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점규의 노동여지도]비정규직 도시의 ‘비정규직 없는 공장’

야권연대로 당선된 민주당 출신 안양시장은 이번 선거에서 전통적으로 서민들이 많이 살고 야성이 강한 만안구에서 뒤집어져 떨어졌다.

페인트가 벗겨진 낡은 공장의 담벼락, 연기가 피어오르지 않는 굴뚝, 굴뚝보다 더 높이 솟아 있는 초고층 아파트. 경기도 군포역에서 내려다본 풍경이다. 안양, 군포, 의왕은 철로를 사이에 두고 아파트와 공장이 공존한다. 당정동 공단지구를 가로질러 걷는다. 1987년 6월 항쟁의 열기를 이어받아 7월부터 시작된 노동자들의 대투쟁. 이곳 어디서쯤 젊은 노동자들이 짱돌과 화염병을 던지며 백골단에 맞서고 있었을 것이다.

1987년 7월 27일 한국제지를 시작으로 만도기계, 금성전선, 대우중공업, 경원제지, 농심, 안양전자 등 안양권역 거의 모든 사업장이 노조 결성과 어용노조 민주화 투쟁으로 타올랐다. 양동규 전 금속노조 부위원장은 “안양지역의 노동운동은 1991년 5월 한진중공업 박창수 열사 시신 탈취에 맞선 투쟁과 1996~97년 정리해고 날치기 통과에 맞선 총파업까지 전국의 중심이었다”고 말한다. 외환위기 이후 만도기계를 시작으로 대기업 공장들이 지역으로 이전하면서 노동운동도 함께 쇠퇴하게 됐다.

군포의 한 공장. | 박점규

현대케피코 민주노조 25년의 투쟁
자동차의 전기·전자장치를 만드는 현대케피코 군포공장에 연구동을 짓는 공사가 한창이다. 공장 안으로 들어서자 지게차가 자동차부품을 실어 나르고 있다. 노동조합 입구에 조합원 교육을 알리는 포스터가 붙어 있다. 2012년 1월부터 올해 2월까지 입사한 124명의 신입 조합원 명단이 빼곡히 적혀 있다. 주로 사무직과 기술직이다. 전체 조합원은 895명. 20년 전까지만 해도 400명 남짓의 작은 공장이었는데 이제는 안양권역에서 가장 큰 회사다.

“비지땀이 삘삘삘 열나게 돌아도 요놈의 노동자 살림은 발바닥이 박박박 닳도록 뛰어도 앉으나 서나 제자리.” 1989년 케피코에 입사한 진규형 지회장은 25년 전 처녀총각 시절, 단칸방에 살면서 포장마차에서 소주를 마시며 부르던 이 노래가 이제 옛이야기가 됐다고 말한다. 민주노조 25년 투쟁으로 조합원들의 평균 연봉은 7000만원이 넘는다. 산본과 군포, 수원의 새 아파트들이 케피코 노동자들의 보금자리다.

점심시간, 젊은이들은 짜장볶음밥이 준비된 양식코너에, 나이 든 노동자들은 닭죽이 나온 한식코너에 줄을 선다. 식당에서 음식을 만들고 나눠주는 10명의 노동자들도 모두 정규직이다. 장명권 지회장 시절인 2008년 7월 노동조합 규약을 바꿔 식당·경비·청소노동자 22명을 조합원으로 받아들이고, 정규직으로 전환시키기로 합의했다. 당시 사무장이었던 이천화씨는 “‘비정규직 없는 공장’ 소식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자 현대차그룹 차원에서 개입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식당과 경비원은 모두 정규직이 됐지만 청소노동자 9명은 아직 정규직이 되지 못했다.

한국의 노동현장은 1997년 외환위기 이전과 이후로 구분된다. 현대자동차를 필두로 정규직 고용의 댐이 무너지고 생산현장은 사내하청 노동자로 채워졌다. 케피코에서도 청소·경비·식당노동자들을 비정규직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노조는 생산현장을 빼앗기지 않고 지켜냈다. 회사는 지금도 일이 힘들고 바쁜 수동 라인에 비정규직을 쓰자고 하지만 민주노조 정신을 지켜온 현장 조합원들에게는 씨알도 안 먹히는 얘기다.

점심식사를 마친 정식화 전 지회장이 노조사무실로 올라온다. 그는 사내하청을 막은 건 잘한 일이지만, 회사가 노조 몰래 사외하청을 크게 늘렸다고 전한다. 연 매출액 1조6000억원 중에서 5000억원가량은 프레틀, 쏠텍이엔지 같은 회사에 외주를 줘서 케피코 이름으로 납품한다는 것이다. 주로 부가가치가 적은 단품들이지만 솔로레이드밸브와 같은 비싼 부품도 있는데 불량이 많이 나와 케피코의 품질관리팀이 지원을 나간다고 한다. 그는 “아마 사외하청 노동자가 1000명 이상 될 텐데 케피코를 넘어 지역의 중소 영세사업장 노동자들을 조직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한다.

젊은 노동자들의 활기로 넘치는 공장을 나와 전철을 타고 명학역에 내렸다. 도로 한가운데로 난 인도를 따라 안양천 방향으로 걷는다. 아파트형 공장과 노동부 안양지청을 지나자 공단 사거리에 주연테크가 있다. 삼보, 현주와 함께 중소컴퓨터 삼총사였던 주연테크는 한때 홈쇼핑 판매 2위였다. 하지만 재벌 2·3세 일가들이 골목 빵집까지 잡아먹는 나라에서 ‘강소’기업은 ‘하늘의 별따기’다. 10년 전 서울 구로공단 시절 500명이 넘었던 노동자는 이제 126명 남았고 공장에선 56명이 일한다.

비정규직센터에 걸려오는 전화들
노동조합 조합원은 12명밖에 안 되지만 7년을 싸운 투사들이다. 조합원들은 해고된 노조 간부들을 위해 식당에서 노조사무실로 밥을 날랐다. 회사가 식판 2개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자 식판 하나에 밥과 반찬을 산더미같이 쌓아 가져오며 노조를 지켜냈다. 해고됐던 김영신 지회장과 곽은주 전 지회장은 2012년 1월 2일 복직했다.

지난해에는 매일 저녁 6시 이후 고정적으로 하던 30분 잔업을 없애고 기본급에 포함시켰다. 지난 2년 동안 노동시간은 줄이고 월급은 18만원 올렸다. 그래봤자 세금 떼고 나면 평균 140만원밖에 안 되지만, 김영신 지회장은 싸워서 얻어낸 소중한 성과라며 행복한 미소를 짓는다.

현대·기아나 케피코와 같은 대기업 노조가 중소영세 사업장 노동자들을 조직하고 연대하는 일에 나섰으면 좋겠다는 게 김 지회장의 바람이다.

명학역 반대편 주택가에 자리한 안양군포의왕비정규직센터를 어렵게 찾았다. 2010년 겨울에 문을 열었다. “비정규직 직업 중에서도 가장 힘든 곳에서 일하다 상담 오는 경우가 많아요.” 김상봉 소장의 얘기가 아프다. 월급 80만원을 받고 일했던 학교 비정규직 청소노동자, 형님 동생으로 지내던 정규직이 비정규직 자리로 와서 쫓겨나게 된 효성의 사내하청 노동자, 노예계약을 맺고 일하는 헤어디자이너, 출근하면 정규직만 빵과 우유를 주는 농심의 하청노동자들…. 고용노동부, 한국노총, 민주노총까지 전화를 하지만 속 시원한 얘기를 듣지 못하다가 비정규직센터에서 위로를 받았다며 고맙다는 전화를 종종 받는다고 했다. 그나마 전화가 오는 건 다행이다. 임금이 체불됐는지, 주휴수당이나 시간외수당을 받을 수 있는지조차 모르는 노동자들이 허다하다.

공장들이 빠져나간 안양은 가장 소비적인 도시로 변하고 있다. 작은 도시에 대형 유통업체만 7개다. 2년 전 안양시가 청소년수련관에서 롯데를 위한 취업박람회를 열었다. 지하 1층에서 식음료를 판매하거나 조리하는 파견노동자 자리를 지방정부가 돈을 들여 소개하고 있었던 것이다. 민주당 출신 시장이었다. 안신정 사무국장은 “안양시 일자리정책과 직원을 만났는데 취업도 못하는 사람이 수두룩한데 최저임금이면 어떠냐고 했다”며 “야권연대로 당선된 지방정부가 나쁜 일자리를 양산하는 기가 막힌 현실”이라고 말했다. 민주당 출신 시장은 이번 선거에서 전통적으로 서민들이 많이 살고 야성이 강한 만안구에서 뒤집어져 떨어졌다.

박점규의 노동여지도

어둑해지기 시작했다. 외국인노동자 자녀들을 위해 보육사업을 하는 ‘아시아의 창’ 후원의 밤이 열리는 산본역 중심상가 한 식당이 사람들로 북적인다. 베트남 사람들이 만들어준 쌀국수가 맛있다. 자동차연맹에서 노동운동을 했던 이영아씨의 제안으로 만들어진 이주노동자 지원 단체다. 80~90년대 민주노조의 정신은 민들레 홀씨처럼 조용히 번져나가고 있었다.

<비정규직 없는 세상만들기 집행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