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명]‘가쯔라-태프트 밀약’은 현재진행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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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러시아 견제 위해 미·일간 제2의 밀약 가능성 제기

1924년 존 홉킨스 대학의 테넷 역사학 교수는 미 의회도서관에서 충격적인 외교문서를 발견했다.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일본이 인정하는 대신 일본의 조선 지배를 미국이 묵인하는 내용을 담은 1905년의 밀약이었다. 을사늑약을 맺기 4개월 전에 미국과 일본이 몰래 맺은 이른바 가쯔라-태프트 조약은 20년 후에야 뒤늦게 발견됐다.

정부, 미국에 공개질의 꺼려

100년이 지난 2005년 동북아에서 강대국끼리 이해타산을 따져 밀약을 맺는 일이 가능할까. 즉 제2의 가쯔라-태프트 조약이 또다시 있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에서 최근 당시와 100년이 지난 현상황이 비교되고 있다. 당시 러시아의 남하 저지를 위해 미국과 일본이 손잡아 동북아 질서를 재편했다면, 100년이 지난 지금은 중국의 거대화를 견제하기 위해 미·일 동맹이 강화되고 있는 상황. 미국이 동북아 구상에서 일본의 주도권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흐름을 잡아가면서 100년 전 밀약의 최대 희생자인 한국으로서는 과거 역사를 다시 되짚어 봐야 한다는 정치인과 학자들의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가쯔라-태프트 조약은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의 특사였던 태프트 육군장관과 당시 일본 총리인 가쯔라 백작 사이에 맺었다. 미국의 필리핀 지배와 일본의 조선 지배를 서로 양해한다는 것이 주요 내용. 11월 16일 맺어진 을사늑약의 사전단계인 셈이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굳건한 영·일동맹과 미국의 양해하에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게 된 것이다.

조약에서도 가쯔라 총리는 ‘일본은 조선이 구태로 돌아가 일본으로 하여금 다시 외국과의 전쟁을 돌입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그런 상황을 저지하기 위해 단호한 수단을 취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고 명시했다. 여기에 대해 태프트 육군장관은 ‘일본이 조선에 대하여 종주권을 확립하고 조선이 외국과 조약을 체결하려면 일본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는 것이 이번 전쟁의 결론’이라는 취지의 말을 했다. 이 말은 태프트 장관의 개인적인 의견이라고 나타나 있지만 루즈벨트 대통령은 곧 바로 전보를 보내 밀약이 미 정부의 공식적인 뜻임을 표명한다.

밀약 체결 당시 우리나라와 미국 사이에는 1882년 체결된 조·미수호통상조약을 맺고 있었다. ‘제3국으로부터 불공경모(不公輕侮)하는 일이 있을 경우에 서로 도운다는 제1조의 규정을 미국이 스스로 어긴 셈이다. 김삼웅 독립기념관 관장은 “우리나라의 주권은 미국이 일본의 조선 지배를 양해한 가쯔라-태프트 밀약 때 이미 넘어갔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가쯔라-태프트 조약이 맺어진지 100년이 되는 날이었던 7월 29일. 서로 다른 두 곳에서 조용한 움직임이 있었다. 한국민족종교협의회와 한민족운동단체연합 등의 단체에서는 서울시립역사박물관에서 학술세미나를 가졌다. 국회에서는 열린우리당 김원웅 의원 등 12명의 국회의원이 이 밀약의 공식적 폐기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발의했다. 이들 국회의원은 당시 밀약에 대한 미·일 양국 정부의 사과를 촉구했다.

외교통상부는 김 의원에게 제출한 서면답변서에서 “가쯔라-태프트 밀약은 비밀회담내용을 기록한 각서(memorandum)로 정식조약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강대국이 약육강식의 논리에 따라 우리 의사에 반하여 이러한 밀약에 합의한 것은 부당했다”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정부는 밀약에 대한 사과와 폐기 요청에 대해서는 “일본의 진주만 공격과 필리핀 침공으로 이미 그 의미를 상실했다고 보며 양국에 사과와 폐기를 요청하는 것은 검토하지 않고 있다”고 답변했다.

조약의 공식폐기 요구 결의안을 대표 발의한 김원웅 의원은 “정부의 답변은 미국 정부의 입장을 배려한 것으로 본다”면서 “하지만 정부가 못한다면 우리라도 미국에 공식적으로 공개 질의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미국에 대한 사과 요구에 대해서는 각기 다른 의견이 제시되고 있다. 이장희 외국어대 교수(법학과)는 “밀약은 비망록 또는 각서 수준으로 정식 조약이 아니라고 보기 때문에 무효화됐느냐는 법적 관점에서 볼 것이 아니지만 무효화를 요구하는 정치적 행위로서는 의미가 있다”면서 국회의 결의안 발의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역사는 유사하게 진행된다”

하지만 연세대 동서문제연구원 김우준 교수는 “가쯔라-태프트 조약의 책임을 지금에 와서 당사국에 물을 필요는 없다”면서 “당시 제국주의 세력인 미국과 일본이 맺은 일종의 약속일 뿐”이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오히려 가쯔라-태프트 조약의 현재적 지향점을 지적하면서 “이 밀약은 우리가 현 국제정세에서 어떻게 교훈으로 삼고 대비해야 하는지를 말해준다는 점에서 여전히 유효하다”고 말했다.

조약의 공식폐기 요구 결의안에서도 국회의원들은 “최근 미·일 안보동맹 강화가 가쯔라-태프트 밀약과 근본적으로 동일한 발상과 동기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고 환기시켰다. 김삼웅 독립기념관 관장은 “역사의 되풀이는 똑같이 된다는 것이 아니라 유사하게 진행된다는 점을 이야기한다”면서 “현재의 동북아 상황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제2의 가쯔라-태프트 조약에 대해서는 학자들은 두 가지 가능성에 우려의 시선을 보내고 있다. 첫번째가 러시아와 중국의 세력 확대 견제를 위해 미국이 동북아에 있어 일본의 주도권을 인정해주는 것. 최근 미국이 주일미군을 강화하고 주한미군을 기동군화하는 흐름도 여기에 속한다. 게다가 러시아와 중국 양국의 군대가 합동훈련을 실시하는 것도 미국과 일본의 동맹을 더욱 결속시켜 동북아의 긴장을 초래하는 상황으로 몰고 갈 수도 있다. 김원웅 의원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이 일본을 중요시한다면 다시 100년 전의 상황을 되풀이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동북아 문제와 관련해 한국이 배제된 채 미·일이 일방적으로 전략을 결정하는 제2의 가쯔라-태프트 조약의 개연성이 충분하다는 것이다.

김우준 교수는 “부시 대통령과 고이즈미 일본 총리의 결속을 주의깊게 볼 필요가 있다”면서 “우리는 한·미동맹을 계속 유지시켜 나가면서 러·중과 미·일 양세력이 긴장관계에 들어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 교수는 “이를 위해 이들 국가와 남북한 모두 참여하는 동북아 다자안보체제의 구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다른 또 하나는 북한에서 돌발적 상황이 벌어질 경우 미국과 중국 사이에 있을지도 모를 밀약의 가능성이다. 김삼웅 관장은 “중국은 최근 두만강변에 군대를 배치하고 동북공정을 추진하는 등 앞으로의 한반도 상황을 대비하고 있다”면서 “유사시 북한에서 맞부딪치게 되는 미국과 중국이 우리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어떤 식으로 타협하려 할지 우려가 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이장희 교수는 “미국과 중국이 북한을 두고 제2의 가쯔라-태프트 조약을 맺을 수도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면서 “때문에 과거 100년 전의 가쯔라-태프트에 대한 우리의 입장이 지금은 분명하게 제시돼야 한다”고 말했다.

<윤호우 기자 hou@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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