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현대차 비정규직 노사합의 ‘시동’

전주·아산지회 ‘신규채용’ 합의안 서명… 울산지회는 ‘정규직 전환’ 고수하며 반발

“현대자동차는 현재 근무 중인 직접생산 하도급 인원 중 4000명(이미 채용한 2038명 포함)을 2015년 말까지 특별고용하며, 개인적 신분에 관한 사항으로 차별 및 불이익을 주지 않는다.”

현대차 사측과 금속노조 현대차지부(정규직 노조), 비정규직 전주·아산지회는 8월 18일 울산공장에서 교섭을 벌여 사내하청 특별채용 방안 등을 담은 잠정 합의안에 서명했다. 이 합의안은 다음날인 19일 조합원 찬반 투표를 거쳐 가결됐다. 10년간 이어진 현대차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타협안을 노사가 만들었다는 점은 긍정적이다. 하지만 노조가 ‘정규직 전환’ 원칙을 저버리고 ‘신규 채용’이라는 현실을 택했다는 점 때문에 사측에 투항한 것 아니냐는 비판도 나온다. 비정규직 조합원의 60% 이상을 차지하는 울산지회가 “특별채용은 회사 측에 불법파견에 대한 면죄부를 주는 것”이라며 반발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지난해 8월 296일 동안 농성을 벌이던 현대자동차 사내하청 노조가 송전철탑 고공 농성을 해제했다. 천의봉(가운데)씨와 최병승씨(왼쪽)가 크레인을 타고 땅으로 내려오고 있다. |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2003년 불거진 비정규직 문제
현대차 비정규직 문제가 본격적으로 불거진 것은 비정규직 노조가 만들어진 2003년부터였다. 외환위기 당시인 1998년 1만2000여명이 구조조정되는 아픔을 겪은 정규직 노조는 2000년 사측과 ‘완전고용합의서’를 체결했다. 공장 전체의 사내하청 비율을 16.9%까지 허용하는 내용이었다. 노조가 정규직 고용안정을 위해 사측이 사내하청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합의해준 셈이다. 2000년대 초반부터 정규직과의 차별 문제가 부각되면서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투쟁이 시작됐다.

2004년 노동부가 사내하청 127개 업체, 9234개 모든 공정을 불법파견으로 판정했다. 현대차 의장라인에서 근무하다 해고된 사내하청 노동자 최병승씨는 2005년 법원에 근로자지위확인 소송을 제기했다. 서울고등법원은 “최씨를 정규직 노동자로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2010년 7월 대법원은 “2년 이상 일했으니 정규직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취지로 고등법원 결정을 파기환송했다. 두 달 뒤 현대차 사내하청 노동자 1569명은 최씨에 대한 판결을 근거로 현대차를 상대로 근로자지위확인 소송을 제기했다.

최씨는 2012년 2월 대법원으로부터 불법파견 노동자인 만큼 정규직이라는 확정 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대법원 판결 해석을 둘러싸고 노사간 이견이 빚어졌다. 불법파견 판결이 소송을 낸 최씨뿐 아니라 다른 사내하청 노동자에게 적용될 수 있는지가 쟁점이었다. 비정규직 노조는 대법원 판결은 컨베이어벨트 흐름에 따라 이뤄지는 현대차 생산공정 전체에 대한 불법파견 판단이라고 주장했다. 사내하청 노동자의 전원 정규직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반면 사측은 대법원 판결은 최씨 개인에 대한 것일 뿐 다른 사내하청 노동자에게 일률적으로 적용하기 힘들다는 입장이었다.

분명한 점은 사측도 대법원 판결에 따른 부담을 피해갈 수만은 없었다는 것이다. 대법원 확정판결이 내려진 지 3개월 뒤 현대차, 사내하청업체 대표, 정규직 노조, 비정규직 노조, 금속노조 등 5자가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위한 특별협의’를 시작했다. 사측이 제시한 안은 정규직으로의 전환이 아니라 ‘정규직 3500명 신규채용’이었다. 복직 판결을 받았던 최씨, 천의봉 울산공장 비정규직 노조 사무국장 등 2명의 사내하청 노동자는 사측 제안에 반대해 2012년 10월 17일 울산공장 후문 옆 주차장에 있는 송전철탑에 올랐다. 고공농성은 지난해 8월 8일까지 296일간 이어졌다.

하지만 사측은 당초 제안대로 신규채용을 이어가고 있다. 2012년 7월부터 사내하청 채용을 시작해 현재까지 총 2038명을 정규직으로 채용했다.

노사간 특별협의는 중단된 지 10개월 만인 올해 4월 9일 재개됐고, 8월 19일 합의안이 가결됐다. 특별협의가 최근 타결된 것은 전주·아산지회의 현실적 판단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사측은 정규직 신규채용 인원을 기존 3500명에서 4000명으로 늘리겠다고 했다. 또 근속기간 3년을 1년으로 간주해주기로 했다. 기존 제시안에 비해 ‘진일보’한 측면이 있는 것이다.

노조로서는 또 8월 21·22일 1심 판결 결과를 장담할 수 없는 데다, 사측이 항소하면 앞으로 수년간 법적 공방을 벌여야 한다는 점도 고려한 것으로 풀이된다. 패소하는 조합원에 대한 구제책이 마땅치 않다는 점도 감안한 것으로 보인다. 사측도 소송을 제기한 1569명 모두 “불법파견이 아니다”라는 판결을 받을 가능성이 낮기 때문에 판결 전 합의를 이끌어내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합의안에는 특별고용 대상이 되는 사내하청 노동자의 경우 소송을 취하한다는 내용도 담겨 있다. 이번 합의에서 빠진 울산지회는 1심 판결을 지켜봐야 한다는 입장이다. 1392명의 비정규직 지회 조합원 중 울산지회 조합원은 890명가량으로, 전주·아산지회를 합친 500명보다 많다. 울산지회는 근속기간을 모두 인정해야 하고, 신규채용이 아니라 정규직 전환이 관철돼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노사 모두 현실적 판단 작용
하지만 울산지회가 기다리던 1심 판결이 한 달가량 연기됐다. 근로자지위확인 소송을 낸 원고 중 일부가 신규채용 지원을 위해 소 취하서를 냈기 때문이다. 울산지회는 8월 22일 울산시청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사측이 아산·전주공장 비정규직 노조와 정규직 채용에 합의한 목적은 비정규직의 집단소송 판결을 연기하기 위한 것”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고용노동연수원 박태주 교수는 이번 합의를 ‘땜질’이라고 규정하며 사측에 근본적 책임이 있다고 지적했다. 박 교수는 “사측이 1심 판결을 앞두고 법망을 피하기 위해 부랴부랴 합의를 했다”며 “재판 장기화에 따른 피로감, 판결 불확실성으로 인한 불안감 등 비정규직 노동자의 심리를 이용한 것”이라고 말했다. 사내하청 문제는 단순히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문제가 아니라 앞으로 회사가 내부 노동시장을 어떻게 꾸릴 것인가와 관련이 있다. 그는 “비정규직이 정규직으로 전환된다고 가정할 때 내부 노동시장의 유연성 등이 필요하다”며 “회사는 이런 부분에 대한 고민 없이 일종의 땜질을 한 것”이라고 말했다.

<김지환 경향신문 산업부 기자 baldkim@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