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치스크린]피아노-20년 만에 다시 온 ‘당대의 고전’

(주)풍경소리

제목 피아노(piano)

제작연도 1993년

감독 제인 캠피온

출연 에이다Ι홀리 헌터, 베인스Ι하비 케이틀, 스튜어트Ι샘 닐, 플로라Ι안나 파킨

등급 청소년관람불가

개봉 2014년 12월 4일 예정

영화 <피아노>를 본 지도 20년이 되었다. 시사회장에 들어가기 전, 기억에 남아 있던 장면은 고요한 바닷속에 피아노에 발이 묶여 둥둥 떠 있는 홀리 헌터의 모습이었다. 그게 엔딩이었다고 생각했다. 영화를 보다 보니 잊어버렸던 그 후 이야기-진짜 엔딩이자 후일담-가 생생하게 떠올랐다.

세월이 흐르면서 <피아노>와 페미니즘 또는 여성 주체의 각성을 연결시키는 글들이 쏟아져나왔다. 이제는 거의 상식처럼 자리 잡았다. 리뷰를 준비하면서 몇몇 유명한 텍스트들을 읽어봤다. 그런데 ‘오독’(misreading)의 생산성을 이야기하면서 덮고 넘어가기에는 과연 영화를 제대로 본 것이 맞냐는 생각이 들 만한 평론도 많았다. 하나만 예를 들자. 하비 케이틀이 연기한 베인스는 ‘마오리족의 영국인 친구’가 아니라 마오리족 출신이다. 이 영화를 제대로 분석하기 위해서는 또 하나의 렌즈를 들이댈 필요가 있다. 포스트식민주의다. 미셀 푸코가 ‘낯설게 하기 전략’으로 드러낸 성적 근엄주의가 지배하던 빅토리아 시대, 근대성의 변방인 뉴질랜드를 배경으로 삼아 이야기를 한 것은 감독의 전략적인 선택이다. <피아노>를 한국식으로 번안한다면 일제시대 동척으로부터 땅을 분할받은 일본 노총각에게 시집온, 딸이 딸린 일본인 재혼녀가 일본인 지주의 마름 역할을 하는 조선인과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라고나 할까.

영화를 보면서 인상적이었던 것은 에이다의 남편 스튜어트에 대한 묘사와 내면이다. 샘 닐이 연기한 스튜어트는 영화의 주연이 아니다. 영화를 유심히 봐도 스튜어트가 성 불구자였다는 직접적인 언급이나 암시는 없다. 아이에게 엄마의 ‘불륜’을 제보받은 스튜어트는 도끼를 들고 베인스네 집을 찾아가지만, 불륜 현장을 목격하고도 덮치지 못한다. 마루 밑으로 들어가 그들의 ‘대화’를 엿들으려고 한 것은 보다 확실한 증거가 필요해서였을까. 가만히 생각해보면, 20여년 전 개봉했던 <피아노>를 두고 오독이 난무했던 이유가 당시 영화진흥공사의 검열로 ‘성애장면’들이 가위질당했다고 생각해서일지도 모른다. 이번에 리마스터링 버전으로 공개되는 ‘완전판’을 보니, 기억은 가물가물하지만 텍스트의 ‘왜곡’에 이를 정도로 차이가 나진 않는다. 당시도 하비 케이틀의 성기 노출 장면 등이 흐릿하게 처리되었지, 딱히 잘려나간 장면은 없었던 것 같다.

터치스크린

20년 전에는 전혀 생각도 못했던 것은 에이다가 데려온 ‘아버지 없는’ 딸 플로라의 내면이다. 영화의 시작 장면에서 스튜어트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플로라는 어머니의 불륜을 ‘아버지’ 스튜어트에게 고자질한다. 엄마가 손수건에 싸준 물건이 뭔지 모르면서도 ‘이건 옳지 않다’는 생각에 아버지에게 달려간 것이다. 아무래도 여주인공 에이다의 시각에서 사건이 전개되다보니, 20년 전에는 갈림길에서 플로라가 베인스에게 가지 않고 스튜어트에게 달려가는 장면이 철없는 아이의 안타까운 행동-그 결과 자신의 어머니는 손가락을 잘렸고, 자신은 다시 애비 없는 딸이 되었으니-쯤으로 보였지만, 에이다가 자칫하면 목숨을 잃을 수 있으면서도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은 것처럼, 플로라도 독립적인 인격체로 판단을 내린 것이었다. 어쨌든, 영화는 확실히 당대의 고전으로서의 자격이 충분하다. 영화 외적인 이야기이지만, 뉴질랜드의 자연풍광은 피터 잭슨 감독이 10년쯤 뒤 <반지의 제왕> 시리즈를 찍으면서 널리 알려졌다. 미지의 상태로 남아 있던 뉴질랜드의 아름답지만 어딘가 모르게 쓸쓸한 자연풍광을 볼 수 있는 것도 이번 리마스터링판의 미덕이다.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