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1조원 출연’ 사회공헌 발진

현대기아차그룹 사회공헌위원회 출범… 문화공연시설 건립 및 운영 계획

비자금을 조성해 수백억 원의 회삿돈을 횡령한 혐의 등으로 기소돼 1심에서 실형을 선고받은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이 지난 6일 항소심 선고 공판에서 집행유예가 선고된 뒤 밝은 표정으로 서울 서초동 고등법원 청사를 나서고 있다. <김문석 기자>

‘10억 달러짜리 자유’ ‘사법부, 부패 척결 의지 의문’.
이 문구들은 지난 9월 6일 정몽구 현대기아차그룹 회장의 서울고법 판결을 전하는 파이낸셜타임스, 월스트리트저널, 로이터 통신 등 외신들의 기사 타이틀이다. 특히 파이낸셜타임스는 12일 “한국 법원은 재벌들이 안 보이는 데서 어떤 일을 하건 경영을 계속하게 도와주는 것이 국익에 맞는다고 믿는 것 같다”고 맹비난했다.

지난 9월 6일 경제계는 물론이고 온 국민의 관심이 쏠린 가운데 서울고등법원 형사10부의 판사들은(재판장 이재홍, 이상원· 호제훈) 약 1000억 원의 비자금을 조성하고 그중 700억 원을 사용한 횡령 혐의, 부실 계열사인 현대우주항공에 다른 계열사가 지원하게끔 해 약 1600억 원의 손실을 끼치는 등 현대그룹의 각 계열사에 수천 억 원대의 손해를 끼친 배임 혐의 등으로 기소된 현대기아차그룹 정몽구 회장에게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 사회봉사명령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원 또는 다른 경제인을 대상으로 준법경영을 주제로 합계 2시간 이상 강연할 것 ▲ 국내 일간지와 경제 전문 잡지에 준법경영을 주제로 각 1회 이상씩 기고할 것 ▲ 피고인이 이 법정에서 공표한 사회공헌 약속을 성실히 이행할 것 등의 사회봉사를 명했다.

계동사옥에 사무실 마련, 10월 말 발차

대법원 예규에도 없는 이 독특한 판정이 알려지자 여론은 들끓었다. 정 회장에게 선고한 강연과 언론기고 활동이 실형 선고를 대체할 만한 사회봉사활동이라고 전혀 볼 수 없을 뿐 아니라 사회공헌기금 출연을 대가로 실형을 면제해주었다는 점에서 ‘돈으로 사법정의를 사고 판 재판’이라는 비판이 거세게 일었다.

“재벌들에 대한 잇단 봐주기 판결로, 사법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스스로 무너뜨렸다”(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재벌 총수의 비리에 대해 다시 한 번 면죄부를 준 것으로, 사법 정의를 훼손하는 조치”(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재벌 총수가 아니면 누릴 수 없는 특혜”(참여연대) 등 시민사회단체의 비판 성명도 쏟아졌다.

그러나 당사자인 현대기아차그룹 측은 뒤돌아 웃는 분위기다. 지난해 3월 말 검찰이 현대차에 대해 전격 압수수색을 벌이면서 촉발한 ‘현대차 비자금 사태’가 약 1년 6개월 만에 사실상 종결된 것으로, 노사 간의 무파업 타결 등과 함께 기업의 앞길이 평탄해졌기 때문이다.

현대기아차그룹 측은 판결을 기다렸다는 듯 사회공헌위원회 활동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지난달 17일, 사회공헌 기금을 운용할 ‘사회공헌위원회’(가칭)의 위원 인선 작업을 마무리했고, 10월 22일 공식 출범한다는 계획.

위원회에는 경제계 이희범 무역협회장, 학계 어윤대 한국 국제경영학회 고문, 문화계 신수정 전 서울대 음대 학장, 법조계 손지열 전 대법원 대법관, 언론 및 정관계 최준명 한국신문협회 이사, 종교시민사회분야 박원순 아름다운 재단 이사장과 유홍종 현대기아차그룹 사회봉사단장 등이 포함됐다. 7인의 위원은 사회공헌 관련 제반 업무를 총괄하며, 구체적인 사업 목표를 결정해 올 12월께 사업계획을 발표할 수 있도록 업무를 추진할 계획이다. 위원회는 출연기금이 목적을 벗어나 사용되지 않도록 감시할 의무도 있다. 현대차 측 홍보실 관계자는 “현재 서울 종로구 계동 사옥에 330㎡(100평) 규모로 사회공헌위 사무국을 설치하고 있다”며 “이달 22일 현판식을 하고 공식 출범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현대차 측에 따르면 이번에 출연하는 사회공헌기금은 저소득층을 포함한 국민의 문화 혜택을 위해 공연시설 및 지역별 복합문화센터의 부지를 마련하는 건립 비용과 운영비 등으로 쓰인다. 구체적으로는 ▲ 서울시에 1500~2000석 규모의 오페라하우스 및 콘서트홀 등 공연시설 건립 ▲ 전국 광역시 및 도청 소재지에 1개씩 복합문화센터 건립 ▲ 환경친화적이고 지구온난화를 예방할 수 있는 환경보전사업 지원이다.

당초 정몽구 회장은 공판 과정에서 “사회에 기여할 기회를 달라”며 “7년에 걸쳐 1200억 원씩 8400억 원을 출연하겠다”고 밝혔으나 재판부가 2013년으로 기간을 5년으로 하는 바람에 당혹해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현재까지 600억 원을 냈고 올해 말이나 내년에 600억 원을 출연한다는 계획.

하지만 2009년부터 5년간 나머지 7200억 원을 어떻게 출연할지는 공개하지 않고 있다. 검찰 수사가 한창이던 지난해 4월 현대차그룹은 ‘대국민 사과 및 사회공헌 방안’을 발표하면서 정 회장과 아들인 정의선 기아차 사장이 보유한 글로비스 주식 2250만 주를 포함해 1조 원을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밝혔다. 당시 글로비스 주식을 거론한 이유는 이 회사가 비자금 조성 등 검찰이 적발한 불법행위의 근원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판결 이후 현대차 측은 글로비스 주식 처분 계획에 대해 함구하는 모양새다. 물류회사인 글로비스는 정의선 기아차 사장에게는 경영권 승계의 기반이기 때문에 주식을 매각한다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게 재계의 판단이기도 하다. 한편 증권가에 따르면 현대 측이 주식 처분을 근거로 1조 원 헌납을 공언할 당시 글로비스 주가는 4만2000원대였으나 최근 주당 주식가치는 5만9000원 선. 정 회장 부자가 보유한 주식가치는 1조3000억 원대로 불어났지만,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자금 규모는 1600억 원이나 줄어든 것이다.

사회공헌 이전 부당이익 환수 주장도

한편 ‘사회공헌’의 경우 정 회장이 실형 선고 여부와 관계없이 이행하겠다고 약속한 부분이기 때문에 부당이익에 대한 벌금과 추징금이 실행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경제개혁연대는 논평을 통해 “정 회장이 기부금액의 재원에 대해서는 명시적으로 밝히지 않았지만, 그 1조 원 규모의 기준이 된 것은 지난해나 지금이나 글로비스 주식으로 인한 부당이득임은 공지의 사실”이라며 “글로비스 주식 및 그에 따른 이득은 정 회장 일가가 현대자동차를 비롯한 주요 계열사의 회사 기회를 유용하여 형성된 것으로, 그룹의 주요 계열사에 반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회 환원은 정 회장 일가의 순수한 사재에서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하태훈 고려대 법학교수도 “정 회장이 받은 사회봉사명령 중 사회에 환원하라는 8400억 원은 불로소득이거나 불법소득이나 마찬가지”라며 “당연히 사회에 환원해도 아까움이 없는 돈으로, 의당 과징금 등으로 추징해야 할 재산”이라고 주장했다.

<조득진 기자 chodj21@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