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윤수의 도시 이미지 읽기]시부야의 스펙터클한 밤

쉼 없이 명멸하는 전광판, 한순간 방심하면 어김없이 시신경을 관통하여 심장에까지 뜨거운 화인을 남겨버리는 광고 이미지들, 그 아래로 걸어가는 수천의 사람들. 시부야 밤거리는 현대 도시의 강렬한 스펙터클을 공부하려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현장 채집을 해볼 만한 거리다.

주마간산이라고 했던가. 달리는 말 위에 앉아 스쳐지나가는 풍경을 본다는 말이거니와, 이 지면을 통하여 관광객의 시선으로 특정한 사물이나 도시를 본다는 것은 대체로 위험한 예단에 이르기 쉽다고 여러 번 썼으되, 지금 이 순간 내가 그 위험한 시도를 하고 있다.

지난 주말에 도쿄에 다녀왔다. 3박 4일. 이 짧은 시간이라고 한다면 국내의 어엿한 대도시들, 이를테면 부산이나 광주 같은 곳을 다녀왔다 해도 부족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럼에도 언제고 한 번은 필경 보고 오리라 마음 먹었던 곳이고, 해외의 큰 도시들이 그렇듯이 장기 출장이나 마음 먹고 공부하러 떠나지 않는 다음에야 어딘들 일주일 안팎의 시간밖에 여유가 없는 것이고, 이는 도쿄라고 해서 다르지 않을 것이다. 훗날, 어떤 우연의 선물이 있어 도쿄에서 몇 개월이고 살게 될 날을 기약하며, 그래도 4일 동안 슬쩍슬쩍 훔쳐본 도쿄의 이미지들을, 이미 숱하게 그 도시를 다녀온 사람들이 이 지면을 건너뛸 것이라 기대하면서, 볼펜에 힘을 꽉 주고, 아니 키보드를 전문 피아니스트처럼 꾹꾹 눌러가며 기록해 본다.

시부야. 이 연재에 맞게 특히 시부야를 기록하고 싶다. 야스쿠니 신사, 극도로 예민한 정치·역사적 장소이건만 주말에 가보니 그 신사 입구에서 도쿄 시민들은 알뜰살뜰 물물교환 장터를 열고 있었다. 의외였다. 메이지신궁, 장엄한 숲과 근엄한 건축물 안에서 도쿄의 선남선녀가 혼례를 올리고 찾아온 하객들과 우연히 마주친 관광객들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천황이나 전범자들이나 우리에겐 예민한 존재들이건만, 그들에게는 당연하게도 일상이었다. 그래서 밤의 거리, 시부야를 기록한다.

10월 10일 일본 도쿄 시부야의 밤 풍경. | 정윤수

도쿄 거리 중에서 가장 강렬한 체험
얼핏 스쳐지나가며 본 인상으로 도쿄는 그 자체로 거대한 쇼핑몰이었다. 백화점의 행렬이었던 긴자, 화려한 밤 문화의 신주쿠, 다종다양이 운집한 롯본기, 인사동을 옮겨놓은 듯한 아사쿠사, 쇼핑을 위한 구조물의 연속이었던 오다이바, 그리고 시부야.

그 중에서도 시부야는, 적어도 며칠 완상하였던 나로서는 가장 강렬한 시각적 체험을 줬다. 밤 늦은 시각, 시부야의 밤거리는 현대도시의 강렬한 스펙터클을 공부하려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현장 채집을 해볼 만한 거리였다. 쉼없이 명멸하는 전광판, 한순간 방심하면 어김없이 시신경을 관통하여 그리하여 심장에까지 뜨거운 화인을 남겨버리는 광고 이미지들, 그 아래로 걸어가는 수백 수천의 사람들.

이를테면 이런 풍경이다. 도쿄 사람들의 질서의식은 세계적인 수준이다. 그 단면만 잘라서 서울에 이식하고 싶을 정도다. 우에노 방향 전철에서 옆 사람에게 방해될까봐 거의 첩보원 수준으로 낮게 속삭이다가 그마저도 스스로 불편하여 다음 역에 내리는 사람을 나는 보았다. 그 역이 그가 목적한 곳인지는 몰라도 급히 서두르는 행동을 짐작하건대 그는 마음놓고 통화하기 위하여 일단 내린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아무도 전철 안에서 큰소리로 통화하지 않기 때문이다. 남의 집 귀한 자식들에게 옷차림이 그게 뭐냐고 고함을 질러대는 서울의 교통문화에 비하여 도쿄 사람들의 극도로 예민한 질서의식은, 딱 그 단면만 잘라서 꼭 이식하고 싶은 풍경이다.

10월 11일 야스쿠니 신사 앞에 열린 장터의 모습. | 정윤수

정지 신호등에 동작을 멈추는 도시
그러나 그것이 ‘국민성’ 같은 것은 결코 아니다. 그들 나름의 현대사의 복잡한 진행과정에서 질서라는 반듯한 틀 안에서 함부로 뛰쳐나왔다가 가차없이 처단당한 기억들을 그들은 어떤 식으로든 내면화하고 있다. 1920년대의 민주주의 열풍, 그리고 1960년대의 반전평화운동 등이 산산이 파괴당하면서 그들은 국가와 굳은 맹약을 맺었다. 국가는 질서를 요구하였고 그들은 그것을 지켰다. 국가는 자신들이 요구한 것을 묵묵히 지킨 사람들을 철저히, 최고 수준으로 보호했다. 우리 같으면 촛불을 들고 광장에 나갈 만한 일도 그들은 국가의 목소리를 기다렸다. 그리고 그들의 국가는 그것에 응대했다. 그것이, 거친 요약이지만, 그들의 현대사다.

그래서, 시부야의 그 복잡한 거리가 일순간이나마 정지되는 것을 나는 두 번 세 번 보고 또 보았다. 사방에서 엄청난 차량이 몰려 온다. 예비 신호등이 켜진다. 그러면 일제히 멈춘다. 사람들은 100m 달리기 선수처럼 멈춰 있다. 순간, 파란 불이 켜진다. 그제야 수백 수천의 사람들이 저마다의 목적지를 향하여 거대한 교통 공간을 가로질러 건너기 시작한다. 대단한 광경이다.

그 위로 쇼핑과 위락의 천국 시부야의 수많은 빌딩에 설치된 거대한 스펙터클이 명멸한다. 게다가 음향까지 쏜다. 이 또한 도쿄가 초행인 나로서는 어리둥절한 풍경이다. 1980년대에 리들리 스콧 감독은 영화 <블레이드 러너>에서 묵시록적인 미래 도시를 묘사했다. 그 앞 장면에서 일본 전자회사의 전광판이 요염하게 웃음을 짓고 동시에 귓속에 파고드는 음향까지 퍼지게 한 적이 있는데, 시부야의 전광판들이 꼭 그러했다.

정윤수의 도시 이미지 읽기

오른쪽의 전광판에서는 신작 앨범 홍보영상이 번쩍거리는데 그 음악까지 광장으로 쏟아붓는다. 왼쪽의 전광판에서는 아슬아슬한 차림의 애니메이션이 번쩍거리는데 기이하게 들리는 야한 웃음이 시부야의 광장으로 쏟아져내린다. 맞은편의 전광판에서는 곧 개봉할 영화의 예고편이 상영되는데 역시 강렬한 효과음들이 도쿄의 밤하늘로 울려퍼진다. 나는 사방에서 진입해 오는 전광판의 불빛과 또 그 불빛에 동반하여 날아오는 극도로 날카로우면서도 에로틱한 음향들 앞에 서서, 시부야의 밤 거리를 지켜보았다. 다시, 신호등이 켜지고, 차량은 일제히 기계들처럼 멈췄으며, 곧 파란 신호등이 켜지자 수백 수천의 도쿄 시민들이 저마다의 탄착점을 향하여 재빨리 걸었다.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