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테네 시민들은 왜 쓰레기통을 뒤지나

지중해 햇살이 내리쬐는 남유럽의 한복판, 한때는 신들의 나라였고 서양철학과 사상의 중심지였으며 찬란하게 꽃핀 문명을 일궜던 그리스에서는 ‘유럽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는 상상하기 힘든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그리스 아테네의 소포클레우스 거리, 시에서 설치해 놓은 R21번 쓰레기통에서는 여름날의 열기에 쓰레기 썩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니코스 폴로노스(55)는 근처 식료품점과 가게에서 버린 쓰레기가 쌓여 있는 이 쓰레기통을 뒤져 일상을 영위한다. “가끔 고철이 나오면 팔아서 돈을 벌고요, 먹어도 될 것 같은 음식이 나오면 먹기도 해요. 종이나 캔, 빈병 같은 것도 재활용품으로 팔 수 있어요.” 쓰레기통 안을 꼼꼼하게 살펴보던 폴로노스가 말했다.

폴로노스는 하루에 8시간씩 쓰레기통을 뒤지고, 1㎏당 50원인 구리선과 70개를 모으면 1.5유로를 주는 알루미늄 캔을 모아 판다. 그가 하루에 손에 쥐는 돈은 5~10유로(약 6000~1만2000원) 남짓이다. R21번 쓰레기통 인근에는 교회가 운영하는 무료급식소가 있다. 마약 중독자나 가난한 이들, 노숙인들은 하루 세 번 이 급식소 앞에서 밥을 먹기 위해 줄을 선다. 영국 일간지 텔레그래프가 최근 전한 아테네의 풍경이다.

지난 2일(현지시간) 아테네의 한 은행 앞에서 연금수급자들이 최대 120유로인 일주일분 연금을 받기 위해 줄지어 서 있다. 그리스는 자본유출을 막기 위해 6월 말 은행 영업중단 조치를 취했고, 현금입출금카드를 사용할 수 없는 고령의 연금수급자들을 위해 한시적으로만 일부 은행 지점 문을 열었다. / AP연합뉴스

그리스에 재앙이 된 구제금융
신문은 폴로노스가 아테네의 전형적인 ‘신(新)빈곤층’이라고 평가했다. 무료급식소 앞에 모여드는 사람들 중 다수는 불과 수년 전까지만 해도 평범한 노동자였다. 폴로노스도 건설노동자로 일했다. 그는 3년 전 긴축의 여파로 그리스의 건설 붐이 꺼지면서 직업을 잃었다. 가까운 미래에 직업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가망도 없다. 그는 텔레그래프 기자에게 “저 사람처럼 보이고 싶지는 않아요”라고 말하며, 무료급식소 앞에 널부러져 누워 있는 헝클어진 머리의 마약 중독자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내 삶의 말로가 저 사람 같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리스가 앞으로도 이 끔찍한 상황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내 건축기술을 필요로 하는 곳도 다시는 찾을 수 없겠죠. 수많은 친구들이 나처럼 살고 있어요. 몇몇은 마약 중독에 빠져버렸죠.”

폴로노스처럼 쓰레기통을 뒤져 먹고사는 사람들이 몇 명이나 되는지는 추산할 수조차 없다. 지중해 햇살이 내리쬐는 남유럽의 한복판, 한때는 신들의 나라였고, 서양철학과 사상의 중심지였으며, 찬란하게 꽃핀 문명을 일궜던 그리스에서는 ‘유럽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는 상상하기 힘든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6월 30일부로 그리스에 대한 2차 구제금융이 종료됐다. 그리스는 국제통화기금(IMF)에 15억 유로(약 1조9000억원)의 채무를 갚지 못한 채 사실상 국가부도 상태에 빠졌다. 그리스는 ‘처음으로 IMF에 돈을 갚지 못한 선진국’이라는 오명을 썼다. 방만하고 비대한 공공부문, 복지 포퓰리즘과 게으른 연금수급자들, 돈을 빌리고도 뻔뻔하게 갚지 못하겠다고 나선 그리스에 대해 유럽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비난이 쏟아졌다.

하지만 그리스의 빈곤한 현재의 모습은 그동안 긴축 프로그램을 성실하게 이행한 결과다. 금융위기가 닥치자 유럽연합(EU)·유럽중앙은행(ECB)·IMF ‘채권단 트로이카’는 그리스 등 가난한 유로존(유로화를 사용하는 국가)에 구제금융을 대가로 공무원 임금과 연금을 대폭 삭감하는 긴축정책을 요구했다. 그리스는 채무국으로서 긴축 요구에 맞춰 정부 지출을 30%나 줄였고, 지난 3년 연속 EU가 평가하는 구조개혁 분야 1위를 차지했다.

각국의 체력을 따지지 않고 획일적으로 부과한 긴축 처방은 그리스에 엄청난 부작용을 불러왔다. 그리스는 다른 유럽국들에 비해 산업자본이 발달하지 않은 나라다. 주요 산업은 관광업이고, 전체 산업의 80%가 서비스업이며, 250인 이상 기업이 전체 고용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5% 미만이다. 임금비용을 줄여 수출경쟁력을 늘리는 긴축의 효과는 그리스에 적용되지 않았다.

그리스가 채권단이 쏟아부은 돈을 받아챙긴 것도 아니다. 구제금융은 사실 채무국 국민들에게 쓰이는 돈이 아니라, 그리스가 독일과 프랑스의 민간은행에서 빌린 돈을 공공부채로 전환해주는 역할만 한 것이었다. 영국 시민단체 주빌리부채캠페인은 지난 1월 보고서에서 2010년 구제금융 시작 후 그리스에 쏟아진 2520억 유로의 구제금융 중 92%는 다시 그리스와 유럽의 금융기관으로 돌아갔다고 밝혔다.

지난 6월 29일 그리스 아테네 국회의사당 앞에서 구제금융과 긴축정책에 반대하는 시민 1만7000여명이 시위를 벌이고 있다. / AP연합뉴스

“긴축 거부한다” 그리스의 저항
대신 지난 5년간의 구제금융은 그리스인들에게 재앙으로 돌아왔다. 2009년 2643억 달러였던 그리스의 국내총생산(GDP)은 2014년 1944억 달러로, 무려 26%나 쪼그라들었다. 국부의 4분의 1이 날아가버린 것이다. 1997년 한국에 닥친 IMF 구제금융 위기 당시 한국에서 1년간 줄어든 GDP는 1% 남짓이었다. 그리스 국민들이 어느 정도의 고통을 겪었을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정부 지출이 줄어들며 경기가 파탄나 실업률은 27%에 이른다. 청년들의 경우 50%가 실업상태다. 빈곤선 아래에서 살아가는 국민은 44%나 된다. 그리스 국민들의 지출이 구제금융 기간에 40%나 줄었다는 추산도 있다. 연금으로 생활하는 이들의 상당수는 일자리를 잃은 자녀까지 부양한다. 연금이 그리스의 마지막 사회안전망 역할을 하는 셈이다. 그리스로서는 연금지출을 더 줄이라는 채권단의 요구를 수용할 여력이 없다.

긴축은 폴로노스처럼 쓰레기통을 뒤져 연명하거나 무료급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수도 없이 낳았다. 텔레그래프는 한 무료급식소 자원봉사자가 “2011년 이후 쓰레기를 뒤지는 사람이 2~3배는 는 것 같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조지프 스티글리츠 컬럼비아대 교수는 “그리스 경제 파탄에 트로이카가 책임지지 않으려 하는 것이 놀랍다”고 프로젝트신디케이트 기고를 통해 밝혔다.

그리스 국민들은 2011년에도 고통만 강요하는 긴축에 반대한다며 시위를 벌였다. 게오르기오스 파판드레우 당시 총리는 긴축안 수용을 놓고 찬반 국민투표를 시도했다. 하지만 독일과 프랑스 등의 압박으로 끝내 투표는 무산됐다. 이후 그리스에서는 조기총선이 실시됐고 지금과 같은 파국을 낳은 2차 구제금융이 시작됐다. 그리스는 올해 1월 총선에서 긴축 반대를 전면에 내세운 급진좌파연합(시리자)의 알렉시스 치프라스를 총리로 선택했다. 올 상반기 치프라스 총리는 트로이카와의 협상에서 추가 긴축 수용을 거부했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대 교수는 최근 뉴욕타임스 기고에서 “채권단이 제시하는 조건은 지난 5년간 강요된 긴축정책과 다르지 않다”고 썼다. 그는 “이 요구를 수용하면 그리스는 끝없는 긴축과 불경기의 악순환에 빠질 것”이라며 그리스인들에게 채권단의 요구를 거부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남지원 경향신문 국제부 기자 somnia@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