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미의 공감 스토리텔링]백영기ㆍ백가흠 부자의 문학인생 이야기… 문학을 사랑한 아버지, 그 꿈을 이뤄가는 아들

아버지의 책을 읽고 아버지의 노래를 들으며 자란 아들. 그 아들이 등단한 날 아버지는 방문을 잠그고 혼자 울었다. 소설가를 꿈꾸던 아버지가 소설가 아들에게 편지를 쓴다. “혼탁하고 분노로 가득한 세상에 빛을 발하는 작가, 생명을 존귀하게 여기는 정직하고 바른 작가가 되었으면 한다.”

백가흠. 그의 소설에는 짐승의 소리로 만공산을 쩌렁쩌렁 울리며 우는 여자가, 죽음 이후에도 고통에 시달려야 하는 망자가, 욕망이 쇠한 늙은이가, 성 노리개로 사육당하다 목매달아 죽고 마는 베트남 소녀가, ‘나 좀 안아주라’ 부탁하는 한쪽 가슴이 잘려나간 늙은 여자가 있다. 그들은 울고 있다.

숨죽인 백가흠이 다가앉아 그들의 이야기를 받아 적는다. 예민한 감수성으로, 그러나 울거나 화를 내거나 연민에 빠지지도 않고 삶의 밑바닥을 담담하게 응시한다. 인간의 본성과 의미, 사회구조의 모순, 나아가 삶과 죽음, 윤회와 구원의 문제에 대해서도 질문한다. ‘우리가 은폐해 온 진실은 무엇인가?’ 쾌락을 추구하는 인간들의 원초적인 폭력성에 대해 집요하게 탐색하며, 삶과 죽음, 선과 악, 사랑과 증오의 모든 경계를 허문다.

그런데 이상하다. 그는 담담하게 썼는데, 읽는 우리는 슬프고, 그가 안아준 적 없는 인물들을 가서 안아주고 싶다. 작가가 불행한 유년기를 거쳤거나 위독한 사랑을 오래 앓았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의 소설집 <힌트는 도련님>, <나프탈렌>, <향> 등을 읽으면서 ‘나 좀 안아주라’며 눈물 글썽이는 인간들의 신음소리가 모두 들려서 괴로운, 그래서 받아 적을 수밖에 없는 따뜻한 인간일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고통스러운 삶의 밑바닥을 응시하며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글을 쓰는, 행동하는 작가 백가흠. | 백다흠 은행나무 편집자

소설가를 꿈꾸었던 아버지
페이스북에서 많은 예술가를 만나고 각계의 고수들도 만났다. 틈이 날 때마다 숨어 있는 문장들을 찾기 위해 유목민처럼 SNS 공간을 헤매는 재미에 빠졌었다. 그러다가 <죽음 곁에서>라는 글을 발견했다. 암 투병을 하고 있는 형을 찾아간 아우가 누워 있는 형 곁에서 지나간 시간들을 돌아보는 글이었다. 그 시간들이 영상처럼 형의 얼굴 위로 흘러간다. 유년 시절부터 그림자처럼 드리워졌던 죽음의 문제, 니체와 쇼펜하우어, 자살한 친구, 또 신에 대한 사유들은 병실의 어둠만큼이나 깊었다. 읽는 이에게 많은 질문을 던지는 글이었다. 전주에서 국어교사로 재직하다 퇴직한 백영기 선생의 글이었다. 배삼식 극작가와 남진우 평론가의 스승이며 소설가 백가흠의 아버지였다.

백가흠의 수필에서 아버지 얘기를 감동 깊게 읽은 기억이 되살아났다. 아버지와 아들의 문학인생 이야기를 쓰기로 했다.

소설가가 된 아들
아들이 등단한 날, 아버지는 방문을 잠그고 혼자 울었다

학교로 전화 드렸더니 덤덤하셨어요. ‘아버지 저 신춘문예 당선됐어요’ 했더니 ‘축하한다. 고생했다’ 하고 별말 없이 끊으셨어요. 한 시간 후에 다시 학교로 전화를 했는데 교무실에 커피를 돌리고 조퇴하셨다는 거예요. 집에 전화하니 어머니께서 ‘야… 아버지 방 문 잠그고 오후 내내 운다…’ 하셨어요.

아버지는 제가 신문이나 잡지에 기고한 소설이나 기사를 스크랩해 놓으세요. 아버지는 제 소설의 첫 독자는 아니어도 가장 마지막 독자이실 거예요. 아버지가 저에게 보내는 것 같은 응원이 있다면 누구나 작가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버지의 책 속에서 자라다
아버지 덕분에 우리는 책에 파묻혀 자랐어요. 집안의 모든 벽을 책이 차지했어요. 다락방에 올라가면 손도 못 대게 하시는 박스가 몇 개 있었는데 아버지가 쓴 편지가 가득 들어 있었어요. 집 전체가 온통 읽을 거리였어요. 집에 책이 많으니까 형제들은 자연히 책을 많이 읽으며 자라났죠. 낮은 곳엔 동화책이 있었고 가장 높은 칸에는 야한 소설들이 있었는데, 고등학생 때 맨 위칸 왼쪽에서 시작해서 오른쪽 끝까지… 모조리 다 읽었죠. 밤에 책 두 권을 뽑아서 책가방에 넣고, 다음날 학교에서 온종일 다 읽었어요. 공부는 아예 안하고 학교도 많이 빠졌어요. 일찍 집을 나와서 바닷가도 가고… 기타 치고, 피아노 치고, 그림 그리고….

문학과 클래식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아버지에게서 수혈받은 셈이죠. 큰아버지가 바이올린을 전공하시고 고모는 피아노를 전공하셨어요. 동생 다흠이와 저는 아버지의 책을 읽고, 아버지 노래를 들으며 자랐어요. 친구처럼 특별한 아버지셨죠. 나는 우리 아버지처럼 좋은 아버지가 될 자신이 정말 없어요.

불행한 분이기도 해요.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하시고 아마도 쉰 살까지는 끊임없이 글을 쓰셨던 것 같아요.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집에 찬 공기가 돌았어요. 아버지는 늘 혼자 계시고 한밤중에도 스탠드를 켜고 책상에 앉아 계셨는데, 설명할 수 없는 비애감이 집안을 맴돌았어요.

소설가를 꿈 꾼 백가흠의 아버지 백영기씨. 그는 배삼식 극작가와 남진우 평론가의 스승이기도 하다.

아버지의 문인 친구들
아버지 친구들 작품 얘기하면 늘 좋아하셨어요. 아버지가 가장 사랑했던 친구는 이광웅 시인이에요. 월북 작가의 시집을 돌려봤다는 이유로 군산 제일고 교사 9명이 구속되었던 ‘오송회 사건’으로 40대의 절반을 옥에서 보낸 분이죠. 큰아버지가 늘 아버지를 데리고 다니셔서 정양 시인, 윤흥길 선생님과도 친구가 되셨죠. 정양 시인이 제가 등단했을 때 용돈을 주시면서 그랬어요. ‘가흠아, 영기처럼 너무 착하면 글쓰기 힘들다….’

‘가흠아, 문예창작과 가라.’ 아들이 작가가 되길 바란 아버지
저는 이과였어요, 제어계측공학과. 전기공학과에 지원했다가 떨어져서 재수했어요. 사실 제어계측공학과는 보일러 설계하는 곳인 줄 알았어요.(웃음) 책만 읽었지 공부는 통 안했으니까…. 삼수를 하고 싶었는데, 어느 날 아침 아버지가 잠자는 제 머리를 쓰다듬으시며 조심스레 말을 꺼내셨어요. ‘가흠아, 문창과 가라.’

입학하고도 철거민들과 함께 철거싸움 하러 다니고, 공부에는 관심 없었어요. 제대를 하고나서야 작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문학이나 소설과는 상관없는 욕심이었어요. 문학이 가진 근원적인 질문 같은 것이 제게는 없었죠. 문장이라든가 플롯, 문창과 훈련으로 충분히 할 수 있는 정도의 테크닉만 있었어요. 데뷔하고 싶어서 열심히 썼는데 계속 떨어졌어요. 왜 떨어지나… 이유를 알고 싶었어요. 그래서 좋은 작품들을 읽으며 열심히 연구했죠. 스물여섯 겨울에 갑자기 깨달았어요. 내 소설엔 진심이 없구나… 진심을 담아보자. 1년 동안 11편을 썼어요. 진심이 담긴 소설 하나를 쓰는 게 목적이었어요. 그때 <구두>와 <광어>를 썼어요.

등단작 <광어>는 아가미가 펄떡거리듯 살아 숨 쉬는 문체와 예민한 감수성이 돋보이는 수작입니다. 횟집에서 일한 적이 있지 않나요?
2학년 2학기 때, 춘천에 여행을 갔는데 정말 좋았어요. 바로 12만원짜리 방을 얻고 눌러 앉았어요. 그 학기에 학점이 0.53 나왔죠.(웃음) 처음엔 낡은 여관에 취직을 해서 하루 12시간 일했는데 피폐해지는 것 같아서 한 달 일하고 그만뒀어요. 100평짜리 횟집에 청소부로 다시 들어갔는데 청소도 하고, 카운터도 보고, 회 뜨는 것도 배워서 초밥도 만들고…. 나중엔 거의 운영을 맡았어요.(웃음) 직원도 뽑고, 월급도 주고, 장도 보고…. <광어>는 원래 긴 시였는데 소설로 다시 썼어요. <광어> 속 인물들은 모두 그 횟집에서 만났죠.

별명 ‘백 반장’, 일을 기획하고 실행하는 능력이 있는 사람, ‘작가행동 1219’를 주도한 사람, ‘강정평화 책 마을’ 작업반장…. 행동하는 젊은 작가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저는 제안을 한 거구요. 신용목, 김민정 두 친구와 집 앞에서 술 마시고 놀다가 잘 놀아보자고 한 일이에요. 작아도 우리가 뭔가를 해보자…. 기조는 용목이가 세우고, 행동 프레임은 제가 짜고, 민정이는 문인들에게 신망이 있는 시인이니까 사람을 모을 수 있었어요. 좋은 친구들을 옆에 두고 지내면 훌륭한 일에도 끼게 되고 그런 것 같습니다. 쌍용자동차 북 콘서트부터 열었어요. 강정도 그중 하나였어요. 환경은 우리의 미래니까 문학인들 모두 관심이 많았죠. 지금은 숨을 고르는 중입니다. 강정 책마을은 잠깐 하는 게 아니니까요.

고통스러운 삶의 밑바닥을 응시하며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글을 쓰는 작가 백가흠의 삶은 무척 고단할 것 같습니다.
아주 어렸을 때인데 거지가 동냥을 왔는데, 엄마가 마당에 밥상을 차려주고 그 사람이 들고 다니던 깡통을 수세미로 박박 씻어주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 마음만 있으면 문학하고 멀지 않을 거란 생각이 막연하나마 전부예요…. 소설가는 창조자가 아니고 관찰자예요. 제가 그 인물을 보고 있어요. 소설 속 인물들이 괴롭히기도 해요. <배꽃이 지고>가 그래요. 마음이 아려요. 쓸 때는 평정심 유지하기 힘들어서 술도 많이 먹었어요. 영상이 막 앞서 가요. 의도하지 않아도 공간 안의 캐릭터들이 저절로 움직이고 나는 그들을 들여다보죠.

동생 백다흠씨와 함께 <문인보> 작업을 하시던데요. 백가흠에게 사진작가이자 편집자인 백다흠은 어떤 존재인가요?
다흠은 문창과 후배이기도 해요. 학교 다닐 때 저보다 훨씬 글을 잘 썼어요. 저랑 많이 다른 동생이지요. 감각이 부러울 때가 많아요. 15년째 같이 살고 있는데, 얼른 둘이 헤어지고 각자 삶을 살아야지요. 부모님이 너무 걱정이 많으세요. 불효자들입니다.

최근에 장편 <마담 뺑덕>을 탈고하셨어요. 심청전을 모티브로 영화는 영화대로, 소설은 소설대로 과정은 공유하지 않고 각자 작업을 해서 영화와 책이 동시에 세상에 나왔다고요. 앞으로 어떤 소설을 쓰고 싶나요?
소설 속 인물들이 제발 좀 잘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소설 속 인물 대부분은 사회에서 밀려나고 소외되고 한계에 부딪힌 사람들이라 사회의 관심과 손길이 없으면 생존하기 힘든 사람들이지요. 그들이 실제로도 잘 살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소설이나 문학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일이지요. 법과 시스템의 문제니까요. 문학은 인물의 이야기를 통해 질문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앞으로 쓰고 싶은 소설은 그저 제가 해왔던 질문 안에서 성실하고 싶습니다.

소설가의 아버지

백가흠 작가는 어떤 아들인가요?
가흠이는 세 살 때 ‘상향식말초신경염’이라는 희귀병에 걸렸습니다. 다리부터 허리, 팔, 목으로 올라가면서 마비가 오는 질병이었어요. 신문지 한 장도 쥐지 못했고 목조차 가누지 못했죠. 성대까지 마비되어 기침소리도 내지 못했죠. 치사율 50%라는 무서운 병이었어요. 실제로 가흠이가 입원하고 있었던 전주 예수병원에 같은 병을 앓고 있는 한 아이가 있었는데 죽어 나갔고, 가흠이는 기적적으로 완쾌됐어요. 당시 의학으로는 치료방법이 없다는 무서운 병이어서 가흠이 외할머니와 매일 꿇어 엎드려 하나님께 가흠이를 살려달라고 애원했습니다. 가흠이가 점점 회복되어 일곱 발짝을 걸었다는 전화를 받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신통하게도 역순으로 위에서부터 아래로 회복되어 갔습니다. 6개월이 지나서야 정상아처럼 걸을 수 있었습니다. 나는 그 뒤 ‘가흠아, 넌 건강하게만 자라다오’ 하고 부탁했습니다. 그래서 가흠이는 어려서부터 공부에서 해방됐나 봐요. 난 가흠이에게 지금까지 공부하라는 말을 한 번도 해보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는 내가 등단한 날, 단 한 번 나를 자랑스러워했을 것이다’ 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가흠이가 신춘문예에 등단한 날은 내 생애 최고로 기쁜 날이었습니다. 며칠 동안 만나는 친구들마다 밥을 사줬어요. 어찌 그날만 자랑스러웠겠어요…. 중3 때 국어선생님이었던 시인 안도현 선생이 전교조 파동으로 해임되어 단식농성에 들어갔을 때 중3 학생들이 도시락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선생님이 단식을 하시는데 우리들만 밥을 먹을 수 없다 하여 모두 단식을 했죠. 그 일을 계획한 것이 가흠이가 주동이 된 반장들이었어요. 애들 생각이 얼마나 기특하고 자랑스럽습니까? 우리 부부에게 가흠이는 항상 소중하고 자랑스러운 아이였어요.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
아들 가흠아.

그간 잘 지냈지? 지난 추석 때 <변산바람꽃>에서 너와 하룻밤을 지낸 뒤 네 어머니는 기쁨보다는 ‘끼니를 거르지는 않나, 누룽지로 대충 때우고 있지는 않은지’ 걱정이 태산이다. 네가 작가가 된 것이 내 잘못이라 생각하는 모양이다. 이웃집 아들들처럼 그냥 평범하게 부모 곁에 살게 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투정이 심하다.

나는 너를 문예창작과에 보낸 걸 후회한 적이 있다. 그 끝도 없이 고달프기 이를 데 없는 길이었기에. 그러나 아마도 내 마음속 어디엔가 이루지 못한 문학에 대한 아쉬움이 남아 있었나 보다. 나는 네가 밤잠을 자지도 못하고 잘 먹지도 못하며 고생하는 거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옆에 늘 걱정하고 있는 네 어머니를 보면 더욱 마음이 편치 않다. 차라리 내가 밤잠 안 자고 글을 쓰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저렇게 열심히 쓰면 정말 좋은 작품이 나올 것이라는 기대감에 마음이 들뜨곤 한다. 이왕 들어선 길, 인생을 인내하고 절제하며 작품에 대한 욕망을 불태워 보아라. 이것이 아버지의 작은 바람이다. 인간이 욕망이 없으면 희망이 없는 것이다. 희망이 없는 인간은 거세된 인간 아니겠어. 내가 너를 서울로 보낼 때 나처럼 짐 싸들고 고향으로 내려오지 말라고 했던 말 기억나니? ‘一葉蔽目不見泰山’(잎사귀 하나가 눈을 가리면 태산도 보지 못한다)이라는 말이 있다. 작은 나뭇잎 하나가 네 눈을 가리지는 않았는지? 항상 높은 곳에서 넓고 멀리 세상을 바라보아라. 그리고 혼탁하고 분노로 가득한 세상에 빛을 발하는 작가, 생명을 존귀하게 여기는 정직하고 바른 작가가 되었으면 한다.

나는 처음 소설집이 나올 무렵에 보여주었던 놀라울 정도로 예민한 너의 감수성을 존중한다. 그리고 끔찍한 이야기를 다루는데 삭막하지 않은 네 문장이 마음에 들어 좋았다. 문장에 긴장을 풀면 안 되는 거 아닌가. 난 네가 소설을 쓴다고 했을 때 될 수 있으면 사람을 죽이지 말라고 충고한 적이 있다. 그런데 네 소설에는 깜짝깜짝 놀랄 만한 비정한 인간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구나. 물론 이 아버지는 어떤 형태라도 폭력이 없는 사회를 염원한다. 그렇지만 네 소설에 가슴 따뜻한 사람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루마니아의 ‘범브란트’ 목사와 같은 예수님 닮은 사람이 더러 나왔으면 한다. 궁극적으로는 사회문제를 넘어 인간 영혼의 문제를 고민해야 할 거라 생각한다.

지난주에는 너의 큰아버지께서 머무르고 있는 강원도 오대산 계곡을 다녀왔다. 도시에서 병으로 시달리는 사람들은 이곳에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계곡을 흐르는 깨끗한 물과 맑은 공기와 울창한 잣나무들에서 풍겨 나오는 향기로 인해 저절로 병이 나을 것 같은 곳이다. 너의 큰아버지는 나를 보자마자 너의 근황을 물어 오셨다. 나는 ‘그 녀석은 아직도 결혼에 대한 간절함이 없는 것 같고, 이상한 소설을 만드느라 무척 바쁜가 봅니다’라고 대답했다. 네 큰아버지는 빙긋이 웃으시었다. 너를 믿는다는 표정이었다.

탈고가 되면 한 번 내려와. 가끔 보았으면 좋겠다. 너희들은 일 년에 한두 번 내려왔다가 곧 올라간다. 그것도 바빠 정신이 없다 한다. 내가 10년 더 살면 너희들을 열 번 보고 가고, 20년을 더 살면 스무 번 보고 간다. 나도 늙었나 보다. 자식들이 그리워지니…. 익산에서 아버지가.

박상미의 공감 스토리텔링

아버지가 아들에게 보내는 감동적인 편지를 받은 후 내가 쓴 마무리 글을 모두 지웠다. 문학을 사랑하는 아버지와 아버지의 꿈을 이루어가고 있는 아들. 그러나 아버지는 아직도 고독한 글쓰기 작업을 계속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박상미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