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윤수의 도시 이미지 읽기]절실한 위로를 소망하는 새해맞이 장소

새해의 첫날을 동해에서, 높은 산에서, 나무 한 그루 앞에서 보내고자 하는 마음 또한 그런 갸륵하고 절실한 위로를 얻기 위함이다. 돌이켜 보면, 2014년은 얼마나 참담했던가.

새해에는 누구나 기도를 한다.

어떤 사람은 새로 떠오르는 해를 찾아서, 그렇지 않아도 1년 내내 대도시의 교통 체증에 시달렸으면서도, 꽉 막힌 도로를 따라 정동진까지 간다. 겨울, 흐린 아침의 해는 종종 뿌연 기운 사이로 슬며시 떠오르건만, 기필코 그곳까지 갔다는 기억만큼은 청신하다. 어떤 사람은 산에 오른다. 아침 일찍 산에 오르면, 뺨을 찢을 듯한 바람이 오르는 이를 마중한다. 내 페이스북의 다종다양한 친구들은 새해 첫날을 높은 산에 올라 기념하고 스스로 사진들을 찍어 전송해온다. 북한산에서, 관악산에서, 오대산에서. 어떤 친구는 제주도까지 갔는데, 고약한 빙설의 방해로 한라산에 이르는 도로가 통제되어 곧 바다로 차를 몰아 그곳의 붉은 기운을 보내왔다.

1월 1일 경기도 파주시 심학산 약천사의 대불. | 정윤수

사찰에서, 교회에서, 성당에서 기도
그렇게들 누구나 새해에는 기도를 한다. 1년의 하루쯤 종교적 순간을 스스로 만든다. 사찰에서, 교회에서, 성당에서 사람들은 긴박하고 초조하고 불안했던 한 해를 뒤로 물리면서, 이제 막 시작하는 새해가 따스하고 부드러운 기운으로 충만하기를 기원한다. 이럴 때 그 당사자의 신앙 여부는 아무런 문제도 아니다.

도시 일상의 자잘한 에피소드로 이어지는 듯 보이는, 그러나 조금만 가까이서 들여다 보면 대단히 그로테스크한 홍상수 감독의 여러 영화에서도 그런 장면들을 볼 수 있다. <옥희의 영화>에서 여주인공 옥희(정유미 역)는 서로 다른 에피소드로 복잡하게 맞물린 지도교수이자 애인(문성근 역)인 남자와 선배이자 애인(이선균 역)인 남자를 새해 1월 1일 1시, 서울 동북방 아차산에서 다시 만난다. 아주 ‘잘생긴 나무’ 근처에서 말이다.

영화 속의 그 나무는, 사실 우리 산하의 곳곳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나무지만 김춘수의 ‘꽃’처럼 주인공들이 ‘잘생긴 나무’라고 명명한 순간부터 그 나무는 적어도 그들에게는 더없이 소중한, 거의 종교적 차원의 나무가 된다.

영화의 끝부분에 아차산이 나오고 그 나무가 보인다. 누가 누구의 기억을 따라 그곳에 이르러 ‘잘생긴 나무’를 보게 되는지, 매우 난삽하게 진행되었기에, 살짝 어리둥절하지만 어쨌든 세 사람은 잘 생긴 나무 근처를 서성거리며 새해 첫날을 맞이한다.

홍상수 감독의 또 다른 영화 <해변의 여 인>에서도 나무 한 그루는 종교적 차원으로 제시된다. 제대로 일이 풀리지 않는 영화감독(김승우 역)이 스산한 겨울에 서해안 신두리 해변을 서성거린다. 여인들이 그의 주변을 교차하여 지나가는데, 그런 자잘하면서도 기이한 에피소드들 틈에 삽입된 한 장면이 인상적이다. 주인공은 찌질한 신세 그대로 바지춤에 손을 넣은 채로 혼자서 해변을 걷다가 문득 멈추더니, 착잡한 표정으로 걸어가서는 볼품없는 나무 한 그루 밑에 무릎을 꿇고 앉는다. 그러더니, 흐느껴 운다.

이런 종교적 상태란 이 거친 세상을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 누구에게나 마음 한구석에 한 줌 정도 갖고 있을 것이다. 마르크스는 <헤겔법철학 비판 서문>에서 이렇게 썼다. “종교적 고난은 현실적 고난의 표현인 동시에 현실적 고난에 대한 항의다. 종교는 억압받는 피조물들의 한숨이며, 심장 없는 세상의 심장이며, 영혼 없는 상황의 영혼이다.”

이 문단 전체를 여러 번 음미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문단 뒤에 붙은 단 하나의 문장, 즉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는 말만 쏙 뽑아서 종교에 대한 그의 예리한 성찰을 왜곡하게 된다. 2차대전 당시 연합군의 드레스덴 융단폭격 때 간신히 살아남아 소설 <제5도살장>을 쓴 미국의 소설가 거트 보네거트에 따르면, 마르크스가 이 글을 쓰던 1844년 무렵에 유럽에서 아편 및 아편 추출물은 누구나 쉽게 구하여 복용하는 일상의 진통제였다.

1월 1일 아침 서울 영등포구 선유도공원 선유도에서 시민들이 새 해를 바라보고 있다. | 김기남 기자

“2014년이여 가라, 다시는 오지 마라”
마르크스도 진통 차원에서 아편을 활용하였는데 통증이 일시적이나마 완화되면 상당한 위로를 얻곤 했다. 그래서 비유한 것이다. 보네거트는 말한다. 마르크스가 종교 그 자체를 원시적으로 비난한 게 아니라 참담한 현실에 좌절하여 비탄에 빠진 사람들에게 그나마 종교가 한 줌의 위로라도 해줬다는 것이다.

새해의 첫날을 동해에서, 높은 산에서, 나무 한 그루 앞에서 보내고자 하는 마음 또한 그런 갸륵하고 절실한 위로를 얻기 위함이다. 돌이켜 보면, 2014년은 얼마나 참담했던가. 나는 그토록 비참했고 험악했던 한 해를 보내는 마지막 날에 “2014년이여, 완전히 가라. 다시는 오지 마라. 제야의 종소리 따위, 다사다난 같은 말들, 다 사치다. 다시는 오지 마라”라고 페이스북에 썼는데, 꽤 많은 사람들이 댓글을 달며 호응을 했다. 모두의 마음속에 2014년은 잔인했던 나날들로 기억되었던 것이다.

정윤수의 도시 이미지 읽기

그랬기에 새해 첫날, 나 역시 멀리 순례길을 떠나지는 못했어도 우선 동네를 벗어나 차디찬 공기를 맞으며 인근의 작은 산을 올랐고, 또 그 산기슭에 자리한 사찰을 찾았다. 여러 종교의 깊이 있는 교리와 신앙의 세계에 대해서는 할 말이 전혀 없거니와 다만 건축의 외양으로 보건대 심학산의 약천사는 이를테면 아산의 공세리성당이나 부안의 내소사 같은 역사적·문화적 결이 응축된 곳에 비하여 덧붙일 말이 많지는 않다. 다만, 이 산과 절의 주변으로 신도시들이 대거 밀집해 있고 그곳에 혈거하는 많은 사람들이 새해 첫날을 각별히 여겨 저마다의 마음을 스스로 위로하고 다짐하기 위해 찾아들었다. 그 걸음걸음은, 거룩하다.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