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내시경]‘이야기’의 힘 <즐거운 복희>

“인간은 이야기를 만들고, 이야기는 인간을 만든다.” 이강백 작, 이성열 연출의 <즐거운 복희>에 나오는 대사다. 지난해 가을, 처음 <즐거운 복희>의 대본을 읽었을 때부터 이 짧지만 강렬한 문장은 작품의 주제를 축약하고 있다고 느껴졌다. 그리고 긴 준비 기간을 거쳐 올가을 남산예술센터 무대에 오른 <즐거운 복희> 공연을 보면서는 여기에 덧붙여 “이야기는 스스로 변하며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간다”는 말을 첨가하고 싶어졌다.

이강백은 등단 이후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꾸준히 화제작을 발표하고 있는 다산의 작가로 널리 알려졌지만, 여전히 컴퓨터를 쓰지 않으며 수십 번의 수정과 퇴고를 통해 작품을 완성해가는 ‘손 글씨’ 집필의 작가로도 유명하다. 제목도 여러 번 바뀌었는데 <하나를 둘러싼 여섯>이란 제목이 <물속의 불타는 집으로>로, 이것이 <복희>로, 그리고 다시 <즐거운 복희>로 바뀌면서 이야기의 주제도 조금씩 궤도를 달리하면서 변해왔다.

연극 <즐거운 복희> | 남산예술센터 제공

처음 집필할 당시 작가는 자신들의 욕망으로 인해 사람이 죽었는데도 자신이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했고, 그렇게 하나의 ‘이야기’가 탄생했다.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어느 호숫가 펜션 타운. 펜션 주인 중 한 사람이었던 장군이 죽자 이웃의 펜션 주인들은 장군의 딸 복희의 슬픈 사연을 이용해 장군의 지인들을 펜션 손님으로 끌어들이기 시작한다. 나팔수와 사랑에 빠져 서울로 떠나려 했던 복희는 펜션 주인들의 방해로 발이 묶이고, 이 과정에서 나팔수가 호수에 빠져 죽게 된다.

아무런 표정 없이 잔잔하던 호수는 장군의 죽음, 그리고 복희를 사랑하던 나팔수의 죽음이라는 사건들을 계기로 비극적인 ‘이야기’를 품게 되고, 한적했던 호숫가는 이야기를 찾아온 사람들로 북적이게 된다. 욕망이 만들어낸 이야기 속에 갇혀 비극의 여주인공 역할을 강요받던 복희는 결국 장군의 펜션에 불을 지르고 사라지지만, 펜션 주인들은 장군 무덤 옆에 복희의 무덤을 만들며 그녀의 죽음이 또 다른 ‘이야기’를 완성시켜 더 많은 손님을 부를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연극 <즐거운 복희> | 남산예술센터 제공

최초의 대본에서는 아예 등장하지 않은 채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하던 ‘복희’는 수정 과정을 거치면서 극중 막간극에만 홀로 등장해 자기 이야기를 쏟아내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점차 주체성을 지닌 하나의 구체적인 인물로 살아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수정 과정을 거치면서 <즐거운 복희>는 점차 펜션 주인들의 욕망에 의해 만들어진 ‘슬픈 복희’와 실제 자신의 삶을 개척하고자 하는 ‘즐거운 복희’ 사이의 갈등과 자아 정체성에 초점을 맞춘 이야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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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올가을, 실제로 공연이 올라가고 나서는 또 하나의 이야기가 말을 걸기 시작했다. 이미 2년 전에 완성된 작품이니 세월호 사고보다 훨씬 먼저 쓰여진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극중 배를 타고 가다 호수에 빠져 죽은 나팔수와 그의 시신을 기다리는 복희의 모습은 2014년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떠올리게 만든다. 세월호 사고가 일어나기 전에는 큰 의미를 두지 않고 흘려들었던 복희의 대사들이 이제는 한 줄 한 줄 아픔으로 다가오는 새로운 경험을 하면서, 새삼 ‘이야기’의 힘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사람은 이야기를 만들고, 이야기는 사람을 만든다. 그리고 이야기는 시대와 사회를 반영하면서, 스스로 변하고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나간다. 9월 21일까지 남산예술센터.

<김주연 연극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