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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아리랑]부러져버린 ‘인민의 고무래’ 박헌영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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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여론조사서 대통령감 1위로

월북 전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시절의 박헌영.


1925년 4월 17일 열린 조선공산당 창립대회에 ‘화요회 야체이카’ 대표 자격으로 참석한 것은 ‘동아일보’ 지방부 기자로 있을 때다. 초대 책임비서는 김재봉(金在鳳, 1890~1944)이다. 다음 날 열린 고려공산청년회 제1차 창립대표회를 김단야·조봉암(曺奉岩, 1899~1959)과 함께 치렀고 사흘 뒤에 열린 고려공청중앙간부회에서 책임비서로 선임됐다. 8월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로 들어갔다가 두 달 만에 해직됐는데, 사회주의 기자를 해직하지 않으면 발행 정지 처분을 해제하지 않겠다는 총독부의 희망에 따른 것이다.

10월 25일 한양청년연맹 주최로 ‘반기독교 대강연회’가 열렸다. 이때 강사와 강연 제목은 김단야 ‘기독교의 기원’, 박헌영 ‘과학과 종교’, 홍순준(洪淳俊) ‘기독교는 미신이다’, 김평주(金平主) ‘대중아 속지 말아라’, 박래원(朴來源) ‘양면양심의 기독교’다. 박헌영은 또 ‘개벽’에 ‘역사상으로 본 기독교의 내면’이라는 글을 발표했는데 줄거리를 보면 대략 이렇다.

“종교는 과학과 생산기술이 낙후한 조건에서 형성되었다고 한다. 기독교는 봉건 사회에서는 제후의 이익을, 자본주의 사회에 와서는 자본가 계급의 이익을 옹호하는 도구로 기능했다. 야만 미개의 나라에 파견되어 이교도들에게 복음을 전파한다는 선교사는 몸에 촌철의 무기도 갖지 않은 정예 병사로서 제국주의 영토 확장의 첨병 구실을 한다.”

11월 29일, 박헌영은 아내 주세죽과 함께 종로경찰서에 체포됐다. 신의주형무소에 수감되어 악랄한 고문과 취조를 받던 중 주세죽은 약 3주 만에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고, 박헌영은 열차편으로 서울로 압송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 박헌영이 쓴 ‘죽음의 집, 조선의 감옥에서’의 한 대목이다.

“내가 있었던 모든 감옥의 각 방에는 침대는 물론 의자도 없었고 맨바닥에 가마니만 깔려 있었다. 방 안의 온도는 보통 영하 5~6℃였다. 하루 평균 10시간 이상 어망을 짜는 노역에 시달렸다. 수인들은 방한 효과가 전혀 없는 아주 얇은 겉옷 한 장을 입고 지냈다. 산책 시간은 전혀 없었고 목욕도 일 주일에 한 번밖에 할 수 없었다. 독서가 허용되는 책은 불교나 기독교 등의 종교서적과 일본인들이 발행하는 팸플릿 정도였다. 편지와 면회는 두 달에 한 번 허락해주었다. 음식으로는 대두(大豆)로 만든 맛없는 수프에 종종 소금에 절인 배추가 나왔다.

박헌영(왼쪽)이 여운형과 대화하는 모습.

감옥의 규율을 위반하는 사람에게는 책을 압수하고 독방에 집어넣고 급식을 줄였다. 이외에도 손발을 묶고 짐승처럼 매질을 했다. 경찰서를 거쳐 오는 정치범들 가운데서 건강한 상태로 감옥에 들어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감옥에서 형편없는 음식과 힘겨운 노역으로 건강을 결정적으로 해하게 된다. 이로 인해 박순병·박광흠·박길양과 권오산 같은 프롤레타리아 용사들이 감옥에서 사망했다.”

양광(佯狂)이라는 것이 있다. 거짓으로 미친 척함으로써 잘못된 세상과 그런 세상에서 단물이나 빨아먹는 속악한 자들을 한껏 조롱하는 것이다. 기개 높던 옛 선비들이 쓰던 방편이었다. 세조 쿠데타에 온몸으로 저항했던 매월당(梅月堂)이 그러하였다. 매월당의 그것은 그러나, 반정(反正)을 위한 구체적인 실천이 따르지 않는 유가 먹물의 슬픈 몽니에 지나지 않았다. 박헌영의 그것은 달랐다. 양광을 담보로 삶을 얻어냈던 것이다. 그 길밖에 길이 없었다. ‘심신상실’ 판정을 받아 병보석 판정을 얻어낸 ‘세계사적 개인’이 함흥에서 배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간 것은 1928년 8월, 29살 난 세계적 혁명가의 위대한 탈출이었다.

‘통일 후 북한 동포와 함께 부르고 싶은 노래’ 가운데 첫 자리를 차지하는 게 ‘눈물 젖은 두만강’이라고 한다. 김용호라는 이가 노랫말을 쓴 것으로 되어 있는데 그가 누구인지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런데 이 노랫말을 지은 이가 노래를 부른 가수 김정구의 친형 김용환이라고 주장하는 이가 있다. 박헌영과 정순년 사이에서 태어난 원경 스님이다. 박헌영의 탈출 소식을 두만강 근처에서 들은 음악 천재 김용환은 두만강으로 갔다고 한다. 그리고 푸른 강물 위에서 빈 배를 젓는 뱃사공을 보았고 배를 타고 탈출했다는 박헌영의 모습이 겹치면서 음악적 영감이 떠올랐다는 것이다. 민족 해방을 위하여 온몸을 던져 싸우다가 강을 건너간 인민의 벗 박헌영이 돌아오기를 애태게 기다리는 마음이 절절히 녹아 있는 노랫말이다. 박헌영이 바로 ‘그리운 님’이었다는 것이다. 진위를 알 수 없지만 가슴을 후벼파는 이야기다.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젓는 뱃사공
흘러간 그 옛날에 내 님을 싣고
떠나간 그 배는 어디로 갔소
그리운 내 님이여, 그리운 내 님이여
언제나 오려나

강물도 달밤이면 목메어 우는데
님 잃은 이 사람도 한숨을 지니
추억에 목메인 애달픈 하소
그리운 내 님이여, 그리운 내 님이여
언제나 오려나

님 가신 강 언덕에 단풍이 물들고
밤 깊은 두만강에 밤새가 우니
떠나던 그 님이 보고 싶구려
그리운 내 님이여, 그리운 내 님이여
언제나 오려나


1948년 박헌영, 김일성 등이 묘향산에 놀러가서 찍은 사진.


모스크바로 간 박헌영은 레닌대학에 들어가고 주세죽은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들어간다. 박헌영은 주세죽에게 ‘코레예바’라는 러시아 이름을 지어주었는데, 이는 ‘조선 여자’라는 뜻이다. 박헌영은 레닌대학을 마친 다음 상해로 갔다. 조선공산당 재건을 준비하라는 코뮌테른의 지시에 따른 것이다. 1933년 7월 5일, 박헌영은 일본 영사관 경찰에 체포됐다. 6년 징역을 살고 나온 것은 1939년 9월이다.

박헌영이 대전형무소에서 징역을 살던 1937년 11월 5일, 김단야가 소련비밀경찰에게 체포된다. 일제 경찰의 밀정이라는 이유였다. 곧바로 처형된 김단야는 스탈린 공포정치의 희생양이었다. 조선공산당원이었던 김춘성이라는 자가 투서를 했는데, 김단야는 한때 혁명운동에 참가한 적이 있으나 그것은 ‘부유한 집안의 젊은이’가 젊은 혈기로 혁명을 가지고 놀았던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1922년 이후 체포된 동지들이 동일한 사건으로 중형을 선고받았는데도 불구하고 김단야가 가벼운 형을 받거나 무사히 도주할 수 있던 것이 밀정이었음을 증명한다는 것이다. 박헌영 또한 그로부터 19년 뒤 비슷한 이유로 처형되니, 똑같은 논리요 똑같은 수법이다. ‘아리랑’으로 유명한 김산, 곧 장지락(張志樂, 1905~1938)이 그러하였고 조명희(趙明熙, 1894~1942)가 그러했다. 스탈린문학상을 받았다고 서울 친구들이 축하모임을 연 것이 해방 다음 해였는데, ‘낙동강’의 작가 조명희가 일제 첩자로 몰려 처형된 것은 그 4년 전이다.

박헌영이 상해에서 붙잡혀 조선으로 끌려간 다음 모스크바로 가서 김단야와 재혼한 주세죽도 체포됐다. ‘사회적 위험분자’로 지목되어 5년간 카자흐스탄에서 유배생활을 한 주세죽은 형기가 끝난 다음에도 보호감호법에 묶여 1946년까지 유배지를 벗어날 수 없었다.

“박헌영 선생은 빨리 나타나서 우리들의 지도에 당(當)하라!
지하에 숨어 있는 박헌영 동무여! 어서 나타나서 있는 곳을 알려라! 그리하여 우리의 나갈 길을 지도하라!”
8·15 이후 서울 종로 네거리에 나붙은 삐라였다. 전남 광주 시내 한 벽돌공장에 4년간 노동자로 위장 취업해 있던 박헌영이 전주형무소에서 나오는 김삼룡(金三龍, 1910~1950)과 함께 서울로 올라온 것은 8월 18일이다.

박헌영(맨 오른쪽)이 김일성(오른쪽 두 번째) 등과 함께 국제여성총회에 참석해 손뼉을 치는 모습.

경성콤그룹 동지 중심으로 감옥에서 나오고 지하에서 솟아나온 순정한 공산주의자들이었는데, 박헌영·이주상·이관술·김삼룡·이현상·홍증식·김형선·권오직·최원택 등 20명 안쪽이었다. 인류 역사에 그 유례가 없는 일제의 야수적 폭압 아래서도 꿋꿋하게 절개를 지켜낸 주의자들 거의 전부였다. 이들 공산주의 핵심 역량들은 곧바로 조선공산당재건위원회를 만들고 기관지 ‘해방일보’를 펴낼 것을 결의한다. 사회주의 선도국 소비에트와 연계를 구축하기 위하여 소련 부영사 샤브신과 접촉했는데, 다음은 샤브신 부인인 역사학자 샤부시나가 본 박헌영의 첫 인상이다.

“지식인다운 외모와 다소 멋쩍어하는 듯한 미소,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주위를 살피는 태도(지하활동의 오랜 습관으로 인한 듯)와 침착하고 과묵함, 이와 더불어 왠지 각별히 무게가 있어 보이는 모습. 이러한 특징들이 두드러졌다.”

박헌영은 미국 군용기를 타고 귀국한 이승만과 민족통일 문제를 놓고 회담했다. 이승만은 친일파의 즉각 숙청에 반대하며 독립국가 수립을 뒤로 미루자고 했고, 박헌영은 친일파 숙청 문제는 잠시도 미룰 수 없는 민족사의 엄숙한 명령이라고 반박했다. 이처럼 좌우의 역사 인식이 뚜렷하게 갈라지니, 민족 분단 비극은 이미 예정된 명운이었다.

이우적(李友狄)·정태식(鄭泰植)과 함께 조선 공산당 3대 이론가였던 조두원(趙斗元)이 쓴 글이 있다. 박헌영을 가리켜 ‘조선 인민에게 가장 사랑받는 지도자요, 친일파들에게는 가장 미움받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처할 때마다 위대한 지도자가 나타났는데, 수제국 침략을 격퇴한 을지문덕과 당제국 침략을 물리친 연개소문과 임진왜란의 영웅 이순신 장군을 보기로 들었다. 그런 다음 일제 강점 36년간의 민족사 절명 위기에 나타나 나라를 구한 사람이 박헌영이라고 했다.

박헌영이 즐겨 쓴 이름은 이정(而丁)이다. ‘고무래가 되겠다’는 말이다. 평등하고 자유로워서 행복한 불을 지펴야 되는 인민의 아궁이를 꽉 막고 있는 극우세력 잿더미를 긁어내는 고무래가 되겠다는 다짐에서 썼던 이름이다.

박헌영은 여론 조사에서 대통령감 1위로 뽑힌 사람이다. 여운형이 2위고 3위는 이관술이다. 이승만과 김구는 그 한참 밑이다. 그런 이정이 북으로 올라간 것이 1946년 9월 29일. 그의 나이 47세였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역사에 가정은 필요없는 하나 객담이지만 그의 월북 자체가 이미 패배를 안고 들어간 것이다. 그는 조직이 있는 남반부에서 버텼어야 했다. 남로당 무장력이던 이현상 항미빨치산 부대가 무너져버린 것은 1953년 9월이다.

<김성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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