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릭TV]관광 비디오로 전락한 해외 촬영

장혁·장나라 주연의 MBC 수목극 <운명처럼 널 사랑해>는 대만 드라마에서 시작됐다. 대만 TTV에서 2008년 방송된 <명중주정아애니>(命中注定我愛니)가 원작이다. 남의 부탁을 거절 못하는 성격의 여주인공이 여행지에서 만난 남자주인공과 하룻밤을 보낸 뒤 예기치 않은 임신을 하면서 벌어지는 일을 담은 로맨틱 코미디다. 제목은 물론 주인공 직업이나 성격에 대한 묘사 등은 대만이나 한국이나 같은데, 여행지는 전혀 다르다. 원작의 주인공들은 크루즈 여행에서 만리장성을 쌓지만, 한국의 장혁과 장나라는 마카오 고급 리조트에서 결정적인 순간을 맞는다. 이국적인 풍광은 주인공들의 첫 만남을 더 극적으로, 또 더 로맨틱하게 만들어준다.

권상우·최지우 주연의 SBS 월화극 <유혹>도 홍콩의 풍광으로 시청자들을 유혹하려 한다. 14일과 15일 방송된 1·2회에서는 홍콩에서 주인공들 사이의 관계가 맺어졌다. 주인공 차석훈(권상우)은 동업한 선배의 배신과 자살로 10억원이라는 빚을 떠안는다. 선배는 굳이 차석훈 부부를 홍콩으로 불러 유언을 알린다. 절망 끝에 놓인 부부는 선배가 남긴 돈 3000달러로 홍콩에서 마지막으로 아름다운 추억을 쌓으려 한다. 마침 사업차 홍콩에 와 있던 재벌 2세이자 기업 CEO인 유세영(최지우)이 이들 부부와 자꾸 얽힌다. 부부의 사연을 알게 된 유세영은 차석훈에게 3일의 시간을 주면 10억원을 주겠다고 제안한다.

SBS<유혹> | SBS제공

굳이 홍콩이 아니라도 흘러갈 수 있는 이야기지만 외국여행이라는 단어가 주는 자유와 일탈은 드라마의 내용을 더 돋보이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유혹>과 홍콩은 만남부터 호흡이 삐걱거린다. 파산할 위기에 놓인 차석훈 부부는 ‘스타의 거리’에 놓인 이소룡 동상에서 우스꽝스런 포즈로 사진을 찍는다. 홍콩이 자랑하는 백만불짜리 야경이 잘 보이는 호텔에서 묵는다. 주인공들은 호텔의 장점을 내세우려고 자꾸만 창가 근처를 서성인다. 유세영과 차석훈은 무더운 날씨 속에서도 홍콩 침사추이의 시계탑에서 샌드위치를 먹는다. 주인공보다 시계탑과 분수가 더 눈길을 끈다. 드라마 속에 로케이션이 녹아들지 못하고, 로케이션을 위해 주인공이 존재하는 듯한, 주객전도의 모습이다.

이국의 풍광을 소비하는 것도 세련되지 못하다. 홍콩 하면 떠오르는 주요 관광지를 쉴 새 없이 훑는데, 마치 단체관광단의 일원이 되어 가이드 깃발을 따라다니는 듯한 느낌이다. 사용된 음악도 신선하지 못하다. 아들을 낳지 못해 집에서 압박을 받고 있는 또 다른 재벌 2세 강민우(이정진)는 도피처럼 찾은 홍콩에서 옛 애인이 남긴 아들을 만난다. 클럽 가수인 옛 애인은 진추하의 ‘원 섬머 나잇’을 부른다. 심지어 차석훈과 유세영은 홍콩에서의 마지막날 자전거를 타면서 영화 <첨밀밀>의 한 장면을 재현한다. 그리고 등려군의 ‘첨밀밀’ 노래가 흐른다. 최근 세련된 여행 프로그램들이 숨겨진 명소를 소개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이다.

SBS<유혹> | SBS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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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들의 이야기가 입혀진 여행지에는 여행객들의 발걸음이 이어진다. 이를 겨냥해 드라마에는 해외 관광청·호텔·항공사들의 협찬이 이어지고, 해외 로케이션은 점점 규모를 키워간다. 한국드라마의 해외 로케이션은 이제 필수코스가 됐다. 그러나 협찬사의 입김 때문인지 주객전도의 악수가 나온다. <유혹>의 2회는 크레디트가 올라가는 마지막 장면에서 홍콩 춤사추이 거리의 풍광을 넣었다. 주인공들이 나오는 장면이 아니라 행인들을 담은 진짜 거리 풍경이다. 드라마가 관광 비디오로 전락하는 시점이다.

<박은경 경향신문 엔터·비즈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