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ose

[현대사 아리랑]부러져버린 ‘인민의 고무래’ 박헌영 ①
글자작게 글자크게
  •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약관의 21세 조선 최초 공산주의자 되다

이게 자네의 얼굴인가?
여보게 박군, 이게 정말 자네의 얼굴인가?
알코올 병에 담가논 죽은 사람의 얼굴처럼
마르다 못해 해면같이 부풀어 오른 두 뺨
두개골이 드러나도록 바싹 말라버린 머리털
아아 이것이 과연 자네의 얼굴이던가


‘상록수’의 작가로 유명한 심훈(沈薰, 1901~1936)이 1927년 12월 2일에 쓴 시다. ‘박군의 얼굴’이라는 제목인데, 심훈의 슬픔과 노여움은 격렬하게 이어진다.

4년 동안이나 같은 책상에서
벤또 반찬을 다투던 한 사람의 박은 교수대 곁에서 목숨을 생으로 말리고 있고
C사에 마주앉아 붓을 잡을 때
황소처럼 튼튼하던 한 사람의 박은 모진 매에 창자가 꿰어서 까마귀 밥이 되었거니.
이제 또 한 사람의 박은
음습한 비바람이 스며드는 상해의 깊은 밤
어느 지하실에서 함께 주먹을 부르쥐던 이 박군은
눈을 뜬 채 등골을 뽑히고 나서
산송장이 되어 옥문을 나섰구나.


남북 노동당을 하나로 만든 북한 노동당대회에 참석한 박헌영(왼쪽).


시에는 세 사람의 ‘박’이 나온다. ‘C사’는 비타협 민족주의자들이 몸담고 있던 ‘시대일보’로 보인다. ‘교수대 곁에서 목숨을 생으로 말리고 있’는 첫 번째 박군은 일본 황태자를 암살하려 했다는 이른바 대역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20년째 복역 중인 박열(朴烈, 1902~1974)이고 두 번째 박은 제2차 공산당사건으로 잡혀 끔찍한 족대기질(고문)을 당하던 끝에 죽은 박순병(朴純秉, 1901~1926)이다. 그리고 세 번째로 ‘눈을 뜬 채 등골을 뽑히고 나서 산송장이 되어 옥문을 나선 박’은 박헌영(朴憲永, 1900~1956)이다. 문학비판가 최원식(인하대 교수)의 연구에 따른 것인데, 시는 치떨리는 노여움을 넘어 굳은 마음다짐으로 이어진다.

박아 박군아 XX(헌영)아!
사랑하는 네 안해가 너의 잔해를 안았다
아직도 목숨이 붙어 있는 동지들이 네 손을 잡는다
이빨을 악물고 하늘을 저주하듯
모로 흘긴 저 눈동자
오! 나는 너의 표정을 읽을 수 있다
오냐 박군아
눈을 빼어서 갈고
이는 이를 뽑아서 갚아주마!
너와 같이 모든 X을 잊을 때까지 우리들이 심장의 고동이 끊칠 때까지.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1년 후배인 심훈이 노엽고 슬픈 목소리로 부르짖은 박헌영은 2년 만에 병보석으로 감옥을 나와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심신상실’이라는 병명이었으니, 자기 배설물을 먹는 따위의 미친 증세를 심하게 보였던 까닭이다. 다음은 동아일보 1927년 10월 21일치 기사다.

“서대문형무소 독감방에서 신음 중인 조선공산당사건 피고의 한 사람인 박헌영은 그동안 병세가 더욱 높아서 정신이 전혀 상실되어 식음을 전폐한 데다가, 더구나 독을 마시려고 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므로, 형무소에서는 만일을 염려하여 두 손에 고랑을 채워서 경계 중이라는데, 이인, 허헌, 김병로, 후루야 네 변호사는 15일 오전에 재판소 당국에 보석원을 제출하였다는데, 병세가 그와 같이 위중한 터이므로 보석이 허가될 듯하다더라.”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가들이 받은 족대기질은 참으로 끔찍한 것이었다. 박헌영의 증언이다.

“우리들 중 누군가가 체포되기만 하면 그는 곧바로 예비심문이 이루어지는 경찰서의 비밀 장소로 끌려가게 된다. 일제 경찰은 연행된 사람으로부터 증거를 수집하기 위해 냉수나 혹은 고춧가루를 탄 뜨거운 물을 입과 코에 들이붓거나, 손가락을 묶어 천장에 매달고 가죽 채찍으로 때리거나, 긴 의자에 무릎을 꿇려 앉힌 다음 막대기로 관절을 때리거나 한다. 7, 8명의 경찰이 큰 방에서 벌이는 축구공놀이라는 고문도 있다. 이들 중 한 명이 먼저 ‘희생양’을 주먹으로 후려치면, 다른 경찰이 이를 받아 다시 또 그를 주먹으로 갈겨댄다. 이 고문은 가련한 ‘희생양’이 피범벅이 되어 의식을 잃고 바닥에 쓰러질 때까지 계속된다.”

북한·소련 경제문화 협정조인에 박헌영(맨 오른쪽)이 당시 북한 부수상 겸 외상이 김일성(왼쪽 두번째)과 함께 북한 대표로 참석한 모습.

박헌영은 충남 예산군 광시면 서초정리에서 태어났다. 서당에서 한문 공부를 하다가 대흥보통학교를 나와 16살 때인 1915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들어갔다. 졸업하던 해에 일어난 3·1만세운동에 들었는데, 심훈이 이즈음 박헌영의 모습을 그린 것이 있다.

“사나이다운 검붉은 육색(肉色)에 양 미간에는 가까이 못할 위엄이 떠돌았고 침묵에 잠긴 입은 한 번 벌리면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었더니라.”

고보를 나온 다음 해 잡지 ‘녀자시론’에 편집원으로 들어갔는데, 이것이 뒤에 그를 ‘미제의 첩자’로 몰아붙이게 되는 빌미가 된다. ‘미제국주의 고용간첩 박헌영 리승엽 도당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 전복 음모와 간첩 사건 공판문헌’이라는 것을 보자.

“피소자 박헌영은 1919년경 서울에서 잡지 ‘녀자시론’의 편집원으로 있을 때부터 동 잡지를 주간하는 친미분자 차마리사와 기독교 선교사로서 연희전문 교원(후에 교장)으로 있던 미국인 언더우드와의 친교를 이용하여 숭미사상을 품게 되었고 1925년 11월 초순 일제 경찰에 체포되자 변절하여 각지의 지하 비밀조직을 고백하고 지도적 간부들을 고발함으로써 일제의 주구로서 조선혁명운동 탄압에 복무하였으며 그 대가로 ‘정신착란’이라는 구실 밑에 ‘보석’의 명목으로 석방되었고 1939년 9월에는 대전형무소에서 일제 앞에 혁명운동을 완전히 포기하고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한 ‘사상전향’을 표명하고 출옥하였다.”

여기서부터 박헌영의 이른바 ‘정권전복음모’와 ‘간첩사건’들이 장황하게 이어지는데, 한마디로 줄이면 일제 때는 일제의 사주를 받는 일제 간첩이었고, 미제 때는 미제의 사주를 받는 악질반동 미제 간첩이었다는 것이다. ‘녀자시론’은 제4호까지 발간되었던 월간 잡지였는데, 확인되지 않는 제2호를 빼고는 어디에도 박헌영의 자취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연구자들의 결론이다.

박헌영은 1920년 9월 고학을 해볼 작정으로 일본 동경으로 가서 두 달 동안 물색하다가 실패하고 나가사키를 거쳐 중국 상해로 간다. 친구인 김단야(金丹冶, 1900~1938)의 주선으로 이동휘(李東輝, 1873~1935)와 김만겸(金萬謙, 1886~?)이 지도하는 이르쿠츠파 고려공산당에 들어가 공산주의운동을 시작한다. 1921년 4월 상해상과대학에 들어갔으나 학자금을 댈 수 없어 서너 달 만에 그만두고, 고려공산청년단을 거쳐 고려공산당에 들어간다. 고려공산당은 이동휘, 김만겸, 안병찬(安炳瓚, ?~1922), 여운형(呂運亨, 1886~1947), 조동호(趙東祜, 1892~1954) 등이 주도하던 이르쿠츠파를 말한다.

박헌영은 당에서 내는 비합법 기관지 ‘올타’ 편집을 하면서 당에서 운영하던 사회주의연구소에서 사상연구에 힘쓴다. 같은 해에 주세죽(朱世竹, 1898~1953)과 내외가 되었다. 1930년 심훈이 첫 장편소설 ‘동방의 애인’을 쓰는데, 이 소설의 주인공 김동렬은 박헌영을, 김동렬의 연인 강세정은 주세죽을 모델로 한 것이다. 심훈은 그때 항주에서 대학을 다녔는데, 마음속으로부터 존경하고 두려워하는 벗 박헌영을 만나 혁명운동에 가담하기도 하였던 피끓는 청춘이었다. ‘동방의 애인’을 보면 박헌영의 삶이 몹시 궁핍한 것으로 그려져 있는데, 심훈은 뒷날 쓴 ‘박군의 얼굴’이라는 시에서 박헌영과 관계를 이렇게 읊었다.

“음습한 비바람이 스며드는 상해의 깊은 밤 어느 지하실에서 함께 주먹을 부르쥐던(사이었다.)”

1920년 11월부터 1922년 3월 말까지, 21살부터 23살까지 16개월 동안 박헌영에게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가장 큰 것은 고려공산청년단 결성에 참가하여 그 비서 자리를 맡은 것과 고려공산당에 들어감으로써 조선 최초의 공산주의자가 된 것이었지만, 그것에 못지않게 큰 일은 혼인을 한 것이었다.

왼쪽_박헌영-주세죽 부부. 오른쪽_김일성이 북한 방소단을 이끌고 모스크바 역에 도착해 연설하는 모습.


주세죽. 함남 함흥 출신으로 홀어머니 밑에서 여학교를 나와 상해에서 음악학교를 다니고 있던 주의자였다. 박헌영은 모두 세 차례 공식, 비공식 혼인을 하게 되는데, 호적에 적힌 것으로는 두 살 더 많은 주세죽이 첫사랑이다. 박헌영 22세, 주세죽 24세. 이제 기준으로 보면 아직 어린 나이지만 그때에 뜻있는 이들은 10대 중·후반이면 벌써 혁명가의 길로 들어서고 20대로 접어들면 이미 당당한 혁명맹장이 되는 가열찬 혁명의 시대였다.

개인사 쪽으로만 보자면 박헌영은 불행한 남자였다. 세 차례 혼인을 했지만 식구들과 정답게 살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배다른 아들 둘과 딸 둘을 두었지만 2명만 살아 남았다. 주세죽과 사이에서 난 딸 비비안나(1928~ )는 모이세예프 무용단 무용수를 하다가 모스크바에 살고 있고, 1939년 출옥한 다음 지하생활을 하던 충북 청주 비밀 아지트에서 ‘해방일보’ 주필로 유명한 정태식(鄭泰植, 1910~ )의 5촌 조카로 ‘하우스키퍼’를 하던 두 번째 부인 정순년(鄭順年, 1920~?)에게 낳은 아들 박병삼(朴秉三, 1941~ )은 조계종 이름으로 중노릇을 하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부수상 겸 외상으로 있던 1949년 평양에서 혼인한 세 번째 부인 윤레나한테서 낳은 딸 나타샤와 아들 세르게이는 그 자취를 모른다. 내무성 지하감옥에 3년 동안 갇혀 있던 박헌영이 1956년 7월 19일 평양 근교 숲 속에서 처형되기 직전 “집사람과 어린 두 자식은 외국으로 보내주겠다는 언약을 지키라”는 말을 김일성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했다는데, 어떻게 되었는지 알 길이 없다. 윤레나는 조선공산당 3대 이론가의 하나로 ‘노력인민’ 주필이었던 조두원(趙斗元, 1905~?)의 처제였다.

1922년 4월 2일, 국내에 혁명 거점을 마련하려고 압록강변 안동으로 갔다가 왜경에게 붙잡혔다. 상해 트로이카인 김단야, 임원근(林元根, 1900~1963)과 함께였다.

서울로 올라간 것은 평양 감옥에서 1년 10개월 징역을 마친 다음날이었다. 1월 20일, 이즈음 주세죽과 함께 고향으로 내려갔고, 어머니가 성대한 혼례식을 새로 올려주었다. 이때가 무지갯빛 강철 같은 세계적 혁명가 박헌영에게는 짧지만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었다.

<김성동>
김성동 | 1947년 충남 보령에서 태어나 19세에 출가, 10여 년간 스님으로 정진했다. 1978년 소설 ‘만다라’로 ‘한국문학 신인상’을 수상하고, 소설집 ‘집’ ‘길’ ‘국수’ 등을 냈다. 현재 경기 양평에서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 그는 앞으로 본지를 통해 님 웨일즈의 ‘아리랑’보다 훨씬 감동적인 필체로 현대사에서 사라진 인물을 찾아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을 할 예정이다.


관련기사

[현대사 아리랑]바로가기

ⓒ 주간경향 & 경향닷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인쇄
  • |
  • 댓글
  • |
  • 목록
  • 뉴스홈
  • |
  • 이전페이지로 돌아가기
  • |
  •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