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이야기]그냥 조건 없이 매달 70만원을 받는다면?

4개 시민단체 공동 기획 ‘기본소득 시나리오 공모전’에 선정돼 70만원씩 기본소득을 받은 사람들이 기본소득을 어디에 어떻게 사용할지 상상을 현실로 옮기고 있다. 물론 한 번 지급되고 끝나는 일종의 이벤트에 가깝다. 그러나 이번 ‘실험’에 참가한 사람들에게 기본소득이란 단순한 상상 속의 일이 아니라 이미 다가온 현실에 가깝다.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미래의 어느날. 기초노령연금처럼 나이를 따지지도 않고, 기초생활비나 장애인연금처럼 소득과 자격을 따지지도 않은 채 한국 국민 모두에게 ‘기본소득’으로 일정액이 지급되기 시작한다면?

허황된 상상이 아니다. 기본소득이라는 구상이 현실과 만나는 계획을 구체적으로 고민하는 움직임이 벌어지고 있다.

경기도 파주에 사는 디자이너 한송이씨도 즐거운 상상에 기꺼이 뛰어들었다.

“어렵고 복잡한 이론이 아니잖아요. 그냥 누구에게나 똑같이 돈을 주자는 얘기, 단순한 만큼 찬성하든 반대하든 누구나 일단 따져보고 상상할 수 있으니까요.”

한씨가 받는 기본소득은 70만원. 한씨의 기본소득 활용계획은 소박하다. 일상적인 바람들을 어떻게 실현하면 좋을지에서부터 출발했다. 우선 함께 사는 고양이에게 유전자 조작 원료가 들어간 사료 대신 건강한 원료를 쓴 사료를 산다. 고양이를 키우는 동네 주민들과 만나고 함께 고양이를 돌보는 자리도 만들고 싶다. 70만원의 기본소득 중 5만원을 자신과 이웃의 고양이들을 위해 쓰기로 했다. 한씨에게는 나름 과감한 결정이다. 후원하고 싶은 곳이 생겨도 마음만으로만 하던 예전과는 달리 통 크게 지를 수 있다는 점도 기분 좋다. 마음만 보태지 않고 5만원씩 현금으로 기부하기로 마음먹었다.

9월 11일 기본소득 시나리오 공모전에 지원한 참가자들이 제출한 계획서와 실행방안을 발표하고 있다. | 녹색전환연구소 제공

“더부살이 아닌 ‘더불어 살기’가 돼요”
깨끗하고 품질은 좋지만 그만큼 비싸던 신선한 유기농 먹을거리들에도 더 욕심을 부릴 수 있게 됐다. 먹고 싶은 밥상을 차리는 데 20만원이 더 들어가지만 아까운 생각은 들지 않는다. “전에는 2~3주에 한 번 생협 물건을 주문할 수 있었는데 기본소득까지 더해지면 매주 주문할 수 있어요. 대형 유통업체랑 ‘더부살이’하는 대신 소비자로서 생산자와 ‘더불어’ 살 수 있는 점이 좋아요.” 한씨는 기본소득이 있으면 한쪽에만 부담이 늘어나는 ‘더부살이’ 대신 양쪽이 모두 공존할 수 있는 ‘더불어 살기’가 가능하다는 표현을 썼다. “기업주인 갑에게 더부살이하지 않고 갑과 을이 더불어 사는 것, 부모와 자식이 한쪽에 더부살이하지 않고 가족공동체로 더불어 사는 게 꿈이죠.”

한씨는 임금과 직장에 얽매인 노동에서 벗어나고 싶어 다소 소득이 불안정해지더라도 독립적인 작업을 이어가려 한다. 하지만 그런 한씨에게도 경제적 문제는 풀기 힘든 숙제다. 때문에 70만원 가운데 가장 큰 몫인 40만원을 ‘하기 싫은 작업은 맡지 않는 비용’으로 책정했다. 한씨 자신만을 위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저 하나 사는 거야 조금 적게 벌고 적게 쓰며 살아도 되는데, 은퇴해서 소득이 없는 부모님들과 함께 살면 또 그렇게 간단하게 결정할 수가 없잖아요.” 언젠가 부모님께도 똑같이 기본소득이 나오게 된다면 용돈을 드리고 받을 때마다 적잖이 눈치가 오고가는 지금의 모습도 달라질 것을 기대해 본다.

한씨의 기본소득 활용계획은 한신대 지역발전센터·녹색전환연구소·대화문화아카데미·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가 공동으로 개최한 기본소득 시나리오 공모전의 선정작 가운데 하나다. 선정된 팀에게는 70만원을 지급한다. 한 달 70만원으로 상정된 기본소득을 어디에 어떻게 사용할지에 관한 여러 갈래의 상상들을 현실로 옮겨보는 셈이다. 물론 모두에게 매달 기본소득이 지급되는 ‘미래의 상상’과는 달리 이번 사업은 기본소득으로 상정한 액수 70만원이 한 번 지급되고 끝날 뿐인 일종의 실험이다. 그러나 이번 ‘실험’에 임하는 참가팀들에게는 기본소득이란 만들어진 실험 속 상상이 아니라 이미 다가온 새로운 상식에 가까웠다.

부산지역 인디밴드 스카웨이커스와 팬들이 음악감상회 자리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 스카슬리퍼스 제공

돈벌이 아닌 하고 싶은 일 하니 무척 행복
전북 남원의 지리산 자락에 자리잡은 귀촌 공동체 산내에서는 시골답지 않게 젊은 청년들이 다양한 ‘작당’을 벌이고 있다. 10대 후반에서 20대까지의 청년 8명이 이번에 주목한 주제가 기본소득이다. 귀농 인구가 400명을 넘어 5명 중 한 명꼴인 산내면이지만 어디나 그렇듯 낭만적인 귀농의 이미지와는 달리 현실은 그리 녹록지만은 않다. 청년들은 막상 귀농을 선택했지만 경제사정 때문에 가까운 읍내로 돈 벌러 출퇴근하는 부모를 보며 자랐다. 20대에 들어선 청년들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자유롭게 살고 싶은 바람을 언제까지 끌어안아야 할지 고민이다. 기본소득의 상상은 결코 쉽지 않은 귀농 공동체의 현실에서 또 다른 색깔을 띠고 있다.

“고등학교 자퇴 후 자기 생활비는 알바를 해 벌면서 독립적으로 살았지만, 얼마 전 생활비를 벌기 위해 내키지 않는 회사에 면접 보고 온 경험은 별로였어요.” 선정팀 ‘작은자유’의 구성원들은 평소에 서로를 부르는 이름으로 신청서를 냈다. 올해 스무살이 된 청년 벼리는 생활비 때문에 내키지도 않는 회사에 가서 일해야 하는 현실이 갑갑하다. 벼리가 잘하고 좋아하는 일은 아이 돌보기다. 마을에서 어른들의 모임이 있을 때마다 아이들을 맡아서 돌보는 건 벼리 몫이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느낌을 받는 게 좋은데, 기본소득이 있으면 제가 좋아하고 잘하는 일에 몰입할 수 있을 거예요.”

벼리보다 두 살 많은 라온은 노래를 잘 부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노래로 먹고 살 생각은 그닥 크지 않다. “70만원의 기본소득만 있다면, 오디션 프로그램에 나가지 않을 거예요.” 얼마 전 오디션 프로그램에 참가한 적이 있는 라온이지만 답하는 내용은 의외였다. 설령 연예인이 되더라도 하기 싫은데 돈을 벌기 위해 해야만 하는 일들을 하는 것은 싫기 때문이다. 그에게 유명해지고 돈을 많이 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진정 행복하게 노래를 부르는 삶이다. “산내에서 노래를 만들고 부르는 일에만 몰두하면서 살면 더 행복할 것 같아요.”

청년들은 이번 기본소득 실험을 계기로 다양한 도전을 시작해보려 한다. 재봉틀로 헌 옷을 리폼하는 법을 배우고 싶던 스물두 살 청년 이내는 기본소득으로 중고 옷 리폼 작업을 배워볼 생각이다. 대안학교를 졸업하고 환경단체에서 일한 적도 있는 이내는 요즘 마을의 리폼모임에 나가면서 그 매력에 빠졌다. 옷뿐 아니라 각종 책과 생활용품을 리폼해 팔기도 한다. 스물세 살 느꽁 역시 꼭 필요하지만 큰 돈을 벌기 힘든 자신의 재능을 기본소득이 보충해주길 바란다. 전문대에서 허브 관련 전공을 한 느꽁은 시골에서는 접하기 힘든 원예심리치료와 같은 새로운 사업에 도전하고 싶다. 전통공예도 배워 손재주가 있지만 정작 살고 싶은 시골에서는 돈이 되지 않는다. 문화적 혜택에선 멀리 떨어진 마을에 도움을 주고 싶은 시골 청년들에게 기본소득은 단순한 상상이 아닌 현실적 요청이다.

8월 21일 기본소득청소년네트워크 회원들이 기본소득 세계기구인 BIEN 총회 참석내용을 공유하는 회의를 열고 있다. | 기본소득청소년네트워크 제공

가수도 팬도 여유, 맘껏 부르고 맘껏 응원
기본소득은 청년 각자의 꿈을 위해서만 쓰이는 것이 아니라 늘 해오던 공동체 활동에도 쓰인다. 대안 언어인 에스페란토 배우기, 요리해서 나눠 먹기, 여름밤 영화 상영회 같은 소박한 공동체 활동은 마을사람들에게도 열려 있다. 청년들은 기본소득에 관한 상상보다도 그저 지금의 삶과 마을 공동체를 이어가는 것을 꿈꾸는 상상이 더 어려운 현실을 고백했다. “사실 여기는 자신이 원해서 귀농귀촌한 분들이 많으니 나중에 기본소득이 도입되더라도 새벽에 논밭에 나가는 일상은 크게 변하지 않겠죠. 하지만 더 농사를 짓고 싶어도 돈이 없어 땅을 못 사고, 다른 도시에서 임금노동을 하러 어쩔 수 없이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는 지금보다는 도란도란 모여 살면서 마을에 활기가 돌 건 분명해요.”

예술인은 누구보다도 기본소득을 꿈꾸는 집단 중 하나다. ‘배고픈 예술’은 당사자인 예술가 본인뿐만 아니라 그를 지켜보는 몇 안 되는 팬들도 안타깝긴 마찬가지다. 하지만 안타까워만 하지 않고 적극적인 ‘팬질’에 나서는 팬들도 있다. 8명의 밴드원으로 구성된 부산 장전동의 인디밴드 스카웨이커스, 그리고 처음엔 밴드 멤버 수보다도 더 적은 수의 서포터들로 시작했던 팬 모인 스카슬리퍼스는 기본소득만 도입되면 전 세계 음반·음원 차트를 장악할 기세다.

밴드 스카웨이커스의 팬 모임인 스카슬리퍼스가 만든 기본소득 활용 시나리오는 다소 황당하면서도 묘하게 현실적이다. 스카웨이커스의 리더 ‘광팔이’가 기본소득에 힘입어 그간 출강하던 악기교습 학원을 때려치우면서 변화는 시작된다. 어느덧 나이는 먹을 만큼 먹은 서른하나, 그나마 얼굴 알리기 좋은 서울의 홍대 대신 부산지역을 지키며 음악활동을 이어가는 광팔이의 모습은 현실 그대로다. 본업인 드럼 연습 대신 젬베나 우쿨렐레 교습에 시간을 쏟아야 했던 탓에 연습에도 공부에도 연애에도 여유를 부릴 수 없던 광팔이였다. ‘삼포세대’의 전형이었던 예술인 광팔이는 기본소득으로 생활에 여유가 생기면서 음악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성장하기 시작한다. 비단 리더 광팔이만이 아니라 스카웨이커스 밴드 멤버 8명 모두 기본소득 덕택에 보다 윤택한 음악활동이 가능해졌다.

찬반 갈리겠지만 상상만으로도 즐거워
팬들도 기본소득이 들어와 넉넉해진 주머니 사정 덕에 내친 김에 돈을 모아 밴드의 해외 길거리 공연 투어를 지원한다. 영국의 세계적인 록 페스티벌에 진출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유럽 전역을 돌아다닐 계획이다. 앨범 제작비도 팬들이 기본소득을 쪼개 모은 돈으로 지원받는다. 각종 공연과 음반 발매로 밴드가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면서 팬들은 더 늘어나고 팬들로부터의 지원액수 역시 늘어난다. 기본소득으로 문화생활을 향유하는 데 여유가 생긴 사람들은 인디밴드의 음반을 사서 듣는 데도 인색하지 않게 됐다. 기본소득이 유발한 문화예술계의 선순환이 시작된 것이다. 게다가 이 선순환은 한국 안에서만 그치지 않는다. 세계적인 밴드가 된 스카웨이커스가 전 세계에 기본소득을 알리는 전도사 역할을 맡으며 기본소득이 세계 각국의 실정에 맞게 도입된다.

“하기 싫은 일 대신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자유.” 팬 모임인 스카슬리퍼스의 김혜린씨는 기본소득이 무모한 상상일 수도 있지만 현실의 강력한 요구를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강조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는 데서 꽉 막힌 현실의 변화가 시작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매월 월세, 식비 등을 해결하려고 할 수 있는 일이라면 해야 했던 현실이 기본소득이 생긴 뒤에는 하고 싶은 일과 할 수 있는 일을 구분할 수 있게 되겠죠. 내가 나를 돌아보고 내가 옆의 사람을 한 번 더 바라볼 수 있는 그런 삶의 여유가 생길 거란 뜻이에요.” 삶의 여유는 예술인만이 아니라 예술인들이 만든 예술을 향유하는 팬들에게도 똑같이 찾아온다는 것이다. 더 활발하게 활동하는 예술인들 덕에 더 많은 예술활동에 접할 수 있다는 논리다. “멤버들의 다양한 활동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가장 가까운 방도가 기본소득이라 여기고 있어요.” 상상과 현실을 오가는 시나리오지만 설득력을 잃지 않는 것은 팬들 모두가 기본소득 도입에 함께 공감하고 적극적으로 나선 때문이다.

각 팀에게 지원되는 70만원은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용처는 제각각이다. 한송이씨처럼 일상적인 경제활동에 쓸 수도 있고, 산내마을의 ‘작은자유’ 청년들처럼 각자의 진로와 공동체 사업에 함께 활용할 수도 있다. 기본소득이 잘 알려지지 않은 현실에 초점을 맞춰 지원액을 사용하는 계획도 있다. 대구의 녹색평론 읽기 모임은 이번 공모사업에 선정돼 지원받는 70만원을 활용해 기본소득 개념을 시민들에게 알리겠다고 나섰다. 모임의 대표인 주부 양숙영씨는 “올해 들어 이미 두 차례 기본소득을 알리는 길거리 홍보활동을 폈고, 지원액과 기금을 바탕으로 시민들에게 안내책자를 보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스위스에서는 기본소득 도입을 놓고 국민투표가 있었어요. 당시 나온 액수가 2500스위스프랑, 환산하면 약 300만원 정도였어요. 한국의 물가수준과 구매력 등을 고려해서 이번에 70만원으로 책정한 겁니다.” 사업을 진행한 김수진 연구원은 70만원을 ‘그렇게 많지도 적지도 않아 시민들이 받아들이기 편할 액수’로 표현했다. “물론 시민들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은 상태에서 액수는 중요하지 않지만 ‘70만원’이라는 구체적인 액수를 통해 누구나 ‘70만원이 생기면 뭘 할까’라는 행복한 상상을 해봤으면 좋겠어요.” 70만원의 기본소득, 아직 먼 미래일 수도 있고, 글을 읽는 독자는 찬성할 수도, 반대할 수도 있다. 김 연구원이 말했다. “그래도 미래는 상상과 함께 시작되잖아요.”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