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커스]국민참여재판 배심원 의견 ‘판사하기 나름’

‘무죄 권고’ 영화서는 배척, 현실서는 수용… ‘판사의 법리냐, 시민의 상식이냐’ 딜레마

지난 6월 24일 개봉한 영화 <소수의견>은 우리 법정영화의 수준을 한 단계 올려놓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영화를 본 법조인들은 영화 속 판사·검사·변호사가 자신들을 빼닮았다고 입을 모은다. 특수부 검사 출신인 금태섭 변호사는 “영화 속 검사들이 과거 선배들을 떠올리게 한다”고 했고, 법원의 여러 판사들도 배우 권해효가 연기하는 재판장의 모습이 너무나 사실 같아 입을 다물지 못했다고 했다.

철거민 가장의 ‘정당방위’ 인정 못 받아
영화는 재개발 현장에서 철거용역에 맞서던 가장이 경찰의 폭행으로 중학생 아들이 숨지자 그 경찰을 살해한 사건에 관한 이야기다. 변호사들은 2개의 사건을 맡아 국가와 싸운다. 철거민 가장이 상해치사로 기소된 국민참여 형사재판과 아들을 죽인 이가 용역이 아니라 경찰이라며 국가의 불법행위에 대한 손해배상 100원을 청구한 민사재판이다.

<소수의견>에서 철거민 가장은 자신은 아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며 불가피했다고 정당방위를 주장한다. 배심원들은 이를 받아들여 재판부에 무죄를 권고한다. 하지만 재판부는 배심들의 의견을 배척하고 유죄와 징역 3년을 선고하면서 영화는 끝이 난다. 한국에서 배심의 결정은 권고적 효력만 있다. 실제 법조인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정당방위를 인정하지 않은 재판부의 결론이 옳다는 데 입을 모은다. 법리로나 그간의 판례를 봐도 정당방위가 인정되기 어렵다는 것이다.

영화 <소수의견>에서 홍재덕 검사 역을 맡은 배우 김의성이 증인을 심문하고 있다. 국민참여재판에서 검사나 변호사의 심문은 판사가 아닌 배심을 설득하기 위한 것이어서 가능한 한 쉽고 간결하게 한다. / 시네마서비스

법무법인 해마루의 최윤수 변호사는 정당방위가 인정되려면 아들이 맞고 있었다는 현재성이 중요한데, 영화를 보면 이미 죽은 다음이어서 보복폭행으로 판단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많은 관객들은 무죄를 호소하는 피고인과 배심들의 결정을 무시한 재판부를 비난한다. 정당방위를 인정하지 않은 재판부는 나쁘게 보면 국가의 편이고, 좋게 봐도 엘리트주의에 빠진 법률기계일 뿐이다. 영화 얘기는 여기까지다.

현실은 영화보다 참혹하다. 고등학교 1학년인 ㄱ군은 지난 4월 1일 두 살 위의 형을 식칼로 찔러 숨지게 했다. ㄱ군의 형은 이날 새벽 술에 취해서 들어와 “너 오늘 나한테 맞아 뒤지는 거야”라고 욕설하며 ㄱ군의 머리와 목을 팔로 감았다. ㄱ군이 살려달라고 하자 두 사람의 아버지가 그 형을 붙잡아 말렸다. 이 사이에 ㄱ군은 부엌에서 식칼을 가져와 형의 가슴을 찔렀고, 형은 숨졌다. 검사는 살인으로 기소했고, 변호인은 국민참여재판을 신청했다.

검사는 배심원들에게 “살인죄가 인정되려면 ‘고의’가 있어야 하는데 ㄱ군에게는 ‘미필적 고의’가 있다”고 했다. 검사는 물론 변호사와 판사가 나서 미필적 고의가 무엇인지 설명했다. 독자들께 당시 재판부가 배심원에게 나눠준 자료를 소개하면 이렇다. ‘살인의 고의란, 자기 행동으로 피해자가 사망할 것이라는 점을 알았으면서도 사망을 실현시키려 행동에 나아갔다는 점이 인정돼야 합니다. 다만, 피해자가 사망할 수도 있다는 점을 예견했으면서도 그 사망의 결과를 용인하면서 행동에 나아갔을 경우에는 ‘미필적 고의’가 인정됩니다(유죄). 만일 피해자가 사망할 수도 있다는 점을 예견하지 못했을 경우에는 고의가 부정되어 무죄를 선고해야 합니다.’

배심원들은 만장일치로 무죄로 결론냈다. 고심 끝에 재판부는 무죄를 선고했다. 무죄를 받아든 검찰은 당장 법원을 비난했고, 국민참여재판제도까지 비난했다. 춘천지검은 “범죄행위가 명백한 사건임에도 재판부가 직권 판단하지 않고 배심원 평결을 존중해 무죄를 선고한 것은 이해할 수 없다. 배심원은 법률 전문가가 아니므로 평결에 오류가 없도록 충분히 설명할 필요가 있고, 오류가 났다면 재판부가 바로잡아야 한다”고 밝혔다. 과거 같으면 재판부를 비난하고 끝났을 일이, 배심원인 국민에 대한 비난으로 이어졌다. 법은 전문가의 것이라는 선언이었다.

검찰의 이 같은 발언은 자신들의 과오를 감추려는 포석도 들어 있다. 교과서대로라면 살인이 무죄가 날 것에 대비해 ‘살인이 무죄라면 상해치사를 적용해달라’며 예비기소를 한다. 그러나 이 사건에서는 상해치사로 예비기소를 하지 않았다. “검사들은 예비적 기소를 하면 자신이 없는 것 아니냐는 얘기를 들을까봐 어지간해서는 하지 않는다”고 법조계 관계자들은 설명한다. 특히 일반인이 참가하는 국민참여재판의 경우 예비기소를 더욱 하지 않는다.

그런데 <주간경향> 취재 결과 당시 재판부도 배심의 무죄 권고에 상당히 당황했다고 한다. 법원 관계자는 “이 사건에서 미필적 고의가 있다고 보는 것은 검사뿐 아니라 대부분 법조인의 시각이다. 배심원이 무죄를, 그것도 전원일치로 내면서 재판부에서 꽤 놀란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재판부는 배심의 의견을 따를 것인지를 두고 숙고했다. 따르자니, 미필적 고의에 대한 다른 사건과의 균형이 문제였다. 다른 사건이라면 유죄가 나올 가능성이 큰데, 이 사건만 무죄로 하면 형평성에 맞지 않아서다. 그렇다고 거부하자니, 국민참여재판의 취지를 무시하는 셈이 됐다. 판사들의 마음에 맞는 결론만 받아들인다면 그야말로 국민을 들러리 세우는 꼴이나 다름없었다.

형을 살해한 동생의 ‘미필적 고의’ 논란
법조계 관계자는 “배심들의 뜻을 존중할 것인지도 문제였지만, 근본적으로는 미필적 고의의 범위에 대해 시민의 감각을 받아들여 새롭게 정해야 하지 않냐는 논의가 있었다”고 말했다. 미필적 고의라는 어려운 용어도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서 생겨난 개념이지, 하늘에서 떨어진 법조인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재판부는 “피고인이 급소를 찌르고자 가슴부위를 찌른 것이 아니라, 어떤 신체부위를 찌르는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다만 부친의 몸을 피해 망인을 찔렀는데, 그 찌른 부위가 우연히 급소였던 것”이라고 밝혔다.

배심제로 알려진 국민참여재판은 2008년 시작돼 올해로 7년째가 됐다. 노무현 정부 당시 사법 불신을 해소하기 위해 도입됐다. 대법원 관계자는 “판사 출신 변호사들이 쉽게 무죄를 받거나 양형을 깎는다는 이른바 전관예우 논란 등을 없애고, 재판에 대한 시민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도입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배심원 자격은 만 20세 이상 국민이고, 관할구역 내에 거주하는 사람 가운데 무작위로 뽑는다. 유·무죄에 대한 평결은 만장일치가 원칙이지만, 어려울 경우 다수결로도 할 수 있다. 다만 배심의 결정을 판사들이 꼭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다.

최근에는 조희연 서울시 교육감의 선거법 위반을 비롯해 정치적인 사건이 국민참여재판에 부쳐지면서 유·불리에 따라 이 제도에 대한 비난과 옹호가 엇갈리고 있다. 헌법재판소 이황희 연구관은 참여재판에 관해 이렇게 설명했다. “사법은 다수의 판단으로 하는 게 아니라 옳고 그른지를 가리는 과정이다. 적어도 법률에 대해서는 훈련받은 전문가들이 하는 게 나을 수 있다. 아테네의 500인 법정 같은 것을 제외하면 오랫동안 사법절차는 엘리트들이 해왔다. 배심제는 사실인정에 관한 문제가 주요한 부분이다. 재판은 사실인정과 법률적용으로 나뉘는데, 소년등과한 새파란 법률가들이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가리는 데 더 낫다고 보기는 어려운 것 아니냐. 사실인정은 보편적인 것이다. 훈련받지 않았더라도 더 많은 사람들이 하는 것이 낫다는 믿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사실인정은 보편적인 것” vs “예측가능성 낮아져”
하지만 다른 의견도 만만치 않다. 한 법원 관계자는 “사실인정과 법률적용이 반드시 나뉘는 것이 아니다. 미필적 고의라는 것도 어떤 면에서는 법률적용이지만 어떤 상황에서 칼이 어디로 어느 만큼 들어갔는지 따지고 드는데, 사실인정이 아니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평생 한 번 재판을 하는 배심원들이 개별 사건에서 각각의 판단을 내린다면 재판은 예측 가능성이 낮아지면서 범죄가 무엇이고 법률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상태가 될 수도 있다”고 말한다.

형제 살인사건에서 무죄를 선고한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법의 민주적 정당성과 신뢰를 높이기 위해 도입된 국민참여재판으로 진행된 형사 공판절차에서, 양식 있는 시민으로 구성된 배심원이 사실의 인정에 관해 재판부에 제시하는 집단적 의견은 이유 및 결과가 명백히 오판이거나 현저히 부당하다고 인정되지 않는 한 존중돼야 한다.” 여기에는 두 가지 딜레마가 있다. 다수결을 견제하는 장치인 사법이 다수결 논리의 다른 표현인 민주적 정당성을 따라야 하는지. 현저히 부당하지 않은 이상 존중하겠다는 것은 다소간 부당한 것은 눈감겠다는 것인지.

영화 <소수의견>으로 돌아와보자. 만약 철거민의 정당방위가 인정돼 무죄가 선고될 경우, 아들을 죽인 경찰도 사실은 숨진 동료 경찰을 구하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마찬가지로 무죄다. 두 사건 모두 보복폭행이거나 모두 정당방위여야 맞기 때문이다. 이렇게 경찰도 무죄를 받으면 국가의 위법성이 없어지면서 100원 배상 책임도 사라진다. 이런 면에서 보면 법률 전문가인 재판부가 배심의 권고와 달리 유죄를 선고한 것은 국가의 책임을 인정하게 하려는 고도의 의도라는 해석이 많다.

참고로, 영화에서는 철거민이 유죄이면서, 국가 상대 손해배상도 패소한다. 여러 법조인들은 “법리상 이런 결론은 이상하다. 철거민 아버지가 유죄인 만큼 국가 상대 민사소송은 승소해야 맞다”고 했다. 최고 수준의 리얼리티를 보여주는 이 영화가 어색한 결론을 낸 것은, 작품이 겨냥한 것이 현실 사법부의 부조리가 아니라 국가의 근원적 폭력이기 때문이다.

<이범준 기자 seirots@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