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릭TV]‘쪽대본’ 때문에 배우들 아우성

“요즘은 ‘하류’가 진짜 하류(下流)가 된 것 같다.”

SBS 월화극 <야왕>에서 하류를 연기하는 배우 권상우가 지난 3월 13일 자신의 팬 카페에 남긴 글이다. 그는 “하류가 된 것 같다”는 글 뒤에 “연기하기도, 음 여러 가지로 스트레스. 대본이 잘 나오길 바랄 뿐이고…”라는 내용을 덧붙였다.

‘대본이 잘 나온다’는 말의 뜻은 두 가지일 것이다. 대본이 제때 잘 나온다는 뜻과 제대로 된 내용으로 잘 나온다는 의미일 것이다. 두 가지의 의미를 모두 포함할 수도 있겠으나, 전자에 더 무게가 실린다. 그 근거를 말하려면 지난 2월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SBS<야왕> | SBS 제공

지난 2월 18일 홍콩스타 청룽(成龍·성룡)이 영화 <차이니즈 조디악>를 홍보하기 위해 한국을 찾았다. 이날 기자회견에는 영화에서 청룽의 파트너로 등장하는 권상우도 함께 참석할 예정이었으나 오지 못했다. 현장에 있던 권상우 소속사 대표는 “드라마 제작진이 당초 예정 시간보다 늦게 촬영을 끝내줬다. 오늘, 내일 방송해야 할 장면이기 때문에 중단할 수도 없었다”면서 “권상우도 드라마 사정 때문에 다른 약속이 무시되는 상황에 화를 많이 냈다. 한국 드라마 상황이 너무 힘들다”고 설명했다. 청룽은 “난 권상우에게 어떤 중국 드라마나 CF가 좋을지 조언해주는 권상우의 중국 매니저 격”이라는 말로 우정을 과시했다. 한국의 소속사 대표도, 중국 매니저 격이라는 청룽도 드라마 <야왕>의 촬영 시간은 어쩌지 못했다.

대본이 제때 잘 나오지 않고, 촬영도 늦어지다 보면 웬만큼 성실한 배우도 한계에 다다른다. 대본을 충분히 보고 대사를 숙지할 시간이 없는데, 이에 대한 책임은 연기자가 고스란히 져야 한다. 이 때문에 배우들에겐 대본이 제대로 잘 나오는 게 생존의 문제다.

지난해 ‘2012 MBC 연기대상’에서 조승우는 “영화나 뮤지컬 무대에만 서다 드라마 현장을 오게 됐는데 잘 못하겠더라. 대본도 늦게 나오고 밤도 새우고 있다. 빨리 이 작품을 다 끝내고 (뮤지컬) 무대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했다. <대장금>으로 드라마 한류를 일으킨 ‘사극 대가’ 이병훈 감독의 <마의> 현장도 참혹함은 마찬가지인 것이다.

MBC <마의> | MBC 제공

박근형은 지난해 KBS2 <추적자>가 끝난 후 tvN <백지연의 피플인사이드>에 출연해 쪽대본을 받으며 밤샘 촬영하는 까닭에 정작 자신은 본방송을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가끔 연출부한테 농담처럼 ‘작가한테 얘기 좀 해줘라. 종방연 파티할 때 내가 꼭 따귀 한 대 때리겠다’고 말한다. 이런 상황에도 누구 하나 불평하지 않고 열심히 해주는 건 고마운 일이지만 제작체제는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노배우가 ‘따귀’라는 표현을 쓸 정도로 사람 잡는 절박한 상황인 셈이다.

아무리 연기를 잘하는 명배우라도 시간에 쫓기면 어떻게 더 노력해볼 도리가 없다. 그럼에도 드라마 관계자들은 시청자의 반응을 보고 발빠르게 대처하는 게 한국 드라마의 힘이라고 말한다. 시청자와 소통이 잘 된다는 뜻이다. 마지막 최선을 다해 고치다보니 대본이 늦는 것이라는 한 방송사 드라마 국장의 말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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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희경 작가의 SBS <그 겨울, 바람이 분다>를 보면 그 드라마 국장의 말이 옳은 것은 아닌 듯싶다. 지난해 11월부터 촬영을 시작한 이 드라마는 첫 회가 방영될 때 이미 8회분까지 촬영을 마친 ‘반 사전 제작 드라마’였다. 넉넉한 시간은 드라마의 후보정작업을 위해 쓰였다. 유독 화면이 예쁘다는 말이 나오는 것도 이 덕분이다. ‘생방송 드라마’ 제작 여건 상에선 불가능한 일이라고 했다. 올해 일흔이지만 여전히 정상의 자리를 지키는 김수현 작가도 종영 일주일 전에 이미 마지막 촬영을 끝낸다. 배우들이 아우성칠 정도로 절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이 꼭 한국 드라마의 경쟁력은 아닌 것 같다.

<박은경 경향신문 대중문화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