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스트 재학생 잇단 자살 ‘등록금 차등제’ 스트레스 의심
“지금과 같은 시스템에서는 정재승 교수님 같은 학자가 나오기 어렵지 않을까요?” 카이스트 박사 과정에 재학 중인 박찬희씨(27)는 등록금 차등제의 문제점을 묻자 이렇게 답했다. 카이스트 출신이기도 한 정재승 카이스트 교수는 학부 재학 중 개설된 교양과목을 모두 섭렵한 것으로 유명하다. 인문·사회 분야와 과학을 접목시켜 과학의 대중화를 일구어낸 과학자다운 일화다.
그러나 박찬희씨의 반문처럼 현재 카이스트 제도 하에서도 이러한 창의적인 인물이 등장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현재 카이스트는 무한경쟁으로 과열돼 있다. 그 핵심엔 등록금 차등제가 있다. 등록금 차등제는 카이스트에서 지난 2007년 도입한 ‘징벌적 장학금’ 제도로 면학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한 서남표 총장의 대표적인 개혁정책이다.
모범답안 베끼고 일부러 질병휴학
등록금 차등제 도입 이전에 카이스트 학생들은 학교에 기성회비만 납부했다. 그러나 등록금 차등제가 실시되면서 성적이 나쁜 학생들은 기성회비 외에도 추가적으로 징벌적 성격의 등록금을 더 내게 됐다. 그 결과 150만원가량의 기성회비 외에 평점 3.0 이하인 학생들은 0.01점이 낮아질 때마다 약 6만원의 추가 수업료를 지불해야 한다. 학점이 2.5일 경우에는 300만원, 2.0일 경우에는 600만원가량의 등록금을 추가로 납부해야 한다. 카이스트는 상대평가로 성적을 내기 때문에 매학기 30% 이상의 학생이 3.0 이하의 학점을 받을 수밖에 없다. 3분의 1가량은 등록금 부담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등록금 차등제는 학생들 간 학점 무한경쟁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정재승 교수처럼 자신의 관심사라는 이유로 교양과목이나 타전공 교과목을 수강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학점이 곧바로 등록금으로 이어질 경우 자신의 전공분야가 아닌 다른 과목을 듣는 것은 엄청난 모험이기 때문이다.
지난 3월 29일 서울 잠원동 한 아파트에서 중간고사를 앞둔 카이스트 4학년 학생이 투신자살했다. 올해만 벌써 세 번째다. 지난 1월 전문계고 출신 1학년 학생이 성적 비관 등으로 학내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3월 20일에는 2학년 학생이 유서를 남기고 숨진 채 발견됐다. 학생들의 잇단 죽음의 배후로 등록금 차등제로 인한 과잉경쟁이 지목됐다.
카이스트는 본래 무학년·무학과 제도를 기본원칙으로 한다. 학문 간 칸막이를 걷어내고 다양한 분야를 접함으로써 창의성을 증진시키기 위해서다. 그러나 차등적 등록금제 실시 이후 학생들은 수강신청을 할 때 ‘학점에 유리한가’를 가장 먼저 고려한다. 자신의 관심사는 뒷전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다.
박찬희씨에 따르면 등록금 차등제 도입 이후 복수전공을 신청하는 학생들도 점점 줄어들고 있다. 박씨는 “지금의 시스템 아래에서는 복수전공은 엄두도 내기 어렵다”고 말했다. 다양한 학문을 접하게 한다는 무학년·무학과의 기본 취지마저 무색해질 수밖에 없다.
동아리 활동이 위축되는 것도 당연한 결과다. 카이스트에서 학부와 대학원 과정을 마친 진보신당 활동가 장주영씨(28)는 “등록금 차등제 이후 학생들이 학점 외에 다른 것에 관심을 가지기 어렵게 됐다”고 말했다. 장씨는 “이전에도 동아리가 많이 줄어드는 추세이긴 했지만 등록금 차등제도 이후 그나마 있던 동아리도 많이 없어졌다”고 전했다. 동아리 활동은 단순한 취미생활이라고 보기 어렵다. 능동적이고 창의적인 자기계발로 이어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카이스트 해커동아리 ‘쿠스’에서 활약했던 졸업생들이 현재는 인젠, 해커스랩, A3시큐리티컨설팅 등에서 손꼽히는 보안전문가로 활약하고 있다.
사제·학생들 관계-장학제도 개선시급
등록금 차등제로 인한 학점경쟁은 오히려 학생들의 실력 저하로 이어진다. 전산학과에 재학 중인 09학번 한모씨(21)는 치열한 경쟁구도가 오히려 학문에 대한 관심을 떨어뜨린다고 말했다. 한씨는 “경쟁이 치열해지다보니 과제할 때도 스스로 고민하기보다는 모범답안을 베껴내는 경우가 많아졌다”고 답했다. 수강신청할 때도 관심분야를 고려하기보다는 학점을 잘 주는 수업만 찾는다. 한씨는 지금 카이스트 생활이 “중·고등학교 생활과 다를 바 없다”고 말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고등학교 때는 입시에 대한 압박으로 점수를 쫓았던 것이고, 카이스트에서는 등록금에 대한 압박으로 학점에 매달린다는 것뿐, 스스로의 관심사와 상관없이 시험점수에만 급급한 것은 매한가지다.
시험에 대한 압박감으로 학생들은 성적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조교로 일하며 시험감독을 했던 박찬희씨는 학점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시험시간에 부정행위도 늘었다고 말했다. 또한 성적이 낮게 나올 경우 이에 대해 항의하는 학생들도 늘어났다. 성적에 따라 등록금이 갈리다보니 성적 정정을 요청하는 기간에 조교와 학생들 사이에 싸움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나아가 중간고사 성적이 만족스럽게 나오지 않은 학생들은 휴학을 선택하는 경우도 있다. 카이스트 학칙상 중간고사 이후에는 4주 진단에 상응하는 질병과 군입대 이외 다른 사유로 휴학을 할 수가 없다. 전산학과 한모씨(21)에 따르면 중간고사를 잘 못 본 학생들 중에는 일부러 병원에서 4주 진단서를 끊어와 질병휴학을 요청하는 경우가 있다. 그렇지 않을 경우 다음 학기에 수백만원의 등록금을 내는 상황이 올 수 있기 때문이다.
세 번째 죽음이 있던 다음날인 지난 3월 30일, 학교 측은 설명자료를 배포해 불행한 일이 재발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그 일환으로 학생들의 고민 해결에 도움을 주기 위한 상담센터의 인력을 증원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카이스트 총학생회장 곽영출씨(24)는 근본적인 대책을 강조했다. 곽씨는 자살 이후 학교에서 진행하고 있는 상담센터 확충도 물론 필요하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는 게 총학생회의 입장이라고 전했다. 무엇보다 학생들을 과도하게 압박하는 차등적 등록금 제도 등 현재 시스템의 개선이 급선무라는 것이다.
정재승 카이스트 교수도 트위터를 통해 근본적인 대책 마련을 강조했다. 정 교수는 “학생들이 학문의 열정과 협력의 아름다움, 창의의 즐거움을 배울 수 있도록 장학금 제도를 바꾸고, 교수-학생, 학생-학생 간의 관계를 개선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정 교수는 “학생들의 일탈과 실수에 돈을 매기는 부적절한 철학에 학생들을 내몰아 가슴이 참담하다”며 학교는 “우정과 환대의 공간”이어야 한다는 말을 남겼다.
<박송이 기자 psy@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