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항의 동병상련 부모공부]‘보고 배우는 게 없는’ 우리 아이들

오늘 부모들은 예전 부모들이 일상에서 당연하고 예사로웠던 가르침들 가운데 어떤 것도 가르치지 못한다. 그 하나하나가 아이의 삶을 위험에 빠트리거나 해로울 수 있다는 불안감을 뿌리칠 수 없기 때문이다.

‘길 위의 신부’라는 별명을 가진 문정현 신부. 그는 사회적 불의와 싸울 때는 어디에서 저런 힘이 나올까 싶을 만큼 강렬하게 포효하지만 아이들과 어울릴 때는 아이처럼 천진하고 명랑한 분이다. 그는 아이들을 좋아하는 만큼 당연히 교육문제에도 관심이 많다. 그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러셨다. “그런데 아이들이 갈수록 좀 이상한 것 같아요. 중·고생 아이들과 대화를 하기가 갈수록 어렵더라고요. 걔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못 알아듣겠고, 걔들도 내 말을 못 알아듣는 것 같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요즘 아이들 어릴 때부터 생활하는 걸 보면 정상적인 대화가 가능하다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이들과 사회에 대해 토론하길 즐겨해온 중년 고등학교 교사가 갈수록 사회에 대한 이야기만 하면 따분해하고 딴전을 피우는 아이들로 고민하다가 <삼성을 말하다>라는 책을 몇 권 사서 돌려 읽게 했다. 딱딱한 이론이나 개념이 아니라 아이들의 삶과도 연결되어 있는 실제 이야기이니 아이들이 흥미로워 할 거라 기대했던 것. 예상대로 아이들은 흥미로워했고 며칠 만에 학급 아이들이 전부 돌아가며 책을 다 읽었다. 교사는 아이들이 이건희씨와 삼성에 대한 분노를 쏟아낼 것이고 그 다음엔 재벌 이야기, 천민자본주의 이야기를 나눌 거라는 기대에 찼다. 며칠 후 아이들과 토론을 시작한 교사는 경악했다. 적지 않은 아이들이 분노는커녕 ‘짱이다’ ‘졸라 멋있다’ 식의 동경에 가득찬 태도를 보였던 것이다.

10대는 자신들만의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많은 은어를 만들어 쓴다. 휴대전화로 문자메시지를 주고받는 아이들. | 김문석 기자

학력이나 지식과는 다른 ‘삶의 철학’
그런 아이들에게 그건 “동경할 일이 아니라 분노할 일”이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하면 또 무슨 소용이겠는가. “아이들에게 세상을 보는 안목과 힘을 길러주려고 늘 노력해 왔습니다. 그런데 뭐랄까요. 아이들이 생각을 하는 기본 틀이 무너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낙심할 수밖에 없는 건 제 힘으로 그걸 막기에는 근본적이고 광범위한 상황이라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이 여느 사람들보다 좀 더 특별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긴 하지만, 두 사람이 토로하는 이야기 자체는 그리 특별할 게 없는 이야기들이다. 왜 아이들은 그렇게 되어가는 걸까. 많은 사람들이 그 첫 번째 원인으로 ‘아이들이 보고 배우는 게 없기 때문’이라고 말하곤 한다. 보고 배우는 게 없다니 무슨 말일까. 오늘 한국의 부모들은 예전의 부모들에 비해 학력도 지식도 월등한데 말이다. 아마 그건 학력이나 지식과는 다른 어떤 것일 게다. 전에 부모들이 오늘 부모들과 분명히 다른 게 있긴 하다. 전에 부모들은 삶에 대해, 세상에 대해 일상에서 끊임없이 아이에게 가르치곤 했다. “혼자만 잘살면 뭐해 함께 살아야지.” “돈은 좋은 거지만 인생의 전부는 아니야.” “일도 좋지만 놀 줄도 알아야지.” “동무에게 양보할 줄 알아야 해.” “미물도 함부로 해치는 게 아니다.” “사람이 너무 탐욕 부리면 죄받는다.”

부모들은 아이에게 늘 예사로 그렇게 가르치곤 했다. 자신은 그렇게 살지 않는 부모조차도 아이들에겐 그렇게 가르치려 노력했다. 말하자면 부모들은 어려운 철학 개념어 하나 쓰지 않지만, 제 나름의 삶의 철학자이자 철학교사였다. 사람이 삶의 철학을 갖는다는 게 뭘까. 인간과 세계에 대해, 삶의 본질에 대해 사유하길 멈추지 않으며 나름의 관점과 태도를 갖는 것일 게다. 그리고 현실이 나를 곤란하게 만들더라도 그 관점과 태도에 기대어 사람 꼴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일 게다. 예전 부모들은 삶의 철학자들이었고 정연한 철학교사였다. 그들의 가르침은 참 무서운 것들이었다. 아이가 어른이 될 때까지 헤아릴 수 없이 반복되는 그 가르침이 생각의 기본 틀을 만들고 사람 꼴의 하한선을 만들어냈다. 아이들은 사람임을 되새길 줄 알며, 이기적 욕망을 공동의 가치로 견제할 줄 알며, 소박하고 정직한 삶이 부귀영화를 누리는 삶보다 못하지 않음을 아는 사람들로 자라났다.

“현실이 어쩔 수 없다”는 궁색한 변명
오늘 부모들은 예전 부모들이 일상에서 당연하고 예사로웠던 가르침들 가운데 어떤 것도 가르치지 못한다. 그 하나하나가 아이의 삶을 위험에 빠트리거나 해로울 수 있다는 불안감을 뿌리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전엔 자신은 그렇게 살지 못하는 부모조차 아이에겐 그렇게 가르쳐야 한다고 믿었지만, 이젠 자신은 그렇게 살아가는 부모조차 아이에겐 가르치지 못한다. 세상이 그렇게 변해버렸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각자도생하는, 제 새끼의 행복을 추구하느라 늘 불안하고 늘 피 터지는 세상에 진입했기 때문이다. 부모들이 더 이상 삶의 철학자도 철학교사도 아니라고 해서 누구도 부모들을 비난할 순 없다. 그러나 사정이 어떻든 ‘밥을 굶어도 사람이 그러면 안 되지’라는 철학이 사라짐으로써 아이들의 삶은 밥을 굶던 시절보다 오히려 더 초라해졌다.

삶의 철학자들이 사라진 자리를 차지한 건 “현실이 어쩔 수 없다”는 한마디다. 그 한마디가 아이를 키우고 교육하는 모든 중요한 지점과 순간들을 메워버린다. 아이들도 기계가 아니라 사람인지라 제 삶과 세계에 대한 답답함과 막막함에 질문이라도 할라치면 부모들은 한목소리로 아이들의 입을 막는다. “현실이 어쩔 수 없다.” “다 너를 위해서다.” 아이들 중 유난히 섬세한 감성과 예민한 자의식을 가진 아이들은 답답함과 막막함에 기진하여, 왜 살아야 하는 건지 의미를 찾을 수 없어 제 삶을 놓아버리기도 한다. 여전히 대부분의 아이들이 부모의 인도대로 살아가지만 그들 역시 생각의 기본 틀이 무너지고 있다. 그런 그들이 과연 잘살아갈 수 있을까. 부모가 안심할 정도의 스펙과 경제적 안정성을 확보한다 해도 과연 주체적이고 자유로운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주체적이지도 자유롭지도 않은 삶은 과연 살아 있는 삶인가.

김규항의 동병상련 부모공부

1만명의 아이가 다 다르게, 1만개의 개성을 갖게 하는 게 훌륭한 교육이다. 그러나 1만명의 아이가 사람의 기본 꼴과 생각의 기본 틀은 공유하도록 하는 것은 교육의 기본이다. 아이가 심각한 신체적 위험에 처했을 때 제 신체적 위험을 아끼지 않고 돕기를 꺼려하는 부모가 있는가. 아이는 인간이며, 인간은 신체와 함께 영혼을 가진 존재다. “현실이 어쩔 수 없다”는 말은 심각한 영적 위기에 직면한 아이를 포기하는 말이다. 아이가 삶의 철학을 갖는 건 아이를 현실적 위험에 빠트리는 일이 아니라 아이가 이 모질고 불안한 현실에서도 제 스스로를 잃지 않고 단단하게 살아내는 힘을 길러주는 일이다. 철학은 본디 그런 것이다. 그리고 철학이 없다면 교육도 없다. 한번에 다할 순 없으니 하나부터 시작해보면 어떨까. 어떤 경우에도 ‘현실이 어쩔 수 없다’는 포기의 말부터 않는 것, 그 말이 속에서 튀어나오려 할 때 한 호흡 돌리며 좀 더 생각하고 궁리하는 것부터.

<김규항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