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디지털 기억]보존 권리만큼 잊혀질 권리도 있다

인터넷에 남아 있는 사적정보 노출 방지위해 삭제권한 법제화 움직임

‘울랄라 세션’의 가수 고 임윤택씨가 최근 세상을 떠난 뒤 한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를 중심으로 고인의 과거를 들춰내며 모욕하는 글들이 올라와 논란이 일었다. 임씨를 모욕하는 게시글을 올린 작성자들은 글마다 임씨가 생전 방송 등에서 밝힌 본인의 과거 행적에 관한 연예뉴스 기사나 동영상 등을 퍼다 나르며 작성자의 입맛에 맞춰 임씨를 비방하는 데 활용했다. 임씨의 사후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그에 관한 인터넷 상의 정보들이 일방적인 공격을 위한 도구로 둔갑한 것이다. 더 큰 문제는 비방 목적으로 작성된 게시글 역시 디지털 세계에 계속 남아 긴 시간이 흐른 뒤 왜곡된 사실을 알릴 수 있다는 위험이다.

한 인터넷 사용자의 안경 너머로 구글 검색창이 보인다. 구글과 같은 검색엔진의 검색 결과에 사적인 개인정보가 무방비로 노출돼 있어 ‘잊혀질 권리’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 이석우 기자

인터넷 상의 기록을 보존해 ‘기억을 보존할 권리’만큼이나 주목받고 있는 문제는 ‘잊혀질 권리’에 관한 것이다. 임씨처럼 고인이 된 사람이나 유명인이 아니더라도 누리꾼들의 ‘신상털기’의 대상으로 지목되면 인터넷 이곳저곳에 남아 있는 정보를 바탕으로 직업과 나이, 주소와 같은 신상이 밝혀지는 것은 시간문제다. 웹사이트에 남겨진 사적인 정보 때문에 시간이 흐른 뒤에도 개인의 사적 정보가 노출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잊혀질 권리’를 법제화하자는 움직임이 나오는 것은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가 반영됐기 때문이다.

“자신이 쓴 게시물 삭제권한 보장해야”
‘잊혀질 권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가운데 새누리당 이노근 의원은 지난 2월 12일 인터넷에 글을 올린 사용자가 온라인 서비스업체에 자신의 저작물에 대한 삭제를 요청할 수 있고, 이를 요청받은 서비스 제공자는 확인 절차를 거쳐 즉시 삭제토록 하는 내용을 담은 저작권법과 정보통신망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대표발의했다. 현행 저작권법으로는 인터넷에 올린 글이나 사진은 저작물로 간주되는데, 사용자는 자신의 저작물에 대해 복제와 전송 중단 요구를 할 수는 있어도 삭제 요청을 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마련돼 있지 않았다. 또 현행 정보통신망법에서도 ‘사생활 침해나 명예훼손이 있는 경우’에만 삭제 요청을 할 수 있도록 한정해 자신의 게시물이 공개돼 해를 입게 될 경우에도 서비스업체에 삭제를 요청할 권한이 제한되고 있다. 이 의원은 “정확하지 않은 정보나 밝혀지기 꺼려하는 개인 신상까지 무분별하게 전파되어 억울한 사례가 발생하고 있다”며 “자신이 쓴 저작물은 자신이 삭제할 수 있는 최소한의 권한은 보장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개정안 역시 게시물을 작성한 본인만이 삭제 요청을 할 수 있도록 해 타인이 작성한 게시물로 해를 입을 경우를 대비한 방안이 빠져 있다. 이미 네이버·다음·구글 등 사용자가 집중된 대형 포털 사이트들은 작성자 본인이 삭제를 요청할 경우 받아들이고 있어 타인이 작성한 게시물에 대한 삭제 요청까지 포함하는 보다 실질적인 대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반면 지난해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가 발표한 개인정보보호규정안은 ‘잊혀질 권리’의 범위에 자기가 게재한 자신의 정보를 비롯, 링크 및 복사, 제3자가 게재한 글에 들어간 자신의 사적 정보까지 포괄적으로 포함시켰다. 고려대 법학연구원의 민윤영 연구원은 “개인정보보호법에는 개인정보의 삭제 및 파기를 ‘요구’할 권리가 주어져 있을 뿐 유효기간이 지난 정보가 자동으로 삭제됨으로써 잊혀질 권리가 적극적으로 규정되고 있지 않다”면서 특히 기업 등이 수집하는 개인정보에 대해서도 “개인정보의 수집·이용·제공만이 언급돼 있고 삭제·파기가 명시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서 개인정보보호법이 개인정보의 적극적인 사용에 더 쏠려 있고 삭제와 파기라는 또 다른 중대한 영역에 대해선 균형 잡힌 관심을 보이지 못한다”고 밝혔다.

고 임윤택씨의 경우와 같이 사망한 사람의 개인정보보호 문제 역시 제도상의 허점이 있다. 개인정보보호법 제2조에 나온 개인정보의 정의는 “개인정보란 ‘살아 있는’ 개인에 관한 정보”라고 규정했다. 잊혀질 권리는 대체로 사용자가 기억하거나 인식하지 못하는 의외의 곳에서 나온 사적 정보를 발견할 때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게시물에 대한 삭제 요청 권한을 가진 본인이 사망한 뒤 고인의 사적 정보가 유포될 경우엔 법적으로 대처할 수 없게 되는 문제가 남는다. 앞서의 개정안을 따르더라도 임씨의 명예를 훼손하는 게시물 때문에 유족들이 입을 수 있는 피해를 막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타인이 작성한 게시물 삭제요청은 안 돼
한편 EU를 비롯, 세계 각국에서 개인정보보호를 위해 ‘잊혀질 권리’에 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지만 정보통신기술의 발달에 따라 제도가 현실을 따라가지 못해 생기는 격차는 더 커지고 있다. 국가의 경계를 벗어나는 클라우드 컴퓨팅 기술의 경우 문제 발생 시 어느 국가의 법률을 적용해야 할지가 모호하다. 스마트폰과 SNS를 통해 수집된 개인의 위치와 이동정보 등의 정보 역시 빅데이터로 가공되지만 초국적 기업을 규제할 만한 국제사회의 실질적 방책은 미흡한 실정이다.

오히려 지난 1월 구글과 페이스북 등이 EU의 정책 결정권자들을 대상으로 개인정보 정책의 완화를 요구하는 로비활동을 펼쳐왔다는 EU 개인정보보호위원장의 비판이 영국 파이낸셜타임스에 보도된 바 있다.

빅데이터가 기업의 영리 추구나 국가의 통제 강화 목적으로 사용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개인정보를 대중으로부터만이 아니라 국가와 기업으로부터도 잊혀질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 민윤영 연구원은 최근의 상황이 “공공기관과 민간기구를 망라해서 흩어져서 노출되어 있는 개인정보를 하나로 규합해 개인들이 통제하지 못하는 무한대의 개인정보들이 특정 기관의 통제 아래로 들어가게 될 수도 있는 현실”이라며 “문제가 발생하기 전에 미리 적극적으로 그런 사태를 예방하고 적절한 법적 규율을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