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탁이 만난 사람]“남쪽정권 5년마다 바뀌어야 통일에 도움”

옥수수 박사 김순권

"옥수수 씨앗 하나로 남북 통일과 세계 평화의 꿈을 가꾼다.” 국제옥수수재단 이사장이자 경북대 석좌교수인 김순권 박사(64)의 남다른 인생을 얘기할 때 하는 말이다.

그의 꿈은 원대하지만 길은 외길이다. 옥수수로 시작해 옥수수로 끝난다. 북한 동포들을 먹여 살리는 일, 남북 교류의 문호를 넓히는 일, 지구환경을 보호하는 일까지 질 좋은 옥수수 하나로 해결된다는 믿음이다. 실제 그는 17년 동안 나이지리아에 있으면서 아프리카에 맞는 옥수수를 개발해 아프리카 기아문제 해결에 크게 공헌했다. 그 공로로 노벨평화상 및 생리의학상 후보에 여러 차례 올랐으니 옥수수로 세계 평화를 이룬다는 꿈의 절반쯤은 이미 이룬 셈이다.

남북통일에 기여한다는 꿈은 언제쯤 가시화될 수 있을까. 남북관계는 작은 정치 변수 하나에도 심하게 일그러지고 요동치는 특성이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야말로 예측불허다. 그래도 김 박사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늦어도 20년 뒤면 통일이 될 것”이라는 게 그의 관측이다.

물론 이는 그의 느낌에 불과하다. 다만 그가 1998년부터 지금까지 북한을 가장 많이 방문한 사람 가운데 한 명이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는 있다. 북한 내에 그가 지휘하는 옥수수 농장이 여러 곳 있어 연구실 드나들 듯 해온 것이다. 한 번 갈 때마다 농장을 둘러보는 데 1, 2주일은 걸리기 때문에 지금까지 북한에 머문 날을 합하면 1년도 넘는다는 계산이 나온다.

김 박사는 9월 12일께 다시 방북길에 오른다. 지난 5월에 이어 올들어 세 번째, 통산 51번째다. 김 박사에게는 새삼스러울 게 없는 방북이지만 남북관계가 나아질 기미를 보이는 시점이라는 데 눈길이 쏠린다. 김대중 전 대통령 장례식에 북한이 조문단을 파견한 것을 계기로 남북 당국 간 분위기가 달라지고 있는 것이다.

이번주 ‘이종탁이 만난 사람’이 김 박사를 찾아간 것은 이런 기회에 옥수수로 남북통일의 꿈을 이루겠다는 그의 꿈 이야기를 들어보기 위해서다. 인터뷰는 지난 25일 경기 안성의 농협농장 옥수수밭에서 있었으며, 모자란 이야기는 서울로 올라오는 자동차 안에서 이어갔다.

약속된 시간 옥수수밭에 갔을 때 김 박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한 남자(알고 보니 동티모르에서 온 유학생이었다)에게 “옥수수 박사님을 만나뵈러 왔다”고 하자 옥수수 덤불 사이로 들어가 김 박사를 불러내 줬다. 장대처럼 솟은 옥수숫대를 밀치고 나온 김 박사는 수건을 머리에 두르고 그 위에 모자를 얹어 쓴 전형적인 농부 모습이었다.

여기서 무얼 하시는 겁니까.
“여기가 농협 소유의 농장인데 이곳 땅 1000평을 빌려 경기지역에 맞는 옥수수를 개발해 보려고 시험 재배하고 있습니다. 미국산 종자 1종, 농진청 것 7종, 내가 연구한 1000종을 비교 파종했어요. 오늘은 그동안 어떤 녀석이 얼마나 잘 자랐나 살펴서 표시하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종자별로 차이가 많이 납니까.
“그럼요. (노란 옥수수를 보여주며)이게 미국산인데 거의 다 벌레 먹고 병에 걸렸잖아요. 우리 땅에서 잘 자랄 수 없다는 뜻입니다. 내가 뿌린 1000종 가운데에서도 어떤 것은 키가 크고 알이 굵지만 어떤 것은 잘게 나타납니다.”

실한 놈을 찾아내면 그게 새로운 슈퍼옥수수가 되는 건가요.
“그렇지요. 예컨대 ‘안성슈퍼1호’ 하는 식으로 이름을 붙여야지요.”

그동안 개발한 슈퍼옥수수를 그냥 심으면 안됩니까? 여기 농진청 종자로 심은 ‘수원 19호’는 1976년 김 박사님이 농진청 재직 때 개발한 것으로 북한에서도 좋은 성과를 내지 않았습니까.
“옥수수는 날씨에 예민합니다. 그 지역의 기후조건에 맞는 품종이어야 해요. 같은 지역이라 해도 기후가 자꾸 달라지기 때문에 새로운 품종을 계속 개발해 줘야 합니다.”

그래서 그의 옥수수 연구는 끝이 없다. 남한 내에서도 경상도와 경기도 지역 품종이 달라야 하니 북한과 그가 지원하는 동남아 각국의 옥수수를 개발하려면 시간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 환갑을 넘긴 나이임에도 옥수수밭에서 일할 때 손길은 여느 젊은이보다 힘있고 민첩하다. 바쁘게 움직이는 습관이 몸에 밴 것이다.

이번에 또 북한 가신다면서요. 특별한 목적이 있습니까.
“지금까지와 별반 다를 게 없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북한에 3만5000종의 옥수수를 심었습니다. 여기서 좋은 품종 17종을 골랐고, 10종을 우선 보급 중에 있습니다. 이게 잘 크고 있나 현장을 보러 가는 것이지요.”

북한 기후는 옥수수가 자라는 데 적합하지 않습니까.
“그렇죠. 북한은 옥수수 재배에 천혜의 자연조건을 지니고 있습니다. 미국의 콘 벨트(옥수수 지대)와 같은 위도(북위 35~42도)에 자리한 데다 밤낮의 기온 차가 크고, 경사지가 많아 물빠짐이 좋습니다. 옥수수 종자 생산 기지로도 훌륭합니다. 옥수수 꽃가루는 400~1000m를 날아가기 때문에 평야지대에선 이곳 저곳으로 꽃가루가 날아들어 한 군데 섞입니다. 그러면 종자 연구가 안 되죠. 그러나 북한은 그런 꽃가루가 날아드는 것을 산이 차단시켜 주니 이 문제 또한 없습니다. 옥수수야말로 북한 최고의 식물인 셈이지요.”

잘만 하면 옥수수가 북한 경제에 큰 도움이 되겠군요.
“연간 몇천억원은 더 벌 수 있다고 봅니다.”

“북한에 옥수수 심기를 처음 시작할 때 그쪽 사람들에게 제가 그랬어요. 제 꿈이 옥수수밭에서 일하다가 누군가 ‘통일 됐어요’라고 외치는 목소리를 듣는 것이라고요. 현실인식이 조금 달라지긴 했지만 그 꿈을 버릴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못하는 이유는 뭔가요.
“북한은 식량보다 사상을 중시하는 나라입니다. 아무래도 남북관계가 풀려야 할 것입니다.”

그래도 이제 11년째인데 성과가 있지 않습니까.
“처음 시작할 때 비하면 크게 나아졌지만 3년 동안 공백이 있는 바람에 생각만큼 진전을 보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3년 공백’은 북한이 김 박사의 정치행보를 문제삼아 2003년부터 2005년까지 방북을 불허한 것을 말한다. 이 기간에 김 박사의 방북 길이 막히면서 남북 옥수수 공동연구가 중단된 것이다. “그때는 그동안 진행해 온 연구가 막 빛을 발하는 결정적 시기였기에 두고 두고 아쉬움으로 남는다”는 게 김 박사의 말이다. 그렇다면 북한은 왜 그처럼 중요한 시기에 김 박사를 거부했을까. 문제는 옥수수가 아니라 정치였다.

2002년 12월 대선을 앞두고 김 박사는 돌연 ‘이회창 후보 지지선언’을 한다. “법과 질서가 바로 서는 나라를 위해”라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속내는 다른 데 있었다.

“당시 김대중 정권과 가까운 단체가 옥수수재단에 갚아야 할 돈 3억원을 갚지 않아 감정이 무척 나빴습니다. 돈 문제는 나중에 재판을 통해 해결했지만 당시에는 민주당을 혼내줘야겠다는 보복심리가 있었습니다. 여기에 이회창 정권이 들어서면 1997년 대선에서 제가 김대중 후보를 지지한 데 따른 보복을 당하지 않을까 겁이 났습니다. 지금의 이명박 대통령 형인 이상득 의원이 이런 저런 말로 권유하는데 제가 그만 넘어갔죠.”

다분히 감정적인 이 선언은 그의 치명적인 실수가 됐다. 대선 결과는 그의 예상과 달리 노무현 후보의 승리였고, 그의 부적절한 정치행보에 대해 안팎의 비난이 쏟아졌다. 그는 국제옥수수재단 이사장직을 한때 사퇴하고 반성하는 기자회견도 가졌으나 북한은 그의 충격적인 변신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몇차례 방북이 거부되자 그는 마지막 수단을 꺼내들었다.

“2003년 말 중국 베이징에서 단식에 들어갔어요. 내가 잘못한 것도 있고, 무엇보다 북한에 심어 놓은 옥수수가 눈에 밟혀 가보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심정이었습니다. 닷새가 지났을 때 북한 관계자가 와서 ‘북한에 가게 해 줄테니 제발 이제 그만 하라’고 해 단식을 풀었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도 초청장을 안 보내주는 거예요. 어쩔 수 없이 동남아로 눈을 돌렸습니다.”

국제옥수수재단이 동티모르, 캄보디아, 미얀마, 라오스, 네팔과 같은 나라에 옥수수 지원을 하게 된 배경이다. 북한에서 김 박사에게 초청장을 보낸 것은 3년이란 시간이 지나서였다.

다시 받게 된 계기가 있었습니까.
“아무래도 북한 입장에서 아쉬웠겠죠. 옥수수 재배가 쉬운 것 같지만 품질 좋은 것을 잘 키우려면 어렵습니다. 그동안 제가 북한에 가지 않아도 우리 재단이 북한쪽과 연락은 계속 취하고 있었으니까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가능한 일이었어요.”

오랜만에 가보니 어떻든가요.
“여러가지로 엉망이 됐어요. 원래 북한에는 저와 같이 연구하는 팀이 200명쯤 있었거든요. 이들이 옥수수 연구를 잘했다고 진급도 하고 아파트도 받자 반대쪽에서 시샘을 한 거예요. 그러던 차에 제가 이회창을 지지했다고 하니까 반대쪽에서 ‘그것 봐라’하며 우리 팀을 공격해 내부 싸움이 일어났어요. 그래서 그동안 연구해온 종자를 일부러 심지 않았더군요. 그로 인해 북한이 입은 경제적 손실을 계산하면 3000억원쯤 될 거예요.

실망이 컸겠군요.
“종전 수준으로 복구하는 데만도 시간이 꽤 걸렸습니다. 북한 사람들 태도도 달라졌더라고요. 전에는 내 말이라면 무조건 따랐는데 잘 안 듣는 거예요. 그래서 ‘이런 식으로 하려면 때려치워라’고 호통을 치기도 했습니다.”

북한에 대한 생각도 좀 변했을 것 같은데요.
“전에는 북한 동포를 위해 죽을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후 그럴 가치가 있나 의문형으로 바뀌었습니다. 북한 사람들을 만나서도 이런 얘기 저는 합니다. 북한 체제 비판은 하지 않지만 핵 실험이나 금강산 총격사건 같은 문제는 사과하라고 얘기합니다. 남북 모두 정도를 걸어야지요.”

통일에 대한 꿈도 달라졌나요.
“북한에 옥수수 심기를 처음 시작할 때 그쪽 사람들에게 제가 그랬어요. 제 꿈이 옥수수밭에서 일하다가 누군가 ‘통일 됐어요’라고 외치는 목소리를 듣는 것이라고요. 현실 인식이 조금 달라지긴 했지만 그 꿈을 버릴 수는 없습니다. 제가 지난해 중국에 닥터 콘이라는 회사를 만들었어요. 여기서 돈 많이 벌어 북한에 공항을 지어주는 또다른 꿈을 가졌습니다.”

가까운 시일 내에 통일이 가능하다고 보는 건가요.
“10~20년이면 된다고 봅니다. 통일을 위해서는 남쪽 정권이 5년마다 교체되는 게 좋습니다.”

그건 왜 그런가요.
“남쪽에선 국민의 선택에 따라 정권이 바뀐다는 것을 그들에게 분명히 인식시켜 줘야 합니다. 북한에선 그런 일이 없기 때문에 그들은 남쪽의 정권 교체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적응하지도 못합니다. 그 바람에 남쪽을 향해 불필요한 힘을 과시하는 경향이 있다고 봅니다.”

지금도 북한의 식량난은 여전하다는데 북한 정부로부터 전권을 부여받는다면 식량난 해결을 할 자신이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2년 안에 식량자급을 가능하게 할 수 있습니다. 농약을 쓰지 않고 수확을 많이 하는 세계 최고 모델을 만들 자신이 있습니다.”

남한은 어떤가요.
“남쪽도 옥수수를 많이 심어야 합니다. 지금 벼를 심는 그 자리에 벼 대신 옥수수를 심자는 뜻이지요. 그래야 농업경쟁력이 살아납니다. 우리는 지금 세계에서 옥수수를 두 번째로 많이 수입하는 나라예요. 옥수수 자급률이 1%밖에 안 돼요. 이를 20~30%로 올리면 농업도 살고 축산도 살 수 있습니다. 사료 대부분이 옥수수 줄기와 잎에서 나오는데 우리는 아까운 그 줄기를 미국 축산가구에 다 주고 알맹이로 만든 사료만 수입해 쓰는 셈이거든요. 그러니 축산업 경쟁력이 없죠.”

수입해 쓰는 게 더 싸기 때문 아닌가요.
“당장은 그렇죠. 하지만 옥수수의 쓰임새가 갈수록 커진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어요. 공업용, 사료용은 물론 바이오에너지로도 쓰이잖아요. 미국에선 옥수수로 만들어내는 상품이 2만5000여 가지에 이릅니다. 인공위성을 쏘아올리는 피스톤에도 옥수수 속심에서 나온 성분이 이용될 정도거든요. 옥수수는 메탄가스도 흡수하고 축산폐수를 정화하는 작용도 합니다. 녹색성장이 따로 없어요.”

이제 그의 삶을 돌아볼 차례다. 그는 초등학교 교과서에 소개돼 있는 만큼 웬만한 이력은 다시 언급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김 박사 같은 세계적 석학도 학창시절에 입시에서 세 번이나 낙방했다는 사실은 그리 알려져 있지 않다.

첫 번째는 울산에서 중학교를 나와 부산상고를 지원했다가 떨어진 것이고, 두 번째는 울산농고 졸업 후 농협 입사시험에서 낙방한 것, 세 번째는 경북대 농대를 졸업하고 서울대 대학원 시험을 치렀다가 떨어진 것이다. 원하던 대학원에 입학하지 못해 농진청에 들어가게 됐고, 거기서 처음 배치받은 부서가 당시 잘나가던 벼(禾)과가 아니라 옥수수과였다. 훗날 옥수수 박사의 탄생은 그렇게 시작됐다.

“학교 때 세 차례 시험에 실패한 게 나에게 보약이 됐습니다. 남들보다 더 열심히 하지 않으면 결코 경쟁에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후 어디를 가든 가장 먼저 일어나고 가장 늦게 잔다는 생각으로 일했습니다.”

이종탁이 만난 사람

옥수수 박사의 기술을 따라갈 수는 없지만 삶의 태도는 배워야 할 대목이다.

<글·이종탁 출판국 기획위원 jtlee@kyunghyang.com>
<사진·김석구 기자 sgkim@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