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이야기]권력구조 개편보다 선거제 개혁부터

지역 중심 거대 양당제에선 내각제든 분권형 대통령제든 제1당 독주 뻔해…

개헌은 충분한 국민적 논의 필요

최근 개헌론이 다시 뜨겁게 일고 있다. 사실 ‘87년 민주화’ 이후 우리 사회에서는 단 한 해도 거르지 않고 권력구조 개편에 대한 공방이 줄기차게 이어져 왔다. 그 결과 현재로서는 사회 구성원들의 대다수가 여와 야, 보수와 진보, 정치권과 시민사회의 구분 없이 현행 대통령제의 개혁 필요성에 대해 공감하고 있다. 다만 구체적인 개헌안과 개헌 조건에 대해서는 다양한 선호와 견해가 부딪히고 있다. 관련하여, 핵심 사항 몇 가지를 짚어보며 개헌 신중론을 펼쳐보고자 한다.

지난 2012년 11월 8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분권형 개헌과 시대정신 토론회’에서 김용태 새누리당 의원이 기조발제를 하고 있다. | 서성일 기자

분권형도 대통령ㆍ총리 권력배분 쉽잖아
우선 순수 의원내각제의 도입은 실현되기 어렵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두 가지 이유만 언급하자면, 그 첫째는 한국과 같이 왕이 없는 나라가 의원내각제를 도입할 경우, 모든 국민을 대표하는 초당파적 국가원수의 부재로 인해 국가나 사회통합의 안정적인 구심점 확보가 어려울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이것이 아마도 입헌군주국이 아닌 유럽 공화국들의 대다수가 의원내각제 대신 분권형 대통령제를 택한 까닭일 것이다. 우리가 만약 의원내각제를 택하면서 이 난점을 해결하고자 한다면 독일이 그러하듯 상징적 국가원수로서의 대통령을 따로 두어야 할 것이다. 두 번째는 우리 시민들은 87년 민주화 운동의 ‘쟁취물’인 직선 대통령제를 쉽게 포기하지 않으리라는 점 때문이다. 다수의 시민들은 대통령 직선제를 한국 민주화의 징표로 여기고 그에 대한 애정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각종 여론조사 결과를 보더라도 시민 대다수는 제왕적 대통령제의 개혁 필요성은 인정하면서도 의원내각제의 전면 도입보다는 대통령 직선제를 유지하면서 권력의 집중이나 남용 문제를 해결하는 수준에서 방도를 찾아보자는 견해를 보이고 있다.

이 같은 현실을 감안할 때, 권력구조를 개편한다면 그 지향점은 의원내각제보다는 분권형 대통령제가 돼야 하리라고 여겨진다. 일단 분권형 대통령제는 의원내각제와 달리 상당한 실권을 가진 대통령을 지금과 같이 국민이 직접 뽑는 권력구조이므로 그 도입과정에서의 국민적 반대는 비교적 크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국민의 힘으로 이루어낸 대통령 직선제는 그대로 유지하되 단지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를 없애고 민의 반영에 뛰어난 합의제적 민주체제를 발전시켜가기 위해 대통령의 권한을 분산하는 방향으로의 개혁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펼칠 경우 국민들은 그것을 충분히 납득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분권형 대통령제로의 전환 역시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무엇보다 대통령과 총리 사이의 권력 배분의 어려움 때문이다. 흔히 외교·안보·국방 등의 정책 영역은 대통령이 맡고, 사회나 경제 등 국내 정책 영역은 총리가 맡는다고 하지만 그 영역 구분이 결코 쉬운 게 아니다. 예컨대, 대외 통상과 금융거래는 물론 세계화와 지역통합, 그리고 FTA 등과 관련된 대외 경제정책은 형식상은 외교정책이라 할지라도 국내 정치·경제에 끼치는 효과가 막대함을 고려할 때 사실상은 국내 정책과 다를 바 없다. 결국 대통령과 총리 간에 정책 영역의 분담 및 권력 배분 문제를 놓고 (제도 성숙에 이르기까지는) 끊임없이 갈등과 대립 상황이 벌어질 소지가 크다는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설령 본격적인 개헌 논의 국면에 들어갈지라도 결코 서둘러선 안 된다. 직선 대통령을 상징적 국가원수로 두고 의원내각제를 전격 도입하는 것이 좋을지, 아니면 분권형 대통령제가 좋을지, 만약 분권형 대통령제로 간다면 대통령과 총리 간에는 어떻게 권력을 나눌지 등은 특정 정치가나 학자 혹은 다른 어떤 사회적 엘리트 집단이 해결할 수도 없고 해결하려고 해서도 안될 문제이다. 그것은 반드시 국민적 공감대의 형성을 전제로 풀어야 할 중차대한 문제이다. 개헌을 위한 광범위한 공론장(公論場)을 개설하여 그 장에서 충분한 공론의 검토를 거쳐 구체적인 권력구조 개편안이 도출되도록 해야 한다. 새 권력구조의 창출과 한국형 합의제 민주주의의 구축은 그렇게 느리지만 지속적인 노력으로 도출해낸 사회적 합의에 기초할 때에만 그 이후에도 지속 가능할 수 있다.

독일식 비례대표제 등 법률개정으로 가능
권력구조의 개편에 신중해야 할 또 다른 중요한 이유는 그것은 자칫 개악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지역주의가 여전히 (실재적 혹은 잠재적) 유력 변수로 남아 있는 한국의 현 선거정치 환경에서 의원내각제나 (분권형 대통령제에서의) 책임총리제 도입은 지역과 인물 중심의 다당제 형성을 촉진할 가능성이 크다. 군소 지역정당(들)일지라도 지역 지지기반을 잘 관리하여 필요 최소한의 의원 수만 확보할 수 있다면 연립내각에 직접 참여하거나 그 형성 과정에 유의미한 영향력을 미침으로써 상당한 정치권력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경우 한국 정치의 고질병인 지역할거주의는 더욱 기승을 부리게 될 것이며, 권력구조는 결국 지역정당들 혹은 그 보스들 간의 ‘과두체제’로 개악되는 꼴이 된다.

한편, 지금의 지역 중심 거대 양당제가 지속될 경우엔 의원내각제에서는 물론 분권형 대통령제에서도 실질적으로는 현행 대통령제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제1당(과 심지어는 그 1인자)에 의한 승자독식 현상이 유지될 가능성이 높다. 영국의 예가 보여주듯, 양당제와 의원내각제의 결합은 여당(혹은 여당의 1인자인 총리) 독주의 다수제 민주주의로 귀결되곤 한다. 어차피 행정부는 양대 정당 중 의회의 다수당이 된 어느 한 정당에 의해 단독으로 구성되고, 그 정당의 우두머리인 총리는 행정부는 물론 입법부까지 장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칫하면 제왕적 대통령제를 ‘제왕적 총리제’로 대체할 뿐인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양당체제에서의 분권형 대통령제에서도 여소야대 상황에서 동거정부를 형성한 경우 외에는 여당이 대통령과 내각을 독점하는 다수제 정치가 통상적이게 마련이다. 양당제가 유지되는 한 의원내각제나 분권형 대통령제로의 권력구조의 개편은 합의제 민주주의의 발전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적 상황에서 합의제 민주주의의 발전을 도모코자 한다면 권력구조의 개편보다는 선거제도의 개혁에 우선 힘써야 한다. 정당 득표율과 의석 배분 간의 비례성이 충분히 보장되는 독일식 비례대표제 등의 도입은 이념과 정책 중심의 온건 다당제를 견인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선(先) 선거제도 개혁, 후(後) 권력구조 전환’의 원칙에 따라 합의제 민주주의를 위한 제도개혁 작업을 수행해가야 한다는 것이다. 더구나 권력구조의 개편은 개헌을 요구하는 지난한 과제이지만 선거제도의 개혁은 법률 개정만으로 이룰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사회적 공감대가 충분히 형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개헌을 무리하게 시도하기보다는 당장은 선거제도의 개혁에 에너지를 집중하는 것이 현실적으로도 타당한 전략이라 할 수 있다.

<최태욱 한림국제대학원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