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이야기]‘트로이 목마’ 법관들

임명 된 후 ‘돌변’… 아이젠하워 “인생 최악의 멍청한 결정” 후회하기도

엄격하고 치열한 청문회를 거쳐 대법관 후보자를 정치적으로 거의 완벽하게 검증하는 미국에서조차 헛다리를 짚는 경우가 종종 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1953년 9월 프레디 빈슨 대법원장이 숨지자 후임자 물색에 나섰다. 아이젠하워는 공화당 출신인 데다 캘리포니아주 연방검사를 거쳐 주지사로 있던 얼 워렌을 임명한다. 기본적으로 보수적 성향이 짙은 검사 출신에 자신과 같은 정통 공화당원인 워렌이 백악관의 보수정책을 지켜줄 것이라 기대했다. 아이젠하워는 워렌을 지명하면서 “그는 미국 연방대법원에 필요한 정치·경제·사회적 입장을 나타내 왔다”(He represents the kind of political, economic, and social thinking that I believe we need on the Supreme Court)고 했다.

얼 워렌 전 미국 연방대법원장 | Harris & Ewing

하지만 이러한 기대가 착각이었음이 드러나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워렌은 대법원장이 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흑인, 여성 등 소수자의 인권을 제한하던 법률과 피의자 및 피고인의 권리를 제한하던 규정에 대해 위헌을 선고하기 시작한다. 흑백분리 교육에 위헌을 선고한 그 유명한 브라운 판결이 워렌 대법원장의 손으로 집필된 것이다. 기존의 ‘분리하되 평등’이라는 이론을 ‘분리하면 불평등’으로 뒤집었다. 워렌은 적극적인 위헌 판결로 역대 최고의 진보 연방대법원을 만들었다. 이 때문에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퇴임 후 “워렌을 지명한 것은 인생 최악의 멍청한 결정이었다”(the biggest damned-fool mistake I ever made)고까지 말했다.

송두환 전 헌법재판관 | 헌법재판소

민변 출신이라 진보 성향으로 분류
우리나라에서도 취임과 함께 예상치 못한 결론으로 치닫는 경우가 있었다. 대표적으로 송두환 전 헌법재판관이 꼽힌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회장 출신인 송 전 재판관은 취임 전에는 확실한 진보 성향으로 분류됐지만 보수적인 결론을 줄곧 내놓다가 퇴임했다. 복수의 헌법재판소 연구관들은 “송 전 재판관 성향을 진보·보수로 나누자면 보수인 것은 틀림없다”고 말했다. 송 전 재판관은 2007년 3월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직접 지명해 헌법재판관이 됐다. 판사생활 8년 만인 1990년 변호사로 개업한 송 전 재판관은 2000년부터 2년 동안 민변 회장을 지냈다. 이 때문에 시민단체에서 대법관 후보로 추천한 적도 있다.

2010년 사형제도에 대해 헌재가 합헌을 결정할 당시 위헌의견이 4명이나 됐지만 송 전 재판관은 합헌에 가담했다. 헌재의 사형제 합헌 결정 직후, 종교·인권·시민단체들은 “헌재가 반생명·반인권적 결정을 내렸다”고 비판했다. 2008년 종합부동산세법 사건에서는 정통 법관 출신 김종대·조대현 재판관이 합헌의견을 내는 가운데도 위헌의견에 가담했다. 2009년 혼인빙자 간음죄에 대해 재판관 6명 의견으로 위헌이 선고될 때도 송 전 재판관은 합헌이었다. 2008년 간통죄 사건에서는 위헌의견을 냈지만 “처벌 자체는 정당하지만 벌금형이 없어 위헌”이라는 입장이었다.

법조계에서는 “군사독재 시절 민주 대 반민주 구도에서 독재에 저항한 것을 두고 진보적이라고 지레짐작했지만, 경제·인권·자유 같은 실제 시민의 일상생활에 대한 가치판단은 보수적이라는 것을 예상치 못한 것 같다”고 평가한다. 미국에서 전통적으로 법관의 성향을 가르는 기준은 낙태 허용, 총기 소유, 사형제 등 매우 이념적이다. 반면 우리는 민변이니까 진보적이라는 수준이었던 셈이다.

<이범준 기자 seirots@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