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그룹 총수 부인상 ‘세대교체’

‘현모양처’형 1세대 지고, 경영 전면 나서는 ‘여걸’ 두각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은 시아버지인 정주영 명예회장과 남편 정몽헌 회장으로 이어진 현대그룹의 대북사업 적통을 잇고 있다. <김창길 기자>

지난 10월5일 정몽구 현대·기아자동차그룹(현대차그룹) 회장의 부인 이정화 여사가 향년 71세로 타계했다. 최근 건강검진에서 담낭암으로 추정되는 병증이 발견되고, 병세가 악화되자 미국에서 치료를 받던 중이었다.

소식이 전해지자 범(汎) 현대가는 “큰 어른을 잃었다”며 깊은 슬픔에 잠겼다. 이 여사는 손위 동서인 이양자씨(고 정몽필씨 부인)가 1991년에 타계한 뒤 현대가의 실질적인 맏며느리 역할을 해 왔다. 재계에서는 “헌신적인 뒷바라지의 현모양처형 총수 부인 세대가 지고 있다”며 그룹 총수 부인들 안에서도 ‘세대교체’가 일어나고 있다는 말이 회자되고 있다.

‘그림자 내조’ 전통적 총수 부인상 지다
서울 숙명여고를 졸업하고 홍익대 미대에 다니던 중 정 회장을 만나 결혼한 이정화 여사는 남편에 대한 ‘조용한 내조’로 재계 안팎에 소문이 나 있었다.

결혼 이후 현대가의 며느리답게 집안 청소며 음식 장만을 손수 하는 등 줄곧 소박한 생활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몽구 회장도 평소 지인들에게 고인의 겸허함과 검소함, 근면함을 높이 평가했다고 한다. 더욱이 정주영 명예회장이 매일 새벽 5시, 온 식구가 아침을 함께하며 근면과 검소를 가르친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고인은 이를 위해 하루도 거르지 않고 새벽 3시 반부터 아침준비를 하며 며느리 역할을 충실히 했다. 특히 2007년 8월에 별세한 시어머니 변중석 여사를 18년 동안 병 수발했다.

가정과 가문을 돌보는 일에 30∼40년 세월을 바친 이 여사가 재계에 이름을 알린 것은 2003년께다. 당시 이 여사는 현대차그룹의 레저 분야 계열사인 해비치리조트의 지분 16%를 확보하며 이사직에 올랐다. 평소 행사에 나타나지 않던 그는 아들 사랑이 남달라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이 경영 일선에 뛰어든 뒤에는 ‘모하비’와 ‘제네시스’ 신차 발표회장에 모습을 내보이며 아들을 격려하기도 했다.

재벌가의 전통적인 ‘현모양처’ 이미지를 벗어던지고 경영 전면에 등장하는 총수 부인이 늘고 있다. 최은영 한진해운 회장, 장영신 애경그룹 회장, 양귀애 대한전선 명예회장, 이어룡 대신증권 회장(왼쪽부터) 등이 대표적이다.

재계에서는 이 여사 타계를 두고 “총수 부인들 세대에서도 조강지처나 현모양처 등 전통적 아내의 상이 지고, 남편의 뒤를 이어 경영 전면에 나서거나 그룹 지분 확보를 통해 영향력을 발휘하는 ‘여걸’ 스타일의 부인들이 나타나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우아하고 품격 있는’ 미술관장직 정도로 만족하던 총수의 부인들이 최근 여성 총수로서 경영에 두각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경영 전면에 나선 그룹 총수 부인들로는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최은영 한진해운 회장, 장영신 애경그룹 회장, 이어룡 대신증권 회장, 양귀애 대한전선 명예회장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남편 대신 그룹 지휘봉을 잡은 공통점이 있다.

이 가운데 활동이 단연 돋보이는 사람은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다. “그녀를 보면 왕 회장이 읽힌다”는 말이 돌 정도이다. 현 회장은 2003년 8월 남편인 정몽헌 회장의 갑작스러운 타계로 그룹 경영을 맡았다. 여성이 경영 전면에 나서는 것을 금기시하다시피 하는 현대가 문화를 깨고 그룹 회장직에 오른 것. 그전까지 현 회장은 걸스카우트연맹 중앙본부 이사, 대한적십자사 여성봉사 특별자문위원 등을 맡긴 했지만 그룹 경영과는 거리가 먼 평범한 1남2녀의 어머니일 뿐이었다.

그러나 현 회장은 시아버지인 정주영 명예회장과 남편 정몽헌 회장으로 이어진 현대그룹의 대북사업 적통을 이어받았다. 취임 초기에 시숙부인 정상영 KCC 명예회장과의 경영권 분쟁을 비롯해 수차례 대북사업 좌초 위기에 처했지만 그때마다 특유의 돌파력으로 위기를 극복했다. 게다가 교착상태에 빠진 민간 교류를 해결하기 위해 직접 북한을 방문하고 김정일 위원장과의 면담을 통해 많은 합의를 이끌어내면서 ‘대북사업의 수장’으로서 인정받고 있다.

현 회장의 아버지는 현대그룹 계열사인 현대상선의 고 현영원 회장이다. 일제 때 ‘호남의 거부’로 이름을 날린 현준호씨의 후손이기도 하다. 어머니는 김용주 전남방직 창업주의 외동딸인 김문희 현 용문학원 이사장으로, 김창성 전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과 김무성 한나라당 의원의 친누나이기도 하다. 이들은 현 회장에게 외삼촌인 셈이다. 현 회장은 그룹 홈페이지에 올린 ‘나의 삶 현대의 길’에서 “기업가 집안의 엄격한 가정교육 속에서 세상의 흐름과 변화에 대한 시각을 조금씩 키워나갔다”고 어린 시절을 회고했다.

남편 사망 후 ‘여 총수’로 경영권 장악
취임 이후 경영실적도 좋다. 취임 첫해에 적자 투성이인 현대그룹을 내실경영으로 5년 연속 흑자로 돌려놨다. 지난해 현대그룹은 전년 같은 기간 대비 매출액이 36%, 영업이익이 11% 각각 증가했다. 금융 위기 속에서도 현대상선 매출은 8조30억원으로 전년 같은 기간 대비 57.2% 늘었다. 현대그룹은 2012년 매출 34조원을 목표로 뛰고 있다. 이런 현 회장을 재계에서는 “현모양처형 주부에서 강단 있는 재벌 총수로 변신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한편 장녀인 정지이 전무는 2004년 현대상선에 평사원으로 입사해 재정과 회계 분야 실무를 맡은 후 2006년 그룹의 정보기술(IT) 계열사인 현대U&I 상무로 승진한 데 이어 2007년에는 전무가 되는 등 후계자 수업을 착실히 받고 있다.

최은영 한진해운 회장도 전통적인 ‘금녀(禁女)’의 영역인 해운업계에서 남편 작고 후 기업 총수 자리에 올랐다는 점에서 현정은 회장과 여러모로 닮았다.

최 회장은 2006년 11월 남편이자 한진가의 3남인 조수호 한진해운 회장이 지병으로 세상을 떠난 이듬해 경영인으로 변신해 지난해 회장에 이어 연말에 대표이사직에까지 오르며 본격적인 경영 행보에 나서고 있다.

최 회장도 대학 졸업 후 바로 결혼해 가정에만 신경을 쓴 전업주부였다. 남편이 떠난 후에도 유지를 받들기 위해 양현재단을 설립하는 등 사회공헌 활동에 더 치중해 왔기 때문에 업계에서는 최 회장의 ‘홀로서기’에 관심이 쏠렸으며, 최 회장은 무난히 이를 극복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진가에서 유산 문제 등으로 대한항공과 소원해진 차남 조남호 회장 및 4남 조정호 회장과 달리 최 회장은 아직까지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최 회장의 부친은 최현열 전 NK그룹 회장, 모친은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의 넷째 여동생 신정숙씨다. 공교롭게도 최 회장의 동생 은정씨는 현 회장과 갈등을 빚은 정상영 KCC 명예회장의 차남 정몽익 KCC 사장과 부부 사이다.

국내 ‘여성 CEO 1호’인 애경그룹의 장영신 회장도 남편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회사를 떠맡게 된 경우이다. 장 회장은 1970년에 막내 아들인 채승석 애경개발 사장을 낳은 지 사흘 만에 남편 채몽인 사장을 심장마비로 떠나보낸 후 직접 경영 최전선에 나섰다. 1971년 남편 타계 1주기가 끝나자마자 그는 스스로 경리학원에서 복식과 부기를 배우며 경영수업을 받았고, 이듬해 8월부터 회사에 정식 출근했다.

경영 참여에 대해 시댁과 친정은 물론 회사 임원들까지 반대가 심했지만 장 회장은 장남 채형석 총괄부회장과 함께 그룹 규모를 재계 51위(2008년 기준)까지 끌어올렸다.

양귀애 대한전선 명예회장도 남편을 여의었다. 부산 출신인 양 명예회장은 양태진 국제그룹 창업주의 막내딸로 서울대 음대를 졸업하던 해인 1969년에 설원량 전 대한전선 회장과 결혼했다. 35년 동안 남편을 내조하며 가정주부로 지냈지만 2004년 3월 남편이 뇌출혈로 급작스레 세상을 뜨자 대한전선의 제1대 주주가 되면서 경영 전선에 나섰다. 이후 회사 경영은 전문경영인인 임종욱 부회장에게 맡기고 본인은 명예회장으로 회사 경영에 참여해 왔다.

남편 따라 곤욕 치르기도

남편의 곤욕은 그대로 부인에게 전해진다. 기자들에 둘러싸인 홍라희(삼성그룹), 정희자(대우그룹), 박문순(쌍용그룹)씨의 모습(왼쪽부터).

이어룡 대신증권 회장도 2004년 폐암으로 유명을 달리한 남편 양회문 회장을 대신해 경영 일선에 나서기까지 28년 동안 살림만 한 평범한 주부 출신이다. 암 선고 이후 남편을 살리기 위해 3년 동안 병 수발을 들었지만 끝내 남편의 운명을 막지 못했다. 그러나 이 회장은 경영 전반에 나서면서 ‘월급 10% 인상’과 ‘현장경영’ 등으로 업계의 이목을 끌었고, 110개 전국 영업점을 모두 돌며 직원을 일일이 격려하는 모습을 보이며 경영인으로서 자리매김했다.

이렇듯 재벌가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부인들이 있는 반면에 두문불출도 모자라 곤욕을 치른 경우도 적지 않다. 앞에서 성공한 부인들이 남편 사후 경영 전면에 나선 경우라면 ‘잔혹사’를 경험한 부인들의 공통점은 모두 문화재단 이사장이나 아트센터·미술관 관장 직함을 갖고 있었다. 또 남편이 현직에서 물러난 ‘옛 총수’란 점도 닮은꼴이다.

삼성그룹의 홍라희씨는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 비자금 폭로’ 사태 이후 ‘삼성 특검’에 소환돼 조사를 받는 굴욕을 당했다. 결국 무혐의 결정을 받긴 했지만 이 사건의 여파로 홍씨는 리움미술관 관장과 문화재단 이사직 등 일체의 직책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김석원 전 쌍용그룹 회장의 부인인 박문순씨도 ‘변양균-신정아 사건’에 휘말려 고초를 겪었다. 성곡미술관 관장인 박씨는 성곡미술관 전시회 후원금 등을 횡령한 혐의로 기소돼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 및 사회봉사 120시간을 선고받고 풀려났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부인 정희자씨는 검찰의 김 전 회장 추징금 집행 과정에서 번번이 수사 대상에 올랐다. 정씨는 자신이 운영하는 아트선재미술관에 보관돼 있던 미술품 등을 검찰이 압수하자 지난 1월 “압류된 유명 미술품들을 돌려 달라”며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가 곧바로 취하했다.

<조득진 기자 chodj21@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