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탁이 만난 사람]‘통일의 꽃’ 임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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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요즘 학생은 나를 잘 알아보지도 못해요”



20년 전인 1989년 여름, 한반도는 뜨거웠다. 남쪽의 한 여대생이 북쪽을 깜짝 방문,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한 사건 때문이다. 한국외국어대 4년생으로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대표로 파견된 임수경씨는 당국의 눈을 피해 일본 도쿄와 독일 베를린을 거쳐 평양 땅을 밟는 데 성공했고, 이후 47일 동안 북한 전역을 누비고 다니며 “조국은 하나다”라고 외쳤다. 그녀의 당찬 언행은 남과 북 모두에 큰 충격과 흥분, 긴장과 감동을 던져줬다.

8월15일 임씨는 판문점을 통해 남쪽으로 귀환했다. 천주교에서 그녀의 동행을 돕기 위해 파견한 문규현 신부의 손을 잡고 군사분계선을 넘은 것은 오후 2시22분. 민간인이 이곳을 지난 것은 분단 이래 처음 있는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온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분단의 벽’을 넘은 그녀는 그러나 그길로 안기부의 손에 넘겨졌다. 그녀는 국가보안법을 철저하게 위반한 범법자로 낙인 찍혔다. 목적수행 및 잠입탈출 등 13가지 죄목이 그녀에게 씌워졌으며, 법원은 그 모두를 유죄로 인정해 징역 5년에 자격정지 5년을 최종 선고했다.

임씨는 그로부터 가석방될 때까지 3년5개월 동안 옥살이를 했다. 그녀가 교도소에서 나와 세상과 마주했을 때 그녀의 나이 스물다섯이었다. 사람들은 그녀를 ‘통일의 꽃’이라 불렀다. ‘통일의 꽃’은 그후에도 그녀를 나타내는 고유명사처럼 불멸의 칭호가 됐다.

‘이종탁이 만난 사람’은 코너 특성상 인터뷰 주인공과 관련된 스토리를 이처럼 길게 소개하지 않는다. 1980년대를 이 땅에서 보낸 사람이라면 이런 배경 설명이 오히려 장황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20년 전 임씨가 붉은색 티셔츠에 흰 바지 차림으로 판문점을 넘던 그 장면을 대부분 지워지지 않는 필름처럼 머릿속에 담고 있을 테니까.

그러나 세월의 무게를 이기는 필름은 없다. 시간이 지나면 통일의 꽃도 역사의 한 조각이 된다. 역사는 남은 자들이 고비 고비마다 회상하고 기록하고 되새길 때 의미가 살아난다. 인터뷰를 사양하는 임씨를 어렵게 설득해 자리로 불러낸 것은 “20년이 지난 만큼 이제는 재방송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판단 때문이다. 하지만 대화가 오가면서 임씨는 이에 대해 다소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인터뷰는 지난 15일 광화문의 한 카페에서 시작됐다.

이 자리에 나오면서 찾아보니까 최근 몇년간 언론에 기사난 게 거의 없더군요. 인터뷰하지 않는 이유가 있습니까.
“인터뷰하고 말고 할 게 없어요. 공적으로 무얼 얘기할 게 없으니까요.”

올해가 방북 20년 되는 해 아닙니까. 개인적으로 감회가 새롭지 않습니까.
“올해 초에는 여러가지 생각이 났습니다. 그런데 봄부터 우리가 초상을 많이 치렀잖아요. 그러면서 다른 생각할 겨를이 없어졌어요.”
노무현·김대중 두 전직 대통령 서거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녀가 사부처럼 모시던 스님도 최근 입적했다고 한다. 두 전직 대통령 장례 때 검은색 옷을 입고 오열하는 임씨의 모습이 카메라에 잡혀 보도되기도 했다.

그때가 아주 오랜만에 모습을 보인 것 같습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나요. 근황을 궁금해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제가 몇 해 전 아이를 하늘 나라로 떠나보내고 한동안 해인사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 뒤 캄보디아를 중심으로 동남아 이곳저곳을 돌아다녔어요. 그렇게 9개월쯤 다녔어요. 그리고 오스트리아로 갔습니다. 빈 근교의 평화대학원에 요한 갈퉁 선생님이라고 세계적인 평화학자가 계신데, 그분이 1989년에 평양에서 저를 보았다고 해요. 그때 인상이 깊었다며 공부하러 오라는 것을 몇년 동안 미루다가 그때 가게 된 겁니다. 그곳에서 70개국의 유학생들과 기숙사에서 함께 지내다가 올해 1월에 돌아왔습니다.”

그 전에 미국에서 생활하기도 했죠?
“제가 어렵게 여권을 받았습니다. 정부에서 내건 여권 발급 조건이 두 가지였어요. 미국만 가야 한다와 공부만 해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저보고 반미제국주의 운운하더니 미국에 갔다고 욕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사정이 있어요.”

미국만 가야 한다는 것은 보안관찰 대상이었기 때문인가요.
“글쎄요. 그런가 보죠. 그 보안관찰이라는 게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2년마다 자동 갱신됩니다. 참 불합리하죠? 특별한 사정이 있을 때 갱신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저는 법적으로 사면복권됐고, 실제로도 건전한 시민으로 살아가고 있는데 말이에요. 저에게는 지금도 출입국 트라우마가 있어요. 여권을 심사직원에게 내밀고 다시 받아들 때까지에요. 여권을 컴퓨터에 조회하는 출입국 직원이 알듯 말듯한 눈초리로 저를 아래 위로 훑어봅니다. 짧은 순간이지만 가슴이 철렁하죠.”
듣고 보니 아픈 기억을 끄집어내게 한 것 같아 미안한 마음 금할 길이 없다. 화제를 재빨리 현재 이야기로 바꿨다.

돌아와서는 무얼 하고 지내나요.
“한국외대와 성공회대에서 저널리즘 관련 강의를 해요. 제가 박사 과정만 마치고 학위를 못 땄기 때문에 논문 준비도 합니다. 엊그제부터는 인터넷 ‘라디오21’에서 방송 진행을 맡았습니다. 낮 12시부터 오후 2시까지 <임수경의 원코리아>란 프로그램이에요.”

대학에 가면 학생들이 알아봅니까.

“노무현 대통령은 군사분계선을 걸어서 넘어갔잖아요. 그걸 보면서 저 현장 바로 저 순간에 사람들이 임수경을 머릿속에 떠올리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나만 그런 생각을 했는지 아무도 저를 찾지 않더군요.”

“잘 못 알아봅니다. 한때 외대 본관에 제가 나오는 벽화가 있었는데 그래도 몰라보더군요. 저도 그게 좋습니다. 그래서 어쩌다 아는 체 하는 학생이 있으면 ‘엄마에게 물어봐라’라고 말해 줍니다. 지금 학생들에게 있어 임수경 방북사건은 우리가 선배들로부터 귀가 따갑게 듣던 4·19 얘기와 별 다를 게 있겠나 싶어요. 그리고 저 20년 전의 일을 파먹으며 산다는 식의 얘기 정말 듣고 싶지 않거든요.”
그럼에도 인터뷰하는 날 그녀의 유명세를 보여 주는 광경이 벌어졌다. 제주도에서 볼 일이 있어 서울에 왔다는 중년 남자가 거리에서 임씨를 한눈에 알아보고는 대뜸 “정말 반갑다”며 손을 잡은 것이다. 이 남자는 임씨 손에 메모지를 쥐어주고 갔다. 그 안에는 현금 10만원이 들어 있었다. 임씨는 “과거 악수를 청하는 사람이 많아 거리를 잘 다니지 못할 때에도 이렇게 돈을 주는 사람은 없었는데 어떻게 하나”하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20년 전 북한에 갔을 때 열렬한 환영을 받았잖아요. 어떻든가요.
“평양 순안공항에 내리자 엄청난 인파에 놀랐습니다. 사람들에게 이리저리 떠밀리다가 신발 한 짝이 벗겨지기도 했어요. 그래서 전대협의 도착 성명을 발표할 때는 신을 한 쪽만 신은 채였죠. 북한에서 새 신을 구해 신었는데 나중에 그게 국가보안법상 금품수수라는 죄목이 되더군요.”

그때는 나이도 어렸고, 혈혈단신이었잖아요. 그럼에도 용기있고 지혜로운 행동을 했는데, 혹시 후회되는 부분은 없습니까.
“모든 것은 내가 결정했어요. 책임감 때문이었겠지만 흐트러짐 없이 최선의 선택을 했던 것 같아요. 하나 걸리는 것은 그때 호텔에 북한 룡성맥주와 금강산 맥주, 하이네켄이 있었는데 북한 맥주가 맛이 없어서 하이네켄을 마신 겁니다. 당시 나와 함께 다니던 정명순씨가 그것을 기억해 두었는지 2001년에 북한에 갔을 때 하이네켄 을 들고 찾아왔더라고요. 그때 룡성맥주를 마셔줬어야 하는 건데….”

판문점을 넘을 때 어떤 심정이었나요.
“그런 질문을 전에 수없이 받았어요. 감옥에서 나와 써 놓은 것들도 있고요. 지금은 기억이 잘 안 나요. 적당히 얘기할 수 있겠지만 작위적이란 생각이 드네요. 어떤 사람은 저에게 대놓고 그때 임수경은 판문점에서 죽어 없어졌어야 한다고 하기도 해요. 그러니 무슨 말을 하겠어요.”
자신의 인생을 바꾼 그 세기의 사건, 그중에서도 하이라이트의 순간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기억이 안 난다는 말은 진심이 아닐 것이다. 사실 그녀는 20년 전 일을 놀랄 만큼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예를 들면 그녀가 방북했을 때 신의주의 한 초등 1학년생이 발표했다는 시도 “사진을 찍자요 림수경 언니, 뿔났다고 하던 사람 뿔 찾다가 해 저물게….”하며 줄줄 읊었다. 의왕교도소 수감 때 주소는 ‘경기 의왕시 포일동 산 18-1번지 73호’, 청주교도소 있을 때는 ‘청주시 미평동 146번지 12호’라며 막힘없이 외우기도 했다. “작위적으로 비춰지고 싶지 않다”는 것은 자칫 자기 입으로 미화한다는 식의 구설에 오를까 우려하는 것일 뿐이다.

교도소 주소를 어떻게 지금도 외우나요.
“그때 편지를 3000통쯤 받았거든요. 하루 3통꼴이죠. 그걸 읽고 또 쓰다 보면 하루가 지루하지 않았어요. 한양대 리영희 교수님도 그때 저랑 펜팔을 한 사이죠.”

그 편지들은 지금 어디 있나요.
“모두 집에 있어요. 자료로 남겨둬야 할 것 같아서요. 올해 초에 뭔가 기념행사를 하게 되면 쓸 데가 있으려나 했는데….”

얼마 전에 김일성대 출신의 탈북기자가 블로그에 ‘임수경이 북한에 뿌린 금단의 열매들’이라는 글을 올렸더군요. “북한 주민들은 남쪽의 정부가 극악무도하며 인민들은 헐벗고 굶주리는 것으로 알아왔는데 임수경을 통해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내용이었어요. 어떻게 생각하나요.
“저도 그 글 보았어요. 댓글이 엄청 많이 달렸더군요. 그런 역설이 있다는 거 새삼스러운 얘기 아니에요. 그리고 이 시대 한반도에 필요한 것은 평화공존이라고 생각해요.”

정부 승인을 받고 북한을 모두 네 차례 갔잖아요. 기분이 어떻든가요.
“제가 한때 방송위원회 남북방송교류추진위원회 위원이었어요. 그 자격으로 평양에 갔죠. 처음엔 정말 감개무량하더군요. 1989년에 만난 사람들을 다시 만났으니까요. 그런데 몇번 가서 보니 북측도 저를 부담스러워 하는 눈치였어요. 세상이 달라졌기 때문이었겠죠. 그때부터 되도록 나서지 않으려 했습니다.”

유명인으로 사는 게 부담스럽습니까.
“남들이 저보고 공인이라고 해요. 언제까지 그렇게 살아야 하나요. 말로만 공인이라고 하지 진보정권 10년이 지나도록 그 비슷한 대우도 해 주지 않았어요. 남북정상회담 이후 북측에서 선물로 보냈다는 칠보산 송이를 여러 사람에게 나눠줬잖아요. 저에게는 그런 것도 안 오더군요.”
남에서도, 북에서도 통일의 꽃을 보듬어 안으려는 배려가 부족했다는 얘기다.

그래도 남북관계를 보는 느낌이 남다를 것 아닙니까.
“김대중 정부에서 6·15 정상회담을 할 때였어요. 그때 저는 종로거리를 지나던 중이었는데 길에서 TV 화면을 지켜보면서 펑펑 울었어요. 세상에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있구나 싶었지요. 고은 선생님이 이런 날 함께 술 한잔 해야지 하며 불러주더군요. 노무현 대통령은 군사분계선을 걸어서 넘어갔잖아요. 그걸 보면서 저 현장 바로 저 순간에 사람들이 임수경을 머릿속에 떠올리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나만 그런 생각을 했는지 아무도 저를 찾지 않더군요.”

정치할 생각은 안 해 보았나요. 과거 정권에서 마음만 먹었다면 그리 어렵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2004년 총선 때 3당에서 공천 제의가 왔어요. 하지만 저는 국회의원이 되면 원 오브 뎀(여럿 가운데 한 명)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정치인이 모범적이지 않아서 국민들의 비난도 많이 받잖아요. 저는 양심적 지식인으로 남고 싶었어요. 제가 그래도 전직 양심수 아닙니까.”

앞으로 무얼 하고 싶나요.
“제가 원래 문학소녀였어요. 대학 때 소설을 써서 외대문학상도 받았거든요. 지난해 신춘문예에 도전해 볼까 해서 끼적인 게 있는데 친구에게 보여 줬더니 ‘이건 네 얘기잖아, 남들이 재미있어 할까’ 하는 거예요. 그래서 단념했죠. 그렇게 미발표 원고가 컴퓨터에 꽤 저장돼 있어요. 또 그동안 해 온 공부니까 그 길로 더 성숙했으면 하는 생각도 있고요. 소설가 또는 저술가로서 자유롭게 살아가고 싶습니다.”



<글·이종탁 출판국 기획위원 jtlee@kyunghyang.com>
<사진·김석구 기자 sg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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