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히스패닉 여성 ‘새 판례’가 되다

미국 대법관 지명 받은 소토마요르… 인종장벽 허문 첫번째 선례 남겨

‘흑인 대통령, 백인 부통령, 히스패닉 대법관 지명자’.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지난 5월 26일 히스패닉 여성 소니아 소토마요르(54) 제2연방항소법원 판사를 연방대법관으로 지명했다. 소토마요르는 히스패닉으로는 처음이자 여성으로는 세 번째 대법관 지명자다. 소토마요르가 상원 인준을 통과하면 9명의 대법관으로 구성되는 미국 연방대법원의 여성 대법관 수는 2명으로 늘어난다. 5월 중 사임하는 데이비드 수터 연방대법관의 후임으로 일하게 될 소토마요르는 이로써 오바마 대통령에 이어 인종 장벽을 깨고 미국 사회 최상층부에 도달한 또 하나의 선례를 남길 것으로 보인다.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푸에르토리코 이민자
오바마 대통령은 지명 발표 연설에서 자신과 비슷하게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공부한 소토마요르의 개인사에 대해 공감을 표시하며 “인생의 장애물을 통해 단련된 경험과 축적된 지혜 및 그동안의 판결 경험” 등을 높이 평가했다. 또 “소토마요르는 출신 등이 우리 인생에 큰 장애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줬다”며 “미국에서 불가능한 꿈은 없다”고 힘줘 말했다.

소토마요르의 부모는 푸에르토리코 출신 이민자다. 남동생을 포함한 그의 가족은 히스패닉 저소득층 집단 거주지역인 브롱크스데일 공동주택단지에서 살았다. 영어를 하지 못했던 아버지는 공장에서 일하다가 그가 9세 때 사망했다. 어머니는 간호사로 주 6일 일하며 어렵게 그와 남동생을 키우면서도 자식 교육에 열성을 쏟았다.

그는 8살 때 당뇨병 진단을 받기도 했지만 어머니의 열성으로 법률가가 되겠다는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친지와 교사의 도움으로 장학금을 받아 프린스턴대학에 진학해 최우등으로 졸업했으며 예일대 로스쿨에서는 학회지 편집장을 맡았다.

졸업한 후에는 뉴욕지방 검찰청과 로펌에서 일하다 조지 W. H. 부시 대통령에 의해 1991년 지방법원 판사로 지명됐다. 오바마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평범한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에 대해 알고 재판에 임한 법률가”라고 소토마요르를 소개한 것은 이 같은 개인사를 두고 한 말이었다.

이날 오바마 대통령이 대법관 지명을 발표하는 단상 앞에 앉아 있었던 소토마요르의 어머니는 역경을 이기고 아메리칸 드림을 성취한 자신의 가족 이야기가 소개되자 북받치는 감정에 목이 메이는 모습을 보였다.

중도 또는 진보적 성향으로 분류되는 소토마요르가 대법관으로 인준되면 국가안보, 낙태, 동성애, 개인정보보호 등 문제에서 새로운 목소리를 낼 것으로 기대된다. 미국 연방대법관은 임기가 없는 종신직이며, 연방대법원은 우리나라의 대법원과 헌법재판소를 합친 역할을 하며 일상 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지명 전 오바마 대통령이 “대법관 구성의 다양성과 인구 비례를 고려하겠다”고 밝힌 점 등을 볼 때 여성·히스패닉 기용으로 사회의 다양한 목소리를 반영하겠다는 의지를 짐작할 수 있다. 소토마요르는 코네티컷주 뉴헤이븐시의 소방관 진급 심사에 대해 “흑인들이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하는 불평등한 제도”라며 폐지토록 한 진보적 판결로 유명하다.

이번 지명을 히스패닉 사회는 일제히 환영했다. 오바마 대통령의 당선이 흑인들에게 희망이 된 것처럼, 소토마요르가 히스패닉 사회에 새로운 희망을 주게 된 것이다. 교육열이 낮은 저소득층으로 여겨졌던 히스패닉들이 자신들도 사회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오를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 히스패닉계인 가브리엘 레무스는 “히스패닉들이 정치·사회적으로 특정 수준에 도달하고 있으며, 이것이 정부 차원에서도 인정받고 있다”고 기뻐했다.

고민에 빠진 공화당
미국 일간지 USA투데이는 “여성, 히스패닉, 노동자 계급 출신인 소토마요르의 배경을 둘러싼 논란이 여름을 뜨겁게 달구게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보수 진영은 “인종과 성별 등 개인적인 배경을 판결에 적용시키고 있다”며 지명자의 소수자 우대 성향 등을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경험이 풍부한 히스패닉이 백인보다 나은 결론을 내리기도 한다” “법관의 역할은 법을 만들고 해석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항소법원은 정책을 만드는 곳이다” 등 소토마요르의 과거 발언도 보수 진영에 공격받는 단골 메뉴다.

보수적인 공화당 역시 지명자가 못마땅하지만 인준 과정에서 어느 수준으로 반대 투쟁을 해야 할지를 놓고는 고민에 빠졌다. 지명자를 심하게 공격할 경우 히스패닉과 여성 유권자의 지지를 잃을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히스패닉은 미국 내에서 인구가 가장 빠르게 늘어나고 있는 집단이다. 그만큼 정치적 영향력도 커지고 있어서 지명자 공격이 히스패닉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여질 경우 공화당 입장에서는 잃는 것이 더 많을 수 있다. 지난해 대선 패배 이후 아직도 구심점을 찾지 못하고 있는 공화당이 자칫 더 큰 위기에 빠질 우려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진보적 성향의 대법관 후보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철회하면 보수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당의 기본 입지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 공화당은 일단 청문회를 철저히 진행하겠다고 밝혔지만 상원에서 민주당이 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인준 거부는 현실적으로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공화당은 청문회에서 일단 “지나치게 공격적이지는 않더라도 철저하고 꼼꼼하게 지명자의 자질을 검증할 것”이라고 밝힌 상태다.

오바마는 “9월 첫째주 월요일인 노동절 전에 소토마요르가 업무를 시작할 수 있기 바란다”면서 “의회가 휴정에 들어가는 8월이 되기 전에 인준을 신속히 처리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래야만 새 대법관 임기가 시작되는 10월 5일부터 소토마요르가 다른 대법관들과 함께 판결 대상에 올릴 사건을 선정하는 데 참여할 수 있다. 이 시기에 맞추기 위해서는 청문회가 7월 중에 열려야 하며, 상원은 의회가 휴정에 들어가는 8월 첫째주 이전에 투표해야 한다.

상원에서 59석을 갖고 있는 민주당은 지명 확정을 충분히 얻어낼 수 있지만, 공화당이 투표를 막기 위해 의사방해연설(필리버스터)을 하는 것까지 막기에는 역부족이다. 이에 따라 조 바이든 부통령, 람 이매뉴얼 대통령 비서실장 등을 선두로 백악관이 적극적으로 나서 상원 의원들에게 인준안 통과를 요청하고 있다.

<국제부·임영주 기자 minerva@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