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속으로‘ 엄지원

"보는 것만으로도 내 가슴을 아리게 만드는 꽃인데 뭐라카는지는 모르겠고 내가 그 꽃을 좋아하는 이유는 항상 촉촉하게 이슬이 맺혀 있는 거 같거든. 아, 저 있네."

이 드라마에서 그가 사랑하는 남자는 모델 출신 연기자인 김민준. 그의 키가 워낙 커서 브라운관에 비치는 엄지원의 키는 상대적으로 작아 보이지만 그의 키는 170㎝. 여성으로서는 꽤 큰 축에 속한다. 갸녀린 몸매 탓일까. 희고 갸름한 얼굴에 또렷한 이목구비가 어우러져 그를 보면 '청초하다'는 말이 떠오른다. 또박또박 자신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풀어내는 이야기 솜씨도 인상적이다.

그가 '오정희'로 산 것은 지난해 12월부터. 유철용 PD가 엄지원에게 주문한 것은 '신비로운 여성의 이미지'였다고 한다. 유 PD는 지난해 7월 개봉한 곽경택 감독의 [똥개] 속 엄지원의 모습에서 그런 이미지를 '발견'했다고 한다.

그 영화에서 엄지원은 언젠가 서울 압구정동 로데오거리에서 커피전문점을 차리는 게 꿈인 '정애'로 출연했다. 경상도 사투리를 걸쭉하게 쓰고, 스쿠터를 몰고 다니는 날라리 아가씨다. 조금 모자란 듯한 백수건달 '철민'(정우성)의 집에 얹혀 살며 은근한 해바라기 사랑을 한다. 그런 그에게서 신비감을 엿봤다는 유 PD의 말에 엄지원 자신조차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똥개]의 정애는 되바라진 아이였는데도 감독님은 분명히 제 얼굴에 잠재된 또다른 모습을 보셨대요. 사실 배우는 작품과 맡은 역할에 따라 내면에 잠재된 또다른 얼굴과 모습을 하나씩 끄집어내서 매번 새롭게 태어나야 하잖아요. [폭풍 속으로]에서는 제 안의 여성적 모습을 최대한 끌어내자고 맘먹었죠. 하지만 정희를 표현하는 게 생각만큼 쉽지 않았어요. 신비하다, 묘하다는 게 꽤 추상적인 말이잖아요. 고민하다가 눈빛으로 승부하자고 결심했어요."

"저뿐만 아니라 많은 연기자들이 그래요. 아픈 역을 맡으면 연기를 하지 않는 상황에서도 몸 여기저기가 아프다고요. 악독한 역을 연기하는 연기자는 평상시에도 눈에 독기가 번뜩이고 늘 예민해 있는 경우가 많잖아요. 이 드라마는 현장에서 쪽지 대본을 받는 경우가 허다한데도 불구하고 어렵지 않게 감정몰입을 할 수 있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에요. 대본에 써 있는 몇 줄의 상황설명과 대사만으로도 진짜 정희 마음이 되어 눈물이 울컥 쏟아지거든요."

드라마는 5월 30일 종영된다. 하지만 쉴틈이 없다. 올 가을 개봉을 목표로 5월 말 촬영이 시작되는 스릴러풍 멜로영화 [주홍글씨](감독 변혁-제작 LJ필름)에 주인공으로 캐스팅됐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그는 한석규의 아내 '한수현' 역할을 맡는다. 남편과 불륜관계를 맺고 있는 절친한 친구 가희(이은주)와 기묘한 삼각관계를 이루고 있다. 이 영화에는 성현아도 출연한다.

변혁 감독은 '사람은 누구나 마음속에 충동적이면서 악마적인 욕망이 있다. 화창한 날씨에 문득 자살하고 싶다거나 겉은 평화로운데 누군가를 살해하고 싶은 욕망을 느끼거나. [주홍글씨]는 바로 그런 영화다'라고 설명했다. 엄지원은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나름대로 또다른 해석을 했다.

"이 영화는 각 인물의 사랑의 키(Key)를 다룬 동시에,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등장인물들 저마다의 가슴에 새겨진 주홍글씨를 그린 작품이에요. 제가 연기할 '수현'이라는 인물은 굉장히 사랑스럽고 여성스러운 첼리스트예요. 남편과 친구의 불륜을 아는 듯 모르는 듯, 미묘하고 심도 있는 내면연기를 요구하는 캐릭터죠."

대구 토박이인 그가 연예계와 인연을 맺은 것은 대구 경북대 지리학과 1학년 재학 시절. 당시 서울에서 대학 다니던 언니에게 놀러와 압구정동 로데오거리를 거닐다가 패션지 기자의 눈에 띄어 '길거리 캐스팅'이 됐다.

"거리에서 찍힌 제 사진을 보고 연예인 매니저들이 그 잡지를 통해 절 수소문했나봐요. 하지만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연예활동을 한 것은 아니에요. 한동안은 재미로 아르바이트 삼아 대구와 서울을 오가며 일했어요."

그가 1998년부터 대구방송 리포터로 활동했다는 일부 언론의 보도는 오보라고 한다. 당시 방송리포터로 합격한 것은 맞지만 활동한 적은 없다고 바로 잡아준다. 그의 데뷔작은 98년 MBC 시트콤 [아니 벌써]. 이후 SBS 시트콤 [순풍산부인과]를 거쳐 MBC 주간 시트콤 [세친구]에도 잠깐 출연했다. 영화 데뷔작은 김기훈 감독의 공포영화 [찍히면 죽는다]. 이 영화에서 그는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쇼 프로그램으로 주가를 올리기도 했다. 99년 MBC 미팅프로그램 [사랑의 스튜디오]의 인기코너였던 '러브러브 쉐이크'의 MC, 이듬해에는 KBS [좋은 친구들]의 '모여라2000'의 MC 등 각 방송사의 코너 진행자로 인지도를 높였다.

그러나 연예인으로서의 그간의 삶이 그리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구설이 적잖았고, 지난해 6월에는 소속사와의 분쟁에 휘말려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이로 인한 맘고생은 말해 뭣하랴. 그는 "배우라는 직업을 사랑하지만 대한민국에서 여자 연예인로 살아가는 것은 정말 힘들다"고 토로했다.

그의 나이 올해 만 스물일곱. 열일곱 문근영이 '어린신부'로 스타덤에 올랐고 갓 스물의 후배들이 속속 데뷔하는 연예계에서 만만치 않은 나이다. 하지만 그의 대답은 당차다. 그는 "나이는 일종의 선입견에 불과하고 특히 배우에게 나이는 불필요한 장신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제가 이제 아이돌 스타로 주목받기는 어렵겠지요. 하지만 둘러보면 서른 살 넘어 정상의 배우로 등극한 경우가 적지 않잖아요. 전성기를 구가하는 장진영씨가 그렇고, 이미연 선배도 데뷔는 일찍 했지만 연기력은 뒤늦게 인정받았죠. 연기는 해도 해도 항상 모자람을 느끼는 작업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마음으로 나이에 연연하지 않고 분발할 거예요."

그는 10년 후엔 지금과 다른 위치에 자신이 서 있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단순히 톱스타의 위치를 얘기하는 게 아니었다. 대중은 물론 자기 자신도 인정할 만한 '진짜 연기자'로서 자리매김하겠다는 포부다. 한순간 빛나다가 스러지는 '반짝스타'가 만연한 연예계에서 멀고 길게 10년 후를 내다보며 인생을 설계하는 엄지원. 그의 청초한 얼굴 위로 '똑순이'의 또다른 얼굴이 겹쳐졌다.

<글 박주연 기자 jypark@kyunghyang.com·사진 김석구 기자 sgkim@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