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나는 일을 못한다]여직원은 꼭 센스있고 착해야 하나요

일반적으로 여성에게 기대되는 능력에는 패턴이 있다. 사회는 여성들이 눈치 빠르게 사람들이 뭘 원하는지 알아차리고 사람들을 돌보기를 바란다.

내가 다니는 직장은 남성이 압도적으로 많은 곳이다. 그리고 나는 그곳의 노동조합 상근자(사무직)이다. 그리고 최근 아주 크게 망했다. 컴퓨터를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50~60대 남성이 대부분인 이곳도 연말정산을 시작한 것이다. 나는 192명의 연말정산 신고서를 혼자 다 써야 하는 압도적인 절망 앞에서 할 말을 잃었다.

특별히 불행한 상황은 전임자가 천사였다는 점이다. 조합원들은 이 무지막지한 파도에 휩쓸리는 내 앞에서 종종 전임자 이야기를 해서 스트레스 게이지를 풀로 끌어올리곤 했는데, 그 얘기인 즉슨, 전임자는 맨손으로 와서 연말정산 하려고 한다고 하면 인증서 발급·서류 출력·연말정산 서류 작성을 모두 알아서 다 해줬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일주일 안에.

“그걸 업무시간 내에 할 수 있어요?”

“아니, 새벽에 집에 가고 그랬지.”

놀라운 것은 그러면서도 전임자는 조합원들한테 커피도 타 주고, 한 번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왜 인수인계 받을 때 등에 있는 날개는 못 봤을까. 나의 절망은 더욱 심도를 더해 갔다. 왜냐면 나는 그녀처럼 재빠르게 행동하기에는 더럽게 눈치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 나는 눈치가 없다. 타인의 욕망에 민감하지 못하고 자신의 욕망에는 터치형 스마트폰처럼 반응한다. 가진 거라곤 쇠사슬뿐인 노동계급에게 이건 그다지 환영받을 수 있는 특성이 아니다. 그렇게 살아도 부적절하다는 소리를 안 들을 수 있는 사람은 비행기 안에서 “너는 못생겼으니까 내려”라고 말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진 사람일 것이다. 거기에 더해서 매우 불행하게도 나는 여성이다.

일을 한 지 두 달 정도 되었을 때 내 상사는 다른 사람에게 웃으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쟤는 커피 한 잔 드시겠냐는 소리를 안 해.”

나는 매우 당황해서 급하게 커피믹스를 손에 들고 자리에 앉지도 서지도 못한 채 엉거주춤하게 상사를 바라보다가 결국 그냥 자리에 앉았다. 커피 정도야 선의로 탈 수도 있는 거긴 한데 그럼 말을 해야지 내가 무슨 텔레파시스트냐고 생각하면서.

일반적으로 여성에게 기대되는 능력에는 패턴이 있다. 사회는 여성들이 눈치 빠르게 사람들이 뭘 원하는지 알아차리고 사람들을 돌보기를 바란다. 잘 웃고 명랑하고 친절하며 부드럽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모든 여성이 눈치가 빠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여성들은 회사에서 아주 예민해져 있어야만 한다. 상사가 말하기 전에 미리 커피를 가져다 놓는 ‘센스 있는’ 부하직원이 되기 위해서.

그리고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반복해서 하는 일들에 적응을 하게 마련이다.

언젠가 “이사가 딱히 시키지 않아도 앞장서서 여직원들의 결혼과 출산을 단속하는 여자 상사”에 대한 글을 읽었다. ‘센스 있는’ 부하직원이 되기 위해 처음 입사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악착같이 노력해 온 그녀의 삶이 한 번에 읽히는 것 같았다. 상사가 무얼 원하는지 알아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노력해 온 결과일 것이다. 그녀는 분명 일을 잘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내가 지금 앉은 자리에서 수많은 여성들이 ‘꽃’이었을 것이고, ‘커피 자판기’였을 것이며, ‘항상 웃는 사무 기계’였을 것이다. 나의 전임자는 그 역할을 매우 충실하게 수행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나는 천사가 아닐 뿐더러 눈치가 없다.

내가 연말정산 때문에 바쁘다고 전혀 ‘돌봄노동’을 수행하지 않자 조합원들은 각자 커피를 타 마시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한 조합원이 사무실에 모여 앉아 있는 사람들을 향해 ‘커피 마실 사람’을 호명했다. 나는 그의 뒤에서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손을 번쩍 들고 말했다.

“저요.”

그래, 나는 일을 못한다

그는 당황했고 사람들은 웃었다. 50대의 남성 조합원에게 커피 심부름을 시킨 상근자는 내가 처음인 모양이었다. 그 이후로 사람들은 자기 손으로 커피를 끓이고, 그때마다 내게 묻는다. 커피 마실 거냐고. 나는 앞으로도 당분간은 그냥 눈치 없이 살아도 될 모양이었다.

<이서영 일 못하는 사람 유니온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