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IB 가입의 정치경제학

한국,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에 참여 결정… 미국과 중국, G2의 대결 본격적으로 시작

한국이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에 참여하기로 했다. 예상됐던 일이지만 발표는 전격적이었다. 한국 정부는 3월 26일 밤 8시쯤 “정부는 AIIB에 예정 창립 회원국으로 참여하기로 결정하고, 이를 중국에 서한으로 통보했다”고 밝혔다. 사전에 아무런 공지가 없었다.

AIIB는 아시아 저개발국가의 인프라에 투자하기 위해 설립되는 국제개발은행이다. 저금리로 해당 국가에 차관을 줘 도로, 철도, 항만, 공장 등을 짓도록 지원해 준다. 한국이 과거 성장과정에서 지원받았던 국제부흥개발은행(IBRD)이나 아시아개발은행(ADB)과 같다. 한국도 IBRD 차관을 받아 부산항만 등을 개발했다. 개발차관은 금리는 제로에 가깝고 상환기간도 30~40년으로 넉넉하다. 아시아 지역에 인프라 개발수요가 많으니 AIIB가 일정 부분 역할을 하겠다는 것이 설립 이유다. 중국이 한국의 참여를 제안한 것은 지난해 7월로, 한국이 참여를 최종 결정하는 데는 8개월이나 걸렸다. 한국은 이미 공적개발원조(ODA) 프로그램을 통해 베트남, 캄보디아 등 아시아 주요국을 돕고 있다. 그런 한국이 ‘아시아 개발도상국을 돕는다’는 좋은 취지를 가진 AIIB 참여를 놓고 장고를 거듭했던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

3월 21일 오후 박근혜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왕이 중국 외교부장을 만나고 있다. / 청와대사진기자단

AIIB 설립에는 미국과 중국, G2의 대결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는 ‘정치적 함수’가 숨어 있다. ‘팍스 시니카’와 ‘팍스 아메리카’의 기싸움이 시작됐다는 의미다. AIIB는 중국이 처음으로 주도해 만든 국제개발은행이다. 기존 미국이 주도했던 세계은행이나 아시아개발은행과는 다르다. 중국은 국제통화기금(IMF) 진출에 공을 들여왔지만 국력에 걸맞은 대접을 받지 못했다. 2012년 IMF 사무총장에 린젠하이 교수가 임명되긴 했지만 총재직까지 가기는 요원했다. AIIB에는 아예 새로운 국제기구를 만들어 미국의 주도권을 흔들겠다는 중국의 야심이 숨어 있다. 한·중·일과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 24개국이 참여하는 치앙마이 이니셔티브(CMI)도 마찬가지다. 아시아 국가들이 금융위기를 맞아 외화가 부족할 때 지원하자는 취지의 CMI는 중국 제안으로 구성됐다. IMF에 대응하는 성격을 지닌 기구로 미국의 참여가 배제됐다. CMI를 아시아통화기금(AMF)으로 확대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AMF가 구성되면 중국이 주도권을 잡으려 할 가능성이 크다. 중국 경제는 날로 커지는 반면 일본은 휘청거리고 있어 CMI처럼 중·일이 같은 위상으로 가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CMI는 중국과 일본이 768억원씩 똑같은 분담금을 낸다.

중국이 주도해 만든 첫 국제개발은행
AIIB의 지배구조 문제에 주요국들이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도 이 때문이다. GDP 규모로 분담을 결정할 경우 중국은 지배지분을 최대 50%까지 가져갈 것으로 전망됐다. 여기다 이사회를 비상임으로 운영하게 되면 중국이 AIIB를 좌지우지하게 된다. 자칫 잘못하면 들러리를 서는 꼴이어서 한국은 참여를 신중히 검토해 왔고, 일본은 아직 참여의사를 밝히지 않고 있다.

하지만 대세는 기울고 있다. AIIB 창립멤버로 가입하거나 가입의사를 밝힌 나라는 한국을 비롯, 35개국에 이른다. 여기에는 미국의 우방인 독일, 영국도 포함됐다. 조만간 호주도 참여할 가능성이 있다. 이렇게 되면 AIIB의 국제적 위상이 커지고 중국의 지분율도 줄어들 가능성이 크다. 외교부 고위 당국자는 “AIIB 규모가 계속 커지고 있어 이대로라면 중국의 지분은 30%대 중반, 한국은 5% 정도가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호주가 참여하면 한국의 GDP는 역내 4위가 된다. 중국, 인도, 호주에 이어서다. 한국이 3월 26일 전격 참여를 결정한 배경에는 기왕 참여할 것이라면 적극적으로 참여해 한국 지분을 극대화하는 것이 낫다는 판단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 부총재 자리를 확보하거나 사무국을 유치해야 한다는 말도 나온다. 중국도 지난해 한국에 AIIB 참여를 권유했을 때 이런 제안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한국은 반발하는 미국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사드·THAAD) 배치문제까지 겹치면서 문제가 꼬였다. 사드를 한국에 배치하면 중국까지 레이더망에 들어가기 때문에 중국이 노골적으로 반대하고 있다. ‘안미경중(安美經中)’이라는 신조어가 나온 것도 이 때문이다.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이라는 의미다. AIIB 가입을 결정하면서 미국의 사드 배치를 허용하는 것 아니냐는 얘기가 벌써 흘러나오고 있다. 한국 정부는 “사드와 AIIB는 흥정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라고 펄쩍 뛰고 있지만 어떤 식으로든 미국 측과 교감을 거쳤을 것으로 보인다.
한국 정부로서는 실리적으로도 AIIB 가입을 거부하기 어려웠다. AIIB가 차관을 줘 아시아 개발도상국의 SOC 건설에 나설 때 AIIB 회원국가의 건설사들에 우선권을 줄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ADB의 최대 지분을 가진 일본은 이런 식으로 ADB 차관을 준 동남아의 건설시장에 진입했다. 한국이 개발도상국을 지원하기 위해 만든 대외경제협력기금(EDCF)도 비슷하게 운영된다. 한국의 대외경제협력기금 차관을 받은 나라는 도로·철도·댐 등을 건설할 때 한국 기업들을 우선적으로 써야 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한국 외 다른 국가에도 개방하라”며 압력을 넣고 있지만, 다른 나라도 비슷한 시스템이라 한국이 받아들일 가능성은 높지 않다. 건설업계의 한 관계자는 “동남아 시장에 진출하려면 실적 등을 요구하는데 그런 점에서 동남아 건설 경험이 많은 일본 업체들이 매우 유리했다”며 “AIIB 물량을 따오지 못할 경우 한국 업체의 동남아 진출이 매우 어렵게 된다”고 말했다. 2014년 말 기준 아시아 건설시장 규모는 약 7300억 달러(약 806조원)로 추정된다.

동남아 건설시장 진출 발판 기대
아시아 지역에서 진행되고 있는 미국과 중국의 힘겨루기는 또 있다. 미국이 공을 들이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이다. TPP는 아시아 및 태평양 지역 국가 간에 진행 중인 광역 자유무역협정(FTA)이다. 미국, 캐나다, 일본, 멕시코, 호주, 뉴질랜드, 베트남, 말레이시아, 페루 등 12개국이 참여하고 있다. 협정 참가국의 GDP는 전 세계 경제의 40%나 된다.

하지만 지적재산권, 노동권, 관세율 등 각 분야에서 높은 수준의 기준과 개방도를 정해 중국이 가입하기 쉽지 않다. 사실상 중국을 배제한 경제블록이다.

중국은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으로 맞대응하고 있다. 중국과 FTA를 채결한 한국, 일본, 호주 등과 아세안 10개국 등 16개국이 참여하는데 TPP와 맞먹는 규모가 된다. 한국은 아직 TPP와 RCEP 가입 여부를 결정하지 않았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AIIB 설립은 향후 전개될 세계 경제 주도권 싸움의 첫 시작일 뿐”이라며 “한국으로서는 새로운 경제질서 내에서 최대한 실리를 얻는 전략을 세워야 한다는 것이 고민”이라고 말했다.

<박병률 경향신문 경제부 기자 mypark@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