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쇠고기 여론’의 힘은 인터넷 공론장

네티즌 적극적 의견 개진으로 정부 압박… 생활밀착형 이슈로 전에 없던 ‘폭발력’

촛불을 들고 청계광장에 모인 시민들. 인터넷 공론장의 여론은 온라인에 머무르지 않고 거리로 이어졌다. <김문석 기자>

2008년 5월 한국에는 때이른 더운 바람이 불고 있다. 이 바람은 서울에서 제주까지 우리 사회의 민심을 두루 아우르며 조금씩 그 열기를 더해가는가 싶더니, 언젠가부터 불덩이처럼 맹렬하게 달아올라 정치 권력의 정수리를 강타했다. 정부와 여당은 이 바람을 ‘괴담‘이라고 불렀고, 대통령은 “(괴담에) 당혹스러웠다”고 말했다.

좀처럼 그 기세가 수그러들지 않는 이 바람의 진원지는 다음 아고라를 필두로 한 인터넷 토론 공간이다. 지난 4월 17일 한·미 간 쇠고기 협상이 타결된 후 네티즌은 다음 아고라에 진지를 구축하고 정부를 향해 국민의 건강권과 검역 주권을 팔아먹은 부실 협상이라는 비판을 쏟아냈다. 이보다 앞선 4월 6일에는 고등학생 황모(17)군이 안단테라는 아이디로 다음 아고라에 대통령 탄핵을 청원하는 서명을 발의했다. 청원 서명 참가자는 쇠고기 협상의 부조리가 드러나면서 강력한 탄력을 얻어 지난 5월 4일에 이미 100만 명을 넘었다.

보수신문 여론지배력 급격히 약화
네티즌은 몇몇 언론 보도를 통해 광우병 위험과 부실 협상 증거가 하나씩 드러날 때마다 폭발적인 응집력을 보였다. 지난 4월 29일 MBC ‘PD수첩’이 광우병 특집을 보도한 후 네티즌은 다음 아고라와 ‘PD수첩’ 게시판에 정부의 안이한 인식을 비판하는 댓글들을 쏟아냈다. 랭키닷컴에 따르면 5월 2일 다음 아고라 방문자 수는 199만 명을 넘었다. 4월 25일에 견주어 2배 이상 늘어났다. 같은 날 페이지뷰도 1주일 전과 비교해 3배 가까이 증가했다. 잇달아 대통령의 미니홈피가 네티즌의 폭주로 폐쇄됐고, 미니홈피가 폐쇄되자 네티즌은 청와대 홈페이지로 달려갔다.

포털 사이트 토론 공간을 중심으로 여론이 응집되고 확산되면서, 과거와 달리 몇몇 보수 신문의 여론 지배력은 급격하게 약화했다. 보수 신문이 미국산 쇠고기 수입의 위험성을 비판하는 인터넷 여론에 대해 배후론을 거론하자, 네티즌은 오히려 노무현 정부 시절 이들 언론의 광우병 관련 기사를 뒤져 보수 언론의 말 바꾸기를 폭로했다. 다음 아고라에는 현재 이들 신문의 여론 왜곡에 항의하는 서명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인터넷 공론장에 모인 네티즌은 여론에 재갈을 물리려는 정부의 외압에도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지난 13일 경찰이 인터넷에 대통령이나 광우병과 관련한 악의적 댓글을 올린 네티즌 21명에 대해 신원 확인 작업에 착수하고 촛불 집회 주최자들을 사법처리한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다수의 네티즌이 경찰청 홈페이지에 들어가 “나도 잡아가라”며 항의하는 글을 집단적으로 올리면서 경찰청 홈페이지 접속이 일시적으로 중단되기도 했다. 또한 다음 측이 이명박 대통령 탄핵 서명 숫자를 의도적으로 조작하려 한다는 의심이 제기되자, 탄핵 서명 동참 메시지와 함께 자신이 몇 번째 서명자인지 밝히는 방식으로 대응하기도 했다.

다음 아고라에 집중 응집력 키워

2002년 12월 효순 미선양 추모 집회에 참가한 여중생들. 2000년 이후 인터넷 공론장은 중요한 사회적 이슈가 터질 때마다 시민들의 참여를 이끌어내는 역할을 했다. <김문석 기자>

네티즌의 적극적 대응은 정부의 언론 통제 시도마저 무력화했다. 지난 12일과 13일 EBS ‘지식채널 e’는 1990년 영국 농수산식품부 장관이 유세장에 자신의 딸을 데리고 나와 쇠고기를 먹어도 안전하다고 국민을 설득했으나 17년 후 딸의 친구가 인간 광우병으로 사망했다는 내용이 담긴 ‘17년 후’를 방영했다. 그러나 청와대에 파견된 감사원 직원이 경영진에게 전화를 건 후 이 프로그램의 재방송이 취소됐다. 프로그램을 만든 김진혁 PD가 사내 게시판에 올린 글이 EBS 직원을 통해 다음 아고라에 옮겨지면서 여론의 관심이 집중되자 경영진은 방영 취소를 철회했다.

인터넷 공론장을 중심으로 여론이 응집·확산되는 현상이 새로운 것은 아니다. 2000년대 들어 대선이나 총선 등 중요한 정치적 이슈가 터질 때마다 인터넷은 여론의 진원지이자 여론 확산의 매개체 구실을 했다. 2002년 두 여중생이 미군 장갑차에 치여 사망했을 때 시청 앞 촛불시위를 이끌어낸 여론이 만들어진 것도 인터넷 공간이었고, 2002년 대선 및 2004년 탄핵 사태 당시에도 결정적인 반전의 계기를 마련한 것은 인터넷을 통해 응집된 여론의 힘이었다. 그러나 지난 대선을 기점으로 사회적 이슈를 선도하는 인터넷의 위력이 급격히 감소하면서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인터넷 정치의 소멸’이 거론되기도 했다. 그러던 것이 이번 쇠고기 논란을 계기로 인터넷 공론장은 다시 한 번 강력한 여론 형성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그 폭과 강도 면에서도 전에 없는 수준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경희사이버 대학교 민경배 교수는 이를 두고 ‘생활밀착형 이슈의 파괴력’이라고 해석했다. 이전에는 사안 자체의 정치적 성격 때문에 여러 이해 당사자들 사이에 여론이 분화되는 양상이었다면, 쇠고기 사태의 경우 생명과 직결된 이슈라는 점에서 거의 압도적인 수의 국민이 동일한 이해관계를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터넷 여론이 여러 사이트에 분화되지 않고 다음 아고라에 집중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는 점도 특징적이다. 이는 네이버와 달리 미디어다음의 경우 토론, 청원, 서명, 블러거 뉴스 등 네티즌이 직접 참여할 수 있는 서비스가 발달되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쇠고기 논란이 본격적으로 확산된 이후 4월 말에서 5월 첫째 주 아고라의 페지이뷰는 두 배 이상 증가한 반면, 뉴스 콘텐츠에 대한 페이지뷰는 5% 정도 늘어나는 데 그쳤다.

인터넷 공론장에 대해 늘 제기되는 문제는 순기능과 역기능이 혼재한다는 사실이다. 수평적이고 열린 공간이라는 장점이 무절제한 욕구의 배출구로 전락할 수 있다는 단점과 공존한다. 민경배 교수는 인터넷 공론장의 순기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공론장이 다양하게 분산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지금은 뜨겁고 역동적인 순기능을 하고 있지만 때에 따라서는 언어의 쓰레기장이 되기도 하는 게 인터넷 공론장의 특성이다. 한 공간이 붕괴되었을 때 다른 공간으로 갈 수 있어야 한다. 2002년 대선 때도 네티즌 파워가 강했지만 지금처럼 포털 의존도가 크지는 않았다. 인터넷 공론장의 자율적인 정화 기능이 작동하려면 공론장의 다양성이 확보되어야 한다.”

<정원식 기자 bachwsik@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