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소금>
어두운 거리, 흔들리는 불빛, 자욱한 담배연기는 느와르 영화의 전형적인 이미지다. 느와르란 조직폭력배 영화다. 하지만 암흑가 조직원들이 목숨을 걸고 암투를 벌인다고 모두 음습하고 잔인할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색감이 참 예쁜 느와르도 있다. 성냥개비 하나 물고 주윤발 흉내를 내본 사람이라면 안다. 영화 속 폭력에는 미학이 있다. 비록 현실에서는 ‘미화’에 그칠 뿐이라도 말이다.
이현승 감독의 <푸른소금>(2011)은 폭력미학을 담은 ‘느와르’다. 예쁜 숙녀 킬러가 건달 조직의 전설적인 보스를 죽이려 한다는 소설 같은 스놉시스는 애초에 영화를 진지하게 만들기에는 너무 비현실적이었는지 모른다. <레옹>이 생각난다. <비트>나 <인정사정볼 것 없다>도 떠오른다.
암흑가 후계자를 포기하고 음식을 배워 식당을 열려는 남자가 있다. 두헌(송강호 분)이다. 그는 요리학원에서 가냘픈 20대 세빈(신세경 분)을 만난다.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사람은 ‘동급생’으로 묶인다. 검은색 가죽재킷에 오토바이를 몰고다니는 세빈. 알고보니 그녀는 ‘스나이퍼’다. 단 한 발로 적의 명줄을 끊어놓는 킬러다. 세빈과 친구 은정은 조직인 ‘해운대파’로부터 돈을 빌린다. 1000만원을 빌렸는데 이자에 이자가 붙어 7000만원까지 늘어났다. 약탈적 대출의 피해자가 된 두 사람에게 돈을 갚으려면 두헌을 죽이라는 명령이 떨어진다.
세빈은 두헌에게 북어국을 끓여준다. “음식도 말을 한다”며 맛있게 북어국을 먹는 두헌의 등뒤에서 그녀는 총을 쏠 수 있을까.
두헌과 세빈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금 3개가 있다”고 말한다. 하나는 누구나 좋아하는 황금, 두번째는 짠 소금이다. 마지막은 무엇일까.
경제에서 볼 때 황금과 소금은 공통점이 있다. 둘은 화폐였다. 고대 소금의 주요 생산지는 이탈리아, 이집트, 그리스, 에스파냐 등. 이들은 어김없이 교역의 중심지가 됐다. 제노바, 베네치아는 대표적인 소금 무역도시다.
로마시대 군인들은 봉급의 일부로 ‘살라리움’을 받았다. 이것이 ‘샐러리’(salary)로 변했다. 중국에서는 소금을 녹인 다음 틀에 넣어 굳혀서 동전처럼 만들었다. 표면에 황제의 문양을 새겼다. 염화다. 아프리카, 티베트에서도 비슷한 화폐가 발견됐다. 고대 국가는 소금을 세금으로 받기도 했다. 조선시대 소금은 쌀과 더불어 현금작물로 쓰였다.
소금은 전쟁도 불러일으켰다. 신대륙 발견과 프랑스혁명, 미국 독립전쟁과 남북전쟁도 실은 소금 때문이었다고 <소금>의 저자 마크 쿨란스키는 말한다. 일종의 화폐전쟁이다.
화폐로 사용하려면 몇 가지 조건에 맞아야 한다. 가치가 안정적이어야 하고, 사용(이동성)이 편리해야 한다. 간편하게 얻을 수 있어야 하고 신용도와 선호도도 높아야 한다. 물물교환이 주를 이루던 고대, 소금은 대부분의 조건에 부합했지만 사용과 관리가 불편했다.
이후 인류는 은과 금으로 주화를 만들고 지폐를 만들어 화폐시스템을 완성해갔다. 은이 중심이 되는 은본위제, 금이 중심이 되는 금본위제를 거칠 때마다 각국은 전쟁을 거쳤다. 아편전쟁은 영국의 금과 중국의 은이 맞붙은 싸움이었다.
1948년 달러를 금에 고정하는 브레턴우즈 체제가 완성된 이후 기축통화는 달러가 됐다. 하지만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달러가 큰 타격을 입으면서 위안화 등을 사용하자는 주장도 점점 커지고 있다.
<푸른소금>의 주무대는 부산과 서울 여의도다. 두 곳은 공통점이 있다. 금융당국이 선정한 금융중심지다. 스크린에는 여의도 한국거래소와 금융감독원 건물이 비쳐 지나간다. 돈 때문에 두원을 겨눠야 하는 세빈의 총구. 혹시 자본주의의 심장을 겨누고 있던 것은 아닐까. 혹시라도 말이다.
<박병률 경향신문 경제부 기자 mypark@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