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현대가 60년 ‘손자의 시대’ 열리다

기아차 정의선 사장은 주춤, 백화점그룹 정지선 회장이 선두

(위 왼쪽부터 시계방향순)정교선 현대백화점 전무·정대선·정의선 기아차 사장·정지이 현대유엔아이 전무·정지선 현대백화점 그룹 회장·정일선 BNG스틸 사장

범 현대가에 3세 경영의 신호탄이 오른 때는 지난해 12월이다. 고 정주영 회장의 셋째 아들인 정몽근 현대백화점 그룹 회장이 장남 정지선(36) 부회장에게 경영권을 물려준 것이다. 당시 정 부회장은 그룹 회장에 취임했고 부친 정몽근 회장은 명예회장으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정지선 회장이 그룹 경영권을 거머쥐면서 창업주인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손자들인 ‘선(宣)’자 돌림의 동향에 관심이 쏠리기 시작했다. 고 정주영 명예회장이 1947년 5월 서울 중구 초동의 보잘 것 없는 자동차 수리공장의 한 귀퉁이에 ‘현대토건사’란 간판을 내건 지 60년 만에 ‘손자의 시대’가 개막된 것이다.

현대H&S 정교선 전무도 주목
‘선’자 돌림 가운데 대표 주자는 맏형이자 종손인 정의선(38) 기아자동차 사장이다. 대표 주자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최근 그는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2006년 현대·기아차그룹의 경영권 승계에 불법 혐의가 확인된 직후 후계자로서 그의 위치와 명예는 큰 손상을 입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는 최근 기아자동차의 대표이사 자리를 김익환 부회장에게 넘겨야 했다. 대내외 영업환경이 녹록지 않은 가운데 경험 있는 최고경영자의 영입이 필요했다는 게 업계의 분석이다.

기아차는 최근 고유가로 인해 국내 레저용 차량 시장이 침체된데다 신차가 적기에 나오지 않아 저조한 실적을 보였다. 2006년 1253억 원의 영업적자를 기록한 데 이어 지난해도 554억 원의 손실을 기록했다. 정 사장은 3년 만에 대표이사 자리에서 물러나 등기이사로 남게 됐다. 대표이사 직에서 물러났지만 후계자로서 위치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니다.

그는 이미 10년 넘게 탄탄한 경영 수업을 받아왔다. 휘문고와 고려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샌프란시스코대에서 MBA 과정을 마쳤다. 일본 이토추상사 뉴욕 지사에서 근무하다 1999년 현대차에 입사한 그는 자재본부 이사와 상무 등을 거쳐 2002년 전무로 승진하면서 최고의 경영수업 코스를 밟았다. 해외 부문을 전담하고 있는 정 사장은 미국에 처음으로 건설 중인 기아차 조지아 주 공장을 초기부터 진두 지휘하고 있고, 유럽 현지 공장인 슬로바키아 공장도 건설부터 완공까지 면밀하게 주도해 경영 능력을 인정받았다.

지난해 12월 현대백화점 그룹의 경영권을 승계한 정지선 회장. 그는 2001년 2월 현대백화점 기획실장으로 회사의 핵심 부문을 장악한 뒤 부사장을 거쳐 2003년부터 부회장이 됐다. 부회장 시절부터 사실상 경영권을 행사해왔기 때문에 그의 회장 취임을 ‘요식 절차의 완성’으로 보는 시각도 있었다.

현대그룹 정지이씨, 모녀간 대물림 이뤄질 듯
현재 현대백화점은 2011년까지 일산·양재·아산·청주지역에 순차적으로 백화점을 진출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 우선 2010년 말까지 일산 대화동의 킨텍스몰에 백화점 입점을 추진하고 있다. 지하 5층 지상 9층에 연면적 16만9190㎡ 규모로 건립되는 킨텍스몰의 복합쇼핑몰에 백화점이 들어서는 것이다. 향후 킨텍스몰에는 백화점뿐 아니라 홈플러스(할인점), 극장 등이 들어선다.

정 회장의 동생 정교선 전무도 주목받고 있는 3세 경영인이다. 정몽근 명예회장은 2006년 8월, 형과 함께 경영수업을 받은 차남 교선씨에게 그룹 계열사인 현대H&S 지분 상당부분을 증여했다. 업계에서는 현대백화점은 정지선 회장에게, 현대H&S는 정교선 전무가 경영하는 방향으로 경영권 승계작업이 마무리된 것으로 보고 있다.

정몽근 현대백화점그룹 명예회장은 1974년 서울 강남권 개발이 시작될 무렵 현대의 백화점 사업을 진두지휘했다. 당시 정주영 명예회장은 중후장대형 사업을 진행하던 현대그룹이 백화점 사업을 하는 것을 마뜩잖게 여겼으나 정몽근 명예회장이 끈질기게 설득했다. 1985년 압구정 본점을 짓던 당시 정주영 명예회장을 찾아가 수차례 사업보고서를 내보이며 설득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고 정주영 회장에겐 ‘비운’의 아들인 넷째 정몽우 현대알루미늄 회장이 있었다. 그는 평소 심한 우울증을 앓다가 40대의 젊은 나이에 자살해 현대가의 아픈 상처로 기록된 인물이다. 몽우씨의 장남 일선(38)씨는 현대자동차 그룹 계열사인 BNG스틸의 사장으로 일하고 있다. BNG스틸은 현대자동차그룹 계열사인 현대제철이 40% 지분을 보유한 상장회사. 바로 아래동생인 문선(35)씨는 BNG스틸에서 해외 부문, 재무 담당 이사를 번갈아 맡았다. 2006년 KBS 아나운서인 노현정씨와 결혼해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막내 대선(31)도 이사 직함을 달고 있으며, 현재 미국에 체류 중이다.

최근 가장 주목받고 있는 현대가 3세는 고 정몽헌 회장의 장녀인 지이(31)씨다. 어머니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을 주요 행사 때마다 측근에서 보좌하고 있는 그녀가 그룹의 승계권자가 될 것이란 설이 파다하다. 지이씨가 승계할 경우 국내 재벌그룹 사상 최초로 모녀 간 대물림이 이뤄진다는 점에서 더욱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2004년 1월 현대상선에 입사해 경영을 배운 그녀는 현재 계열사인 현대유엔아이의 전무로 초고속 승진했다. 입사 후 3년 만에 부사장 바로 밑인 전무까지 승진시킨 데는 후계 구도와 관련이 있다는 분석이 유력하다. 1977년 생인 정 전무는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를 거쳐 연세대 사회과학대학원 신문방송학 석사 과정을 마쳤다. 현대유엔아이는 현대그룹의 계열사인 현대상선·택배·증권 등 그룹 내 전문 IT 서비스를 제공하는 업체. 현재 현 회장이 68%, 정 전무가 9.1%, 현대상선 22% 등 총수 가족이 대부분을 소유하고 있어 사실상 개인회사나 마찬가지다. 그 밖에도 정주영 명예회장의 손주들이 다수 성장하고 있으나 아직 연배가 어려 경영과 관련해 주목을 끌 만한 3세는 없다. 그러나 향후 현대가의 후계 구도가 3세, 4세 등 정씨가의 직계 후손을 중심으로 이뤄질 것이라는 점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한기홍 편집위원 glutton4@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