인터넷 스마트 시대를 살아가지만, 그 기기로 입후보자들을 검색하는 일은 거의 하지 않는 사람을 위해서라도 길거리에 선거 관련 현수막과 입후보자 얼굴들을 일제히 붙이는 것은 아직 유효하다. 거리의 현수막과 벽보는 ‘아, 이젠 진짜 선거구나’ 하는 계몽의 효과와 더불어 조금이나마 흥분되고 들썩거리는 정치적 격동의 어떤 기운을 느끼게도 해준다.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며 한참이나 지켜보니, 꽤 많은 사람들이 입후보자들 면면을 훑으며 지나간다. 나이 지긋한 유권자들은 후보자들의 면면을 꼼꼼히 읽고 지나가며, 아직 투표권을 갖지 못한 어린 학생들이 직관적으로 후보자들 인물평(실은 인상평)을 재잘대며 지나간다.

김수근 서울시의원 후보의 이색 포스터(맨 오른쪽) | 위키트리 손기영

지난 한 달 사이에 나는 서울, 고양, 춘천, 수원, 광주 등지를 돌아다녔는데, 이 수많은 대도시에 나붙은 입후보자들의 인상에서 발견되는 한결같은 공통점은 영양상태가 매우 좋아 보인다는 점이었다. 물론 서울시장이나 경기도지사 후보들처럼 오랫동안 그 인상과 정견과 지향성이 확인된 경우는 예외다. 지방선거로 인하여 크고 작은 도시에 갑자기 쏟아져나온 이른바 ‘지역 정치인’들 말이다. 혈색도 좋고 볼살도 토실하고 눈빛도 맑다. 그들은 하나같이 히딩크 스타일로 오른손을 추켜올리거나 만델라 스타일로 두 손을 그러쥐고 중요한 믿음이라도 전하는 자세를 취한다. 더러는 케네디 스타일로 손바닥을 활짝 펴서 흔드는 사진이고, 어떤 이들은 전두환 스타일로 뭐든지 밀어붙이겠다고 굳게 입술을 앙다물고 있다.

몇몇 예외 있지만 ‘스투디움’이 대세
20세기 현대 정치가 만들어낸 정치 포스터의 익숙한 전형을 대부분 지키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오른손을 이용한다. 왼손잡이도 있을 텐데. 그들은 한 명의 사진사가 찍은 듯이 윗니를 살짝 드러낸 채 웃는다. 어색하다는 것은 본인도 잘 알 텐데. 그들은 하나같이 어린아이와 손을 잡거나 저 먼 허공으로 손짓을 하는 사진을 뿌려댄다. 정치 이미지 전단에 아이를 등장시키는 것이 너무 진부하다는 것을 다들 잘 알 텐데.

그러나 롤랑 바르트 식으로 말하여 이런 것이 바로 ‘스투디움’이다. 오랜 관습, 변하지 않는 규칙, 전형화된 포즈 등을 벗어나지 않는 사진 이미지의 관성이 곧 스투디움이다. 동네 사진관마다 걸려 있는 대형 가족사진의 구도와 포즈가 그런 경우다. 선거철마다 보게 되는 현수막, 유세차량, 전단지, 벽보 등은 이러한 ‘스투디움’으로 가득차 있다.

물론 어디나 예외는 있다. 서울시의회에 출마한 통합진보당 김수근 후보는 추호의 망설임도 주저함도 없이, 본인의 얼굴 대신 ‘박근혜 퇴진’을 벽보에 내걸었다. 선관위가 엄격하게 관리하는 벽보이기 때문에 이 구호(곧 입후보자 포스터)를 훼손하면 처벌을 받게 된다. 그런가 하면 역시 서울시의회에 출마한 노동당의 권남미 후보는 ‘출산이 애국입니까?’라는 도발적인 질문과 함께 아름답게 부풀어 오른 만삭의 자기 몸을 사진으로 썼다. 여성의 신체에 강요되는 국가주의에 대해 그 자체로 반대하고 저항하는 메시지가 담겨 있는 것이다.

정윤수의 도시 이미지 읽기

이런 예외에도 불구하고 대개의 입후자들은 스투디움 이미지를 반복한다. 오랜 관습에 따라 정형화된 구도와 포즈로 유권자들에게 다가가려는 전략 말이다. 물론 그들은 야심만만한 예술가들이 아니라 한 표라도 더 호소해야 하는 현실 정치인이다. 강한 의지, 신뢰할 만한 인상, 호감어린 웃음 등을 익숙한 시각 문법에 의해 전달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한국 사회의 평균적인 인상에 비하여 다들 영양상태가 좋고 피부색도 훤하고 어디 하나 구김살도 잔주름도 없이 환하게 웃는다. 나를 찍으면 다들 나처럼 건강하고 다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고 무언의 연설을 하고 있는 것이다.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