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TED 강연 보신 적 있나요

‘아이디어’의 공유, 세상을 바꾸는 작은 실천

지난 2010년 열린 TED 컨퍼런스 행사에서 큐레이터 크리스 앤더슨이 연설을 하고 있다. ⓒ TED Conferences, LLC

“제가 가진 아이디어는….” 청중들의 박수를 받으며 연단에 선 애리어나 허핑턴은 입을 열었다. “훌륭한 아이디어를 이끌어낼 수 있는 작은 아이디어입니다.” 애리어나 허핑턴? 지난해 미국 대통령 오바마가 측근들에게 “워싱턴 포스트와 함께 반드시 읽어야 할 매체”라고 말해 화제를 모았던 온라인 블로거 뉴스 매체 ‘허핑턴 포스트’의 설립자다. ‘허핑턴 포스트’는 지난 2007년 미 대선 당시 최초로 대통령 후보 사이의 온라인 토론을 주관해 알려진 매체이기도 하다. 어쨌든 그녀가 내놓은 답은? ‘잘 자는 것(good sleep)’이다. “저는 수면의 가치를 비싼 값을 치르고 배웠습니다. 과로로 실신한 것이지요. 그때 책상에 머리를 부딪쳤고 광대뼈도 부러졌습니다.” 오른쪽 눈도 다섯 바늘이나 꿰매야 했다. 수면에 관한 그녀의 통찰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남자들은 수면 부족을 왕성한 정력의 상징쯤으로 생각하지요.” 여성 청중들에 섞여 있던 남성들이 계면쩍은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그녀는 “은연 중 전날 밤 4시간 잔 것을 가지고 마치 일에 대한 열정처럼 이야기하는 태도는 문제”라며 “생산성과 행복이 늘어나게 하려면 수면 부족에 대한 자랑을 멈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잘 자는 것’을 그녀가 답으로 내놓았을 때 청중들은 박수를 치며 웃었다. 연설 시간은 4분. 짧다. 사소하다면 사소한 ‘아이디어’다. 하지만 충분히 생각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아이디어다.

‘18분’ 아이디어의 매력
이런 아이디어는 또 어떨까. “왜 고기 대신 벌레를 먹으면 안되나.” 네덜란드의 곤충학자인 마르셀 디키의 주장이다. 지구상에는 600만 종의 벌레가 있다. 그리고 벌레들은 유익하다. 사람들이 모르게, 공짜로 경제에 도움을 주고 있다. 배설물을 없애고, 작물들에 수분을 공급한다든가, 과일이 열리도록 식물들의 생식에 도움을 줄 뿐 아니라, 그 자신이 동물의 먹이가 되는 방식이다. 그리고 전 세계적으로 벌레를 ‘별미로’ 먹는 사람들은 많다. 식용으로 사용되고 있는 벌레는 전 세계적으로 1000종이 넘는다. 소, 돼지, 양으로 한정되어 있는 육류는 미국의 경우 1인당 연간 평균 80㎏ 정도 소비한다. 개발도상국의 소비량은 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최근 중국 사례에서 보듯, 육류 소비량은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다. 디키 교수의 연설은 프리젠테이션을 통해 수치와 통계를 제시하고 있다. 나름대로 설득력 있다. 그는 육류 소비를 중단하고 벌레를 먹어야 하는 세 가지 이유를 제시한다. 그리고 실천. 네덜란드에서는 벌레로 데코레이션한 초콜릿이 생산되고 있다. 연설의 끝 무렵 디키 교수는 ‘벌레 초콜릿’을 이날 행사의 큐레이터에게 권한다. 영상은 큐레이터가 그 초콜릿을 먹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이 영상들은 지난해 12월부터 올해 1월 TED의 인터넷 홈페이지에 올라온 것이다. 게다가 한글자막도 지원한다. TED는 기술(Technology), 엔터테인먼트(Entertainment), 디자인(Design)의 머릿글자를 딴 것. 즉 위의 세 가지 주제를 화두로 진행되는 연례 컨퍼런스 행사다. 시작은 198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처음에는 비공개로 진행하던 폐쇄적 행사였다. 그런데 크리스 앤더슨(‘롱테일’의 저자이자 와이어드 편집장인 크리스 앤더슨과는 동명이인인 다른 인물이다)이 이끄는 미국의 비영리재단인 샤플링재단이 TED를 인수하면서 방침을 변경했다.

TED의 강연 동영상이 인기를 끄는 것은 쉽게 접하기 힘든 전세계적 명사들의 아이디어를 모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진은 TED의 홈페이지. ⓒ TED Conferences, LLC

크리스 앤더슨의 샤플링재단이 내건 모토는 “널리 퍼뜨려 공유할 만한 아이디어(Ideas worth spreading)”였다. 그리고 퍼뜨릴 수 있는 공간은 바로 인터넷이었다. 마침내 지난 2006년 TED의 인터넷 사이트와 동영상 공유 사이트인 유튜브 등을 통해 TED의 강연들이 공개되기 시작했다.

사실 동영상 공개는 TED로는 모험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인터넷으로 강연을 볼 수 있다면 누가 비싼 돈을 내고 강연회에 참여할 것인가. 하지만 크리스 앤더슨의 판단은 옳았다. TED강연 공개는 대성공이었다. 동영상 사이트에 오른 TED 강연들은 인터넷 사용자들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그럴 만하기도 한 것이 빌 게이츠, 앨 고어, 구글의 창립자인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과 같은 저명인사들뿐 아니라 제인 구달, 리처드 도킨스, 말콤 맥도웰 같은 당대의 세계적인 학자들이 제안하는 ‘아이디어’는 쉽사리 접하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18분 내외다.

한글자막 모임에서 지역행사로
“보는 사람의 입장에선 큰 부담이 되지 않는 시간이지만 강연자 입장에서는 어려운 시간이기도 합니다. 18분 이내로 자신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압축해야 하니까요.” 류한석씨(31)의 말이다. 그는 지난 2009년 TED로부터 라이선스를 받아 ‘TEDxSEOUL’을 조직했다. 그는 평범한 IT기업의 회사원이었다. 인터넷에 오른 TED 강연에 흥미를 느낀 그는 ‘이 강연들에 한글자막이 제공되면 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지 않겠나’라는 생각으로 TED 쪽에 문의를 했다. 마침 TED는 ‘공개번역 프로젝트’를 만드는 것을 고민하고 있었다.

즉 TED의 강연들을 자원봉사자들이 세계 각 나라 말로 번역해 올리는 프로젝트였다. “한국에서 번역자들을 한번 모아보겠다고 했지요. 그게 ‘TEDx서울’의 전신이 되었습니다.” 강연 번역자 모임에서 시작한 참가자 규모는 처음 150명 규모에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때마침 불어온 트위터 열풍은 TED를 알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시작은 강연 번역이었다. 2011년 1월 현재 TED에 등록된 강연 수는 800개 이상. 18분 분량이라고 하더라도 이것을 한글로 옮기고 다시 자막을 만드는 작업은 쉽지 않다. 평균적으로 5~7시간 이상 걸린다. 번역 자막을 리뷰한 것까지 포함, 20~30개 이상씩 번역한 사람도 많다. 경쟁도 나름대로 치열하다. “자기가 번역하고 싶은 강연을 예약하도록 되어 있는데 이제는 더 이상 번역할 강연이 없을 정도”라고 류씨는 덧붙였다.

‘TEDx서울’의 홍보를 담당하고 있는 이미령씨는 말한다. “번역에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한국에서도 저런 행사를 열 수는 없을까, 그런 문제의식이 회원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났습니다. 막상 하기로 해놓고서는 걱정도 많았어요. 과연 제대로 될까.” 서울 신촌에서 연 ‘TEDx서울’ 컨퍼런스 첫 행사는 대성공이었다. 이 영상 역시 TED의 페이지에서 볼 수 있다.

앞에서 언급한 공개번역 프로젝트와 함께 TED가 고민한 것은 미국 롱비치에서 열리는 연례행사 이외에도, TED의 가치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각 지역에서 독립적인 행사를 여는 것이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TEDx다. ‘TEDx밴쿠버’라면 ‘널리 퍼뜨릴 만한 아이디어’를 가진 밴쿠버 시민들이 여는 TEDx 행사다. 각 행사의 조직자들에게 라이선스를 부여하며, 기업을 제외한 커뮤니티 행사는 TED와 마찬가지로 동영상 등의 형태로 인터넷에 공개를 원칙으로 한다. 동영상 사이트 유튜브에서 TEDx로 검색을 해보면 5200개의 영상이 나온다. 커뮤니티의 규모에 제한은 없다. 이를 테면 TEDx명동, TEDx연세대학 형태의 행사를 조직하는 것도 가능하다. 실제 ‘TEDx명동’은 애플의 프리젠테이션 프로그램인 ‘키노트사용자모임’이 발전해 만들어진 것이다. 현재 한국의 TEDx 모임은 40여개에 달한다.

열린마음·호기심·관용 ‘소통의 장’
지난해 크리스마스 시즌 수원의 삼성전자 디지털연구소(R4) 로비. 홀에 직원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다. 의자에 앉아 있던 한 남자가 모자를 쓰고 나온다.

지난 2009년부터 전세계적으로 시작된 TEDx 행사에 맞춰 서울에서도 TEDx서울 행사가 열렸다. TEDxSEOUL 제공

마이클 잭슨의 노래 빗잇(Beat it)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한다. 하나, 둘…. 사람들이 순식간에 불어났다. 플래시 몹이다. 이날 플래시 몹 행사를 주도한 것은 TEDx삼성. 사내 동아리 형식의 모임이다. TEDx삼성의 ‘오거나이저’ 중 한명인 송인혁씨(35)는 “‘TEDx 모임이 삼성의 미래다’라는 말도 들었다”고 운을 뗐다. “삼성의 기업문화가 수직적 위계질서를 바탕으로 일사불란한 리더십이라는 소리를 많이 듣잖아요. 개인의 창의성이나 자발성보다는 리더가 이끄는 형태라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데, TEDx는 특정한 누군가가 주도해서 만들어낸다기보다 ‘밑으로부터의 변화’거든요.” 100여명이 모인 플래시 몹 행사가 이러한 ‘변화’를 보여주는 단초라는 설명이다.

TED와 TEDx지역 행사는 사실 독립적이다. 독립적으로 널리 퍼질 만한 아이디어들. 전 세계적으로 지역커뮤니티마다 이런 행사가 퍼진다면? 인터넷을 매개로 공유된 지역의 아이디어는 다시 전세계로 퍼진다. 곽인호씨(33·회사원)는 지난 TEDx서울 컨퍼런스 행사 때부터 현장 진행을 맡았다. 곽씨는 “처음에는 TED를 잘 모르는 상태에서 참여했다”고 말했다. “알음알음으로 참여했는데, 정작 행사 때가 되니 하는 일이 없어서 미안했어요. 그래서 손을 들고 이벤트 현장 진행을 해보겠다고 했지요.” 그는 TEDx 행사에 참여할수록 강연을 넘어서는 어떤 것을 배우게 된다고 말했다. “단순한 아이디어가 아니에요. 도움을 받을 수도 있지만, 또 도움을 줄 수도 있습니다. 사업 아이템을 얻을 수도 있지만, 아이디어가 각자의 삶과 접목해서 보다 좋은 세상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되는 힘 같은 것을 느낀다고나 할까요.” 류한석씨는 모임을 진행하면서 “TED의 의미가 과연 뭘까”를 곱씹어 고민했다. “최근 들어서 그 의미는 세가지라고 정리했어요. 첫째는 열린 마음입니다. 저 사람은 나와 생각이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선입견을 갖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호기심이에요. 나와 완전히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신을 확장하는, 일종의 트이는 경험입니다. 셋째는 관용입니다. 상대방이 어떻게 하더라도 받아들이고 움직이는 것, 그런 것이 서로 섞이면서 영감을 얻어갈 수 있는, 그런 것들입니다.”

TEDx서울 ‘오거나이저’인 이유진씨(33·회사원)는 2월 미국 롱비치에서 열리는 ‘TED 액티비티’ 컨퍼런스 때 ‘오픈더빙 프로젝트’라는 것을 제안해보려고 한다. “우리는 인터넷으로 TED 강의를 볼 수 있지만, 사실 전세계적으로 인터넷 사용인구는 그리 많지 않거든요. 이를 테면 아프리카 수단의 경우 사용언어가 아랍어입니다. 수단의 지역주민들이 인터넷에 접속하기란 쉽지 않죠. 그래서 이를 테면 아랍어로 더빙해 비디오테이프나 카세트테이프로 좋은 생각을 보급하면 어떨까 하는 문제의식이지요.” 이 프로젝트를 수행하려면 더블데크 같은 카세트 녹음 장비가 있어야 하는데 의외로 구하기 쉽지 않다. 하지만 수소문해보면 아직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작은 ‘기여’가 사회를 바꾸는 것이다. 이씨는 “TED를 만나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졌다”고 말한다. 류씨도 그렇다. 어떻게 보면 TED를 통한 만남과 실천이 하나의 세계관이 된 것이다. 송인혁씨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람들이 언제 열정을 가질까를 보면, 그 일이 자기가 잘하는 것, 좋아하는 것인 경우입니다. 게다가 그게 의미있는 일이라면 더 큰 열정을 보이지요. TED는 어떻게 보면 아이디어를 퍼뜨리는 플랫폼입니다. 자기 자신이 무언가 의미있는 일을 한다는 것, 그것이 TED가 우리에게 준 영감인 것 같습니다.”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