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탈북 청년들은 왜 영국으로 갔나

신자유주의 경쟁 도태 불안감… 영어 배우러 ‘탈남’

북한을 탈출해 한국으로 온 북한 주민들은 2011년 1월 현재 2만539명이다. 1993년 한해 동안 한국에 온 탈북주민들은 8명에 불과했지만, 2006년 이후로는 해마다 2000명 넘는 인원이 북한을 탈출해 남한으로 오고 있다.

탈북 주민의 자녀들이 탈북청소년을 위한 대안학교에서 수업을 듣고 있다. 사진은 지난 2006년 촬영된 것 이다. / 연합뉴스

이들 모두가 한국에 살고 있는 건 아니다. 일부는 한국을 떠나 영국, 미국, 캐나다, 호주, 노르웨이 등 제3국으로 갔다. 이른바 ‘(탈북주민들의) 탈남’이다. 2003년부터 2007년까지 1200여명이 탈남한 것으로 추정된다. 2007년을 기준으로 전체 탈북자(1만2248명)의 약 10%다.

이중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것은 영국으로 탈남한 이들이다. 2007년 한해 동안 탈북주민 410명이 영국 정부에 망명신청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중 상당수는 20대들이다. 20대 탈북청년들은 왜 영국으로 갔을까.

영국으로 간 20대 탈북청년들을 연구한 논문이 나왔다. 고려대 언론학과 박사과정 오원환씨(40)는 지난 6월 완성한 박사학위 논문 <탈북청년의 정체성 연구: 탈북에서 탈남까지>에서 영국으로 간 탈북청년들의 탈남 현상을 탈북청년들의 정체성 형성과정이라는 프레임으로 해석하고, 그 배후에 자리잡고 있는 의미를 분석했다.

‘한국 사람보다 열배 걸어야 산다’
8월 17일 오후 고려대학교에서 오씨를 만났다. 그는 “탈북청년들의 탈남은 한국 사회의 가치관에 적응하지 못한 결과이자 동시에 적응한 결과”라고 말했다. 그가 말하는 한국 사회의 가치관이란 ‘경쟁을 강조하는 신자유주의적 가치관’이다.

오씨는 논문을 쓰기 위해 탈남한 탈북청년 12명과 한국에 거주하고 있는 탈북청년 11명을 만났다. 대부분 그와 개인적인 인연이 있는 청년들이다. 오씨는 2003년 이후 몇 년간 탈북청소년을 위한 대안학교인 똘배학교와 셋넷학교에서 교사로 일했다. 다큐멘터리 작업에 관심이 많아 미국에서 이 분야 석사학위까지 받은 그는 교사일을 하면서 탈북청소년들을 영상으로 기록하는 작업도 병행했다. 2007년 무렵 교사로 일하면서 인연을 맺은 학생들이 한국을 떠나 영국에 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연구를 시작한 것이 이 논문의 발단이다.

오씨는 탈북청년들의 탈남 동기를 문화적 이질성, 경제적 빈곤과 불안, 사회적 관계망의 부실, 정체성 혼란, 가치관의 급격한 변화, 디아스포라적 경험 등 여섯 가지로 분석했다. 동기들은 상호연쇄적으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탈북자들이 탈남하는 데 원인을 제공했다.

빈곤은 탈북주민들이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현실이다. 탈북자 가족의 월수입에 대한 조사(2010년 기준)에 따르면, 가족 전체 수입(근로소득, 정부보조금, 민간지원금 등)이 100만원 이하인 가족이 44%에 이른다. 월수입이 300만원 이상인 가족은 약 3.1%에 불과하다. 직업적으로도 단순노무직과 서비스판매직에 종사하는 이들의 비중이 87%를 넘는다.

경제적 빈곤은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이어진다. 2007년 탈남해 영국으로 떠난 유재우(가명)씨는 이렇게 말했다. “한국 사람은 월급을 제대로 받으면서도 애 하나 키우기 힘들다. 그 사람들과 비교하면 나는 엄청나게 어려운 거다. 앞길이 캄캄하고 뭘 어떻게 해야 될지도 모르겠고….” 2007년 영국으로 간 성일권(가명)씨는 “한국에 있을 때는 괜히 급해졌다. 노력을 하는데도 한국사람들은 자꾸 더 다그쳤다. ‘한국사람이 한 발 걸을 때 너희는 열 걸음을 걸어라. 그래야 살 수 있다.’ 이런 걸 강조하니까 괜히 심란해졌다”고 말했다.

탈북자에 대한 한국 사회의 차별적 시선도 한몫 한다. 2007년 탈남한 손남영(가명)씨는 “북한사람이라고 얘길 하니까 좀 눈초리가, 사람들이 보는 눈이… 아무튼 좀 이상하게 보는 그런 거”라고 말했다. 탈북자들은 한국인과 비교해서는 물론이고 중국 동포들에 비해서도 낮은 급여를 받는 경우가 허다하다.

빈곤과 차별적 시선은 탈북자들이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현실이다. 탈북청년들에게 직접적인 좌절의 경험을 안겨주는 건 한국 사회의 신자유주의적 가치관인데, 그것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장소는 바로 대학이다. 오원환씨는 “탈북청년들은 배움에 대한 열망과 한국 사회 정착의 지름길이라는 기대를 품고 대학에 진학하지만, 기업이 요구하는 인재가 되기 위한 과정에서 이들이 느끼는 가장 높은 벽은 영어의 벽”이라고 말했다.

체제 선전 도구에서 가난한 타자로 소외

고려대학교 언론학과 박사과정 오원환씨. / 정원식 기자

논문에 등장하는 탈북청년들은 10대 시절 북한을 떠나 중국을 거쳐 한국에 들어왔다. 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정상적인 교육을 받을 여건이 되지 않았으므로, 대부분 초급 수준의 영어 실력에 머문다. 재외국민특별전형을 통하면 대학 진학까지는 자신의 노력으로 가능하다. 그러나 문제는 대학 강의를 듣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대학 영어강의는 물론이고 영어 교재를 사용하는 일반적인 강의를 따라잡는 것은 역부족이다. 2006년 탈남해 미국으로 떠난 고미희(가명)씨는 “교수님들이 강의시간에 다 영어를 쓴다. 나는 잠도 안 자고 열심히 메모를 했는데도 성적이 나빴다”고 말했다.

오원환씨의 설명이다. “2000년 이후 탈북자 입국이 급증했고 대학에 진학하는 탈북청년의 수도 늘기 시작했다. 탈남은 그로부터 5년 뒤인 2007년 정점에 이르렀다. 한국 사회에 체류한 지 4~5년 지난 시점이다. 한국 사회에 익숙해지는 시점에 탈남한 것이다. 한국 사회의 경쟁적 삶의 방식에 힘들어하고 대학생활을 하면서 무엇보다 영어 실력이 부족함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영국 등으로 영어를 배우러 가는 것은 탈남의 명분이 됐다.”

그렇다면 왜 ‘탈남’이라는, 한국인들이 보기에는 극단적인 방법을 택했을까. 오씨는 “한국사람들이 보기에는 극단적인 방법이지만 탈북청년들이 삶의 여정에서 경험한 탈국경의 경험과 비교하면 극단적인 선택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조사대상 청년들은 대부분 영국을 선택했다. 영국의 경우 2007년까지만 해도 난민신청 수용률이 다른 국가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았기 때문이다. 탈남한 탈북청년들은 영국에 여행 형식으로 입국해 망명신청을 했다. 영국 정부는 난민 자격을 얻은 이들에게 주택 알선 및 생활비 일부 보조 등의 혜택을 제공했다.

결국 한국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영어의 장벽을 넘어서야 한다는 절박함과 경제적 빈곤, 선진국에서의 더 나은 삶에 대한 기대 등이 복합적으로 맞물린 결과가 탈북청년들의 탈남이라는 얘기다.

영국으로 떠난 탈북청년들 중 일부는 돌아오지 않았다. 영국 사회에서 하층계급의 노동을 전담하면서 영어를 배우는 일이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탈남의 원인이 영어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한국 사회 자체로부터 탈출하는 데도 있었기 때문이다.

오씨가 우려하는 것은 한국 사회의 신자유주의적 가치관이 통일 논의에 미치는 영향이다. 그는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통일문제를 민족문제가 아니라 경제적 문제로 바라보게 만들었다. 권위주의 정권 하에서 탈북주민들은 체제 선전의 도구로 활용됐지만,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진행된 지금 탈북자들은 ‘민족 내부의 가난한 타자’가 됐다”고 말했다.

* 기사에 인용된 탈북청년들의 증언은 오원환씨의 논문에서 수정 인용한 것임을 밝힙니다.

<정원식 기자 bachwsik@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