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이야기]개헌이슈에 숟가락 얹어라… 잠룡들 계산된 플레이

미래권력 노리는 대권주자ㆍ지자체장들 존재감 알리는 데 ‘최고의 카드’… 여야 정치인 가릴 것 없이 한마디씩 ‘백가쟁명’

대통령제 국가에서 국정의 주도권은 항상 대통령이 쥐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와 같은 ‘제왕적 대통령제’ 국가에서는 더욱 그렇다. 이런 상황에서 청와대에서 국회로 국정의 주도권을 가져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있다. 바로 개헌 논의다.

미래권력을 노리고 있는 대선후보들에게 개헌은 가장 구미가 당기는 카드다. 헌법을 고치겠다고 주장하는 것 자체가 대통령을 흔드는 것이며, 최고통치자인 대통령과 맞서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국민과 언론의 주목을 한몸에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김영삼·김대중·박근혜’처럼 뚜렷하게 앞서가고 있는 대권주자가 없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지금은 김무성·김문수(새누리당), 박원순, 문재인, 안철수, 안희정(새정치민주연합) 등 고만고만한 후보들이 난립하고 있다.

우선 ‘박근혜 대통령 흔들기’는 여당의 대표 입에서부터 나왔다.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의 ‘개헌’ 발언 상황을 돌이켜보면 차기 대선주자로서 이미지 선점 효과의 극대화를 노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왼쪽)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가 10월 16일 중국 상하이 훙치아오 영빈관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3박4일간의 방중 결과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오른쪽)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의원이 9월 26일 국회에서 열린 비대위원 회의에서 청와대 인사문제를 비판하고 있다. | 연합뉴스

김 대표는 지난 10월 13일부터 3박4일 동안 중국을 방문했다. 사실상 대권 행보였다. 국감 중임에도 중국 방문을 결행한 것은 시진핑 국가주석과의 면담 때문이었다. 여당의 대선주자들은 대권 도전을 앞두고 중국의 최고지도자를 만났다. 이회창 신한국당 총재(1997년)도 그랬고,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2005년)도 그랬다.

김 대표의 수행단도 대통령급이었다. 현역의원만 해도 정갑윤(국회부의장)·이병석(전 국회부의장)·이재오·조원진·박인숙·박대출·이에리사 의원 등 11명이나 참여했다. 김 대표의 방중을 수행하겠다고 의사를 밝힌 의원들이 꽤 있었지만 여론을 의식해 규모를 줄인 것으로 알려졌다.

김무성, 대선주자 효과 극대화 노린 발언
여당 실세의 방중에 따라 언론사에서 42명의 기자들이 취재단으로 동행했다. 같은 기간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개최된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에 참석한 박근혜 대통령의 취재단(35개 언론사)과 비슷한 규모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김 대표는 또 메시지를 날렸다. 많은 기자들이 노트북을 앞에 놓고 그의 발언 하나하나를 타이핑하는 가운데 개헌문제를 정식으로 제기한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모든 이슈를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될 것이라며 개헌 논의에 제동을 건 지 얼마 안 돼 여당 대표가 정면으로 반박한 것은 정치권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김 대표는 하루 만에 “대통령에게 죄송하다”며 한발 물러섰다. 하지만 그의 진의가 개헌 쪽에 실려 있다는 사실은 명백해졌다.

청와대는 개헌 논의에 민감하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개헌이라는 블랙홀은 모든 이슈만 빨아들이는 게 아니다. 박 대통령의 기득권 역시 빨아들일 가능성이 크다.

그동안 대통령은 집권여당의 수장으로서 차기 대선후보를 사실상 낙점하고, 후보를 지원함으로써 존재감을 발휘해왔다. 하지만 개헌이 되면 박근혜 대통령은 미래권력을 창출하는 데 있어서 아무런 역할도 할 수 없다. 또 여권의 잠룡들도 굳이 박 대통령에게 잘 보일 필요가 없게 된다. 청와대 고위관계자가 김무성 대표의 취임 100일에 맞춰 “당대표가 실수로 (개헌 관련해) 언급했다고 보지 않는다”며 옐로카드를 꺼내든 데서도 청와대의 위기감이 드러난다.

개헌을 둘러싼 미래권력과 현재권력의 주도권 다툼에 새누리당 김태호 최고위원이 뛰어들면서 상황은 조금 더 복잡해졌다. 김 최고위원은 “지금은 경제활성화법에 매진해야 한다”면서 청와대의 주장에 동조하며 최고위원직을 돌연 사퇴했다.

평소 개헌 필요성을 강조했던 김 최고위원의 유턴에 대해서는 “뜬금없다”는 반응이 지배적이었다. 조폭영화의 한 대사처럼 “명분이 없다”는 것이다.

새누리당의 한 관계자는 “김태호 전 최고위원이 김무성 대표가 개헌 발언을 한 이후 청와대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는 틈을 노린 것 같다”며 “친박계의 뚜렷한 대선주자가 없는 만큼 김 최고위원이 박 대통령을 지원하는 듯한 행보를 보이는 것이 앞으로 대선정국에서 유리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 같다”고 말했다.

개헌 이슈는 야권 대권주자들에게도 뜨거운 감자다.

새정치민주연합 비상대책위 회의를 하루 앞둔 지난 10월 19일, 문재인 의원의 참모들은 비대위에서 문 의원이 내놓을 메시지를 준비하느라 바쁘게 움직였다. 문 의원과 참모들 사이에서는 박 대통령이 개헌 논의에 제동을 건 데 대해 강하게 비판을 해야 한다는 의견이 모아졌다.

문 의원은 ‘월권’, ‘독재’, ‘긴급조치’ 등의 단어를 동원해 박 대통령을 맹비난했다. 개헌을 둘러싼 힘겨루기에서 박 대통령과 대립하는 구도를 만드는 한편 야권의 대표주자로서의 위상을 확고히 하겠다는 의도를 감추지 않았다.

안철수 의원도 앞으로의 개헌 논의에 대비해 전문가들로부터 의견을 청취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적당한 시점에 개헌에 대한 입장을 밝힐 예정이다.

새정치연합에서는 내년 1∼2월 당대표 선거를 위한 전당대회에서 후보자들 간에 개헌의 내용과 범위를 놓고 치열한 논쟁을 벌일 것으로 예상된다.

야당 주자들도 발언 시점 저울질
새정치연합의 한 관계자는 “야당 입장에서는 국정 이슈를 청와대에서 국회로 뺏어오는 일이기 때문에 개헌에 반대할 이유가 없다”며 “당권과 대권에 도전하는 문재인 의원 등 중진들이 앞장서서 개헌 논의를 주도하려 할 것”이라고 말했다.

잠룡들이 몰려 있는 지자체장들도 개헌 발언을 잇따라 쏟아내고 있다. 남경필 경기지사는 “국회에서 내년부터 개헌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안희정 충남지사도 지방자치 실현을 위한 ‘분권형 헌법개정’을 강조하고 있다.

어쨌든 이들도 ‘개헌’이라는 대형 이슈에 한 발을 걸치고 나섰다. 향후 도래할 수도 있는 개헌정국에서 지분을 인정받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개헌 논의는 아직 ‘블랙홀’에까지 이르지는 않았다. 여당과 야당, 지방 잠룡들의 공세에도 청와대가 아직까지는 버틸 수 있는 힘이 있는 듯하다. 그러나 그 힘의 균형이 무너지는 순간, 블랙홀도 그 본색을 드러낼 것이다. 그때가 오면 정말 모든 것을 빨아들일지도 모른다.

<권순철 기자 ikee@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