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창선의 눈]성찰 없는 괴물이 되어버린 진보

<성찰>은 데카르트의 저작이다. 그는 전적으로 확실한 것이 아니면 어떤 의견에 동의하는 것을 삼가야 한다며, 확실한 인식을 찾기 위한 방법으로 ‘회의’를 말했다. 그는 <방법서설>에서 “나는 내 정신이 보통 사람의 정신보다 모든 점에서 더 완전하다고 주제넘게 생각해 본 적은 한 번도 없다”고 했다. 또한 몽테뉴는 <에세>에서 “나는 무엇을 아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끊임없는 자기 의심과 회의를 통해 더 바른 인식을 추구해야 함을 말했다. 16세기 극단의 대결 시대에 던져진 몽테뉴의 이 같은 성찰 정신은 이후 톨레랑스(tolerance)의 준거가 된다. 이들보다 더 일찍, 아테네 시민법정에 섰던 소크라테스는 조용히 살라는 요구를 거부하며 “검토 없이 사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고 했다. 인간다운 삶이 무엇인가를 찾기 위해 분투했던 수많은 철학자들은 이처럼 ‘성찰’을 인간이 지켜야 할 핵심적 덕목으로 제시했다. 끊임없이 자신을 회의하고 성찰하는 인간이라야 스스로를 변화시키고 타인들과 함께하는 삶이 가능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사회에서는 성찰하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니다. 성찰의 태도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권력자들만 가리킨 얘기는 아니다. 야권 혹은 진보라는 범주에 속해 있다고 불리는 마을의 광경도 성찰의 기근 현상을 드러내기는 매한가지이다. 총선과 대선이 연이어 있던 2012년에 이 마을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던 민낯은 이 사회에서 진보가 어째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얻는 데 실패할 수밖에 없는가를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야권 후보의 지지층들 사이에서는 정치인들보다 더 노골적인 계파주의, 거칠고 폭력적인 언어들이 난무했다. 내가 지지하는 후보에게 ‘지적질’을 하는 행위는 악으로 간주되었고, 내가 지지하는 인물만이 무오류의 절대선이었다. 이들에게는 ‘나의 것은 선, 나와 다른 것은 악’이었다.

성찰이 없으면 역사의 잘못은 반복된다. 그로부터 3년의 시간이 되어 가고 있지만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인터넷방송과 팟캐스트에서는 특정 계파나 정치인의 편에 서 있는 증오와 저주의 언어들이 쏟아지고 있고, 그 우물 안에 모인 마니아들은 열광하곤 한다. 그들의 ‘님’에 대한 비판의 글이라도 쓰려면 융단폭격을 각오해야 한다. 이 같은 광경 그 어디에도 인간의 고통을 끊어내기 위해 밀알이 되는 진보의 숭고함이나 품격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다. 진보의 숭고한 가치가 자리하고 있어야 할 머릿속에는 자신이 지지하는 정치인에 대한 완고한 집착만이 가득 차 있다. 넓은 세상의 사람들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들의 곁을 떠나간다. 다른 사람들과는 소통하지도, 정서를 공유하지도 못한 채 자신들의 세계에 갇혀 지내는 ‘진보의 자폐증’이다.

일부의 문제일 뿐이라고 치부할 일이 아니다. 그런 유사 진보가 판을 쳐도 그 누구도 이를 질책하려 들지 않는 진영 내의 비겁한 침묵은 진보 내부의 자정능력이 작동되지 못하고 있음을 고백하고 있다. 그러는 사이 세상 사람들은 그 거친 모습이 진보인 줄로 믿어가고 있다. 니체는 <선악의 저편>에 이런 잠언을 적었다.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자신이 이 과정에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만일 네가 심연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심연도 네 안으로 들어가 너를 들여다본다.” 내 안에는 지금 무엇이 자리하고 있을까. 이 길에 처음 들어서던 날 품었던 인간애라는 소중한 가치가 간직되어 있는가, 아니면 어느 사이에 괴물이 들어와 있지는 않은가. 회의하고 성찰하며 나에게 물어볼 일이다. 핏발 선 눈으로는 인간이 살아 숨쉬는 더 나은 세상을 볼 수가 없다.

<시사평론가>

유창선의 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