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촛불 지키는 종교계 ‘성전’ 일심동체

천주교사제단 시발로 개신교·불교·원불교 한목소리 ‘권력 참회’ 촉구

지난 6월 30일 시청 앞 광장에서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주최로 열린 비상 시국미사를 마친 신부와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숭례문을 향해 행진하고 있다. <박재찬 기자>

지난 6월 30일 오후 7시쯤. 시청 앞 광장을 꽉 메운 시민들 사이로 길이 열렸다. 십자가를 받쳐든 사제의 뒤를 따라 ‘고시철회 명박 퇴진’이 쓰여진 손 팻말을 손에 든 천주교정의구현 전국사제단 소속 신부 200여 명이 광장을 가로질러 단상을 향해 나아갔다. 행렬이 지나가자 곳곳에서 시민들이 “감사합니다”를 외쳤다. 인천에서 직장을 다닌다는 현종훈(35)씨는 “나는 불교신자지만, 사제단이 우리 뜻을 대변해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정부의 폭력 진압과 보수언론의 색깔 공세에 시달리던 촛불을 지키기 위해, 드디어 종교인들이 움직였다. 첫걸음을 디딘 것은 정의구현사제단이다. 사제단 소속 신부 200여 명은 6월 30일부터 7월 2일까지 3일 동안 비상시국미사를 열고 촛불에 담긴 민의를 존중하지 않는 정부를 강력하게 비판했다. 첫날 미사에서 사제단은 경찰의 초강경 진압을 거론하며 “촛불에 담겼던 간곡한 뜻은 짓밟혔고 우리는 대통령과 정부의 존립 근거에 대하여 묻지 않을 수 없다”면서 “오늘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다는 점을 경고한다”고 밝혔다.

올해로 창립 34주년을 맞는 정의구현사제단은 우리 사회 민주화의 물길이 정권의 폭력과 여론 조작의 벽에 가로막힐 때마다 막힌 곳을 터주는 역할을 하면서 한국 민주화 운동의 가장 뜨거운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1987년에는 박종철군 고문치사 의혹을 폭로해 6월항쟁을 이끌어냈고, 지난해 10월에는 삼성그룹 비자금 의혹을 폭로했다.

“폭력진압에 더 이상 침묵할 수 없다”
사제단 대표 전종훈 신부, 사제단 총무 김인국 신부 등 현재 사제단을 이끌고 있는 집행부는 이른바 ‘2세대 사제단’으로 불린다. 1970~80년대 사제단을 대표하던 김병상 몬시뇰 신부, 함세웅 신부, 문규현 신부, 송기인 신부 등 1세대가 은퇴하거나 공직으로 이동하면서 자연스럽게 세대 교체가 이뤄졌다. 현재 사제단 대표를 맡고 있는 전종훈 신부는 2006년 문규현 신부가 대표직에서 물러난 후 대표로 선출됐다.

개신교도 거리로 나왔다. 개신교 교단 연합체인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는 3일 시청 앞 광장에서 시국기도회를 열고 구속자 석방과 어청수 경찰청장 퇴진을 요구했다. 시국기도회에는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기독교대한감리회, 한국기독교장로회총회를 비롯한 NCCK 산하 8개 교단에 소속된 교회들이 참여했다. 행사를 주관한 정의평화위원회는 NCCK 아래 8개 위원회 중 하나다. 이외에도 전국목회자 정의평화실천협의회(이하 ‘목정평’), 예수살기, YMCA전국연맹, 교회개혁실천연대 등 NCCK 계열의 개신교계의 대표적인 진보단체들이 참여했다.

광우병 기독교 대책회의의 최헌국 목사는 “29일과 30일 새벽에 벌어진 경찰의 폭력 진압을 목격하고 개신교계가 더 이상 침묵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면서 “시민들에게 빚진 자의 마음으로 나왔다”고 말했다.

불교환경연대와 실천불교승가회를 중심으로 불교계도 일어났다. 불교계는 4일 ‘국민주권 수호와 권력의 참회를 위한 시국법회’를 열고 사제단 신부들에 이어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불교계는 여러 차례 시국법회를 추진한 적이 있지만 이번에는 불교환경연대나 실천불교승가회 같은 NGO뿐 아니라 서울 시내 대형 사찰이 대거 참여했다. 화계사 주지 수경, 봉은사 주지 명진, 도선사 주지 선묵, 불광사 회주 지흥, 진관사 주지 계호, 금선사 주지 법안 스님 등 대표적인 사찰 스님이 그들이다.

서울 시내 대형 사찰 대거 참여
실천불교승가회 집행위원장 가섭 스님은 “국토해양부 지리정보시스템에서 대형 사찰이 빠진 것, 경기여고 불교 유적 훼손 문제, 대통령과 경찰청장의 특정 종교 편들기 등 다종교 문화가 자리 잡은 우리 사회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면서 “이런 일들 때문에 불자들이 격앙돼 있는 상태라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호법단을 조직했다”고 밝혔다.

8일에는 원불교가 시국대법회를 연다. 원불교 시국대법회를 주관하는 사회개벽교무단은 1987년 원불교 내 진보성향 교무들이 호헌조치 철회를 요구하며 시국성명서를 발표하는 과정에서 탄생했다. 2000년대에는 낙천낙선 운동, 핵폐기장 반대 운동 등을 벌였고, 2003년에는 새만금 갯벌 살리기 삼보일배에 김경일 교무가 수경 스님, 문규현 신부, 이희운 목사와 함께 참여했다. 사회개벽교무단 정상덕 공동대표는 “대통령은 국민을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고 있다”고 비판하고 “대통령이 이번주 안에 국민의 뜻을 받아들여 이 상황이 끝나고 8일 시국대법회는 축제의 법회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사제단의 시국미사를 시작으로 4대 종단이 연이어 거리로 나오면서 촛불정국은 새로운 전환점을 맞고 있다. 이른바 이명박 정부에 대한 종교적 성전을 선포한 것이다. 상지대 홍성태 교수는 “종교인들이 나섰다는 것은 문제가 그만큼 심각하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라면서 “정부가 태도를 바꾸지 않으면 정부에 대한 국민의 불신은 더욱 깊고 강해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인터뷰 |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김인국 신부
“국민의 외로움과 절망 쓰다듬어주고 싶다”

김인국 신부 <김영민 기자>

세 차례 시국미사는 촛불을 들거나 지지했던 사람들이 지난 두 달 동안 얼마나 따뜻하고 부드러운 언어에 목말라 있는지 보여준 자리였다. 시국미사가 열리는 내내 정곡을 찌르는 통렬함과 마음을 파고드는 살가움이 버무려진 발언으로 많은 시민의 마음을 사로잡은 김인국 신부를 3일 밤 서울광장 천막 안에서 만났다.

단식 4일째인데 건강에는 이상이 없는가.
“신부님들이 많이 힘들어하고 있다. 여기 환경이 좋지 않다 보니 다른 때보다 곱절로 힘들다.”

지난 며칠간 사제단 신부들에 대한 시민들의 격려와 환호가 쏟아졌다.
“국민의 절망감과 상처가 그만큼 깊었다는 느낌이 든다. 국민들의 외로움이 느껴졌다. 신부님이 한 일은 그 절망을 이해하고 상처를 쓰다듬어주는 것이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마음을 울리는 말로 시민을 감동하게 만들었다는 평가다. 강론을 준비하며 염두에 둔 점이 있다면.
“강론 준비를 따로 할 시간은 없었다. 다만 하느님이 이 순간에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씀이 무엇일까, 극심한 열패감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무슨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하실까에 대해 생각했다. 내 말이 아닌 하느님 말씀을 전하려고 했다.”

사제의 관점에서 민주주의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예수님이 사람을 사랑하신 것은 비록 죄인이더라도 누구나 하느님의 자녀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우리에게 바로 그러한 자존감을 주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하느님 나라로 가는 작은 길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2008년 서울에 살고 있다면 어떤 일을 했을 것이라고 보나.
“여중생들이 촛불을 들고 나왔던 바로 그날부터 당신 존재를 드러내지 않고 내내 시민들과 함께했을 것이다.”

우리 사회의 희망은 어디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나.
“욕망에 대한 성찰을 깊이 하지 않으면 쇠고기로 대표되는 갈등이 계속 일어날 것이다. 정부는 지속 가능하지 않은 미래로 국민을 현혹하지 말아야 한다. 현혹의 결과는 양극화일 따름이다. 우리 사회는 물질적으로는 단군 이래 최고의 풍요를 누리고 있지만 정신적으로는 오히려 반대다. 우리 사회가 요즘처럼 정신적으로 가난했던 때가 없다. 촛불은 언젠가는 꺼야 하지만, 내면의 촛불만은 끄지 말아야 한다.”

<정원식 기자 bachwsik@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