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차베스 사회주의’ 멈추지 않는다

차베스의 인기 비결은 자본이 아니라 사람, 그 중에서도 빈곤층 중심의 정책에 있다.

베네수엘라 우고 차베스 대통령(58)이 10월 7일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돼 연임에 성공했다. 1999년부터 14년간 대통령을 역임했고 향후 6년 임기가 추가된다. 20년간 장기 집권하는 셈이니 대통령 한 사람이 길어야 8~10년을 재임하는 서구의 시각에서 차베스는 ‘독재자’나 마찬가지다.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이 10일 수도 카라카스 선거관리위원회에서 당선확인증을 받은 뒤 연설하고 있다. 카라카스=AP연합뉴스

4선 성공, 6년임기 추가 20년 집권
그러나 단순히 독재자로 치부하기에 차베스는 인기가 많아도 너무 많다. 이번 대선 투표율은 2006년 대선 때의 74.69%보다 높은 80.94%였다. 뉴욕타임스는 이 투표율이 수십년 만에 최고치라고 했다. 득표율도 54,42%를 기록해 44.97%를 얻은 야권 후보 엔리케 카프릴레스(40)보다 10%포인트 가량 앞섰다.

차베스 측이 투표함 바꿔치기라도 한 것일까. 베네수엘라의 투표 방식은 유권자가 디지털 지문 인식기를 통해 신원을 확인한 뒤 터치스크린을 눌러 지지후보를 고르도록 되어 있다. 부정행위가 일어나기 어렵다. 그렇다면 차베스가 언론을 장악해 여론을 유리하게 조작한 것일까. 미국 워싱턴 경제정책조사센터의 마크 웨이스브로 대표는 뉴욕타임스 기고문에서 “베네수엘라 언론 상당수가 차베스에게 적대적”이라고 말한다. 차베스는 민주국가에서 연달아 네 차례 유권자들의 선택을 받은 것이다.

차베스의 인기 비결은 자본이 아니라 사람, 그 중에서도 빈곤층 중심의 정책에 있다. 차베스는 베네수엘라가 남미 최대 산유국이란 이점을 활용해 석유를 수출하고 여기서 번 돈을 빈곤층을 위한 경제·사회정책에 쏟아부었다. 차베스 집권 기간 베네수엘라 빈곤층은 50%, 극빈곤층은 70% 감소했다. 대학 입학자 수는 2배 이상 늘었고, 수백만명이 생애 처음으로 의료 서비스를 받았다. 국민연금 가입자는 4배 증가했고, 실업률은 절반 가량 떨어졌다. 대선 당일 투표소에서 외신기자들에게 ‘차베스를 지지한다’고 밝힌 유권자들을 보면 차베스가 어떤 사람들을 대변하고 있는지 더욱 명확해진다. 그들은 빈곤층, 젊은이, 유색인종, 장애인이었다.

자본의 이익을 대변하지 않는 정치인을 서구 금융계가 반기지 않으리라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로버트 졸릭 전 세계은행 총재는 대선 전 “차베스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호언했다. 영국 금융그룹 바클레이스도 “이번 대선은 야권 후보 카프릴레스를 위한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베네수엘라 유권자들은 금융자본의 기대를 배반하고 차베스식 사회주의 혁명에 변함없는 지지를 보냈다. 차베스는 남미를 할퀸 신자유주의의 상처를 치유하고 남미가 서구에 종속되지 않고 자립할 가능성을 보여준 정치인이었다. 진보 성향의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차베스는 선출직 정치인 중에서 가장 성공한 급진좌파”라며 “그의 승리는 21세기에 적합한 경제·사회적 대안이 결국은 존재한다는 점을 세계에 웅변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중남미 국가 좌파동맹 유지 큰 힘
차베스는 베네수엘라 국경을 넘어 대륙 전체를 하나의 좌파동맹으로 만들었다. 지난 10여년간 중남미 여러 국가에서 좌파 혹은 중도좌파 정치인들이 집권했다. 에콰도르의 라파엘 코레아 대통령과 볼리비아의 에보 모랄레스 대통령, 니카라과의 다니엘 오르테가 대통령 등이 차베스의 동지로 꼽힌다. 브라질에서도 노동자 출신 루이스 이냐시오 룰라 다 실바가 2003년부터 대통령직을 8년 역임하고 물러난 뒤 같은 당 지우마 호세프가 2011년 당선됐다. 이들 역시 차베스와 마찬가지로 빈곤을 퇴치하는 데 역점을 두고 있다.

차베스 대통령의 지지자들이 10일 카라카스 선관위에서 당선확인증을 받은 차베스를 향해 환호하고 있다. 카라카스=AP연합뉴스

차베스의 4선은 중남미의 이 같은 흐름을 공고하게 유지하는 데 큰 힘이 될 것으로 보인다. 당장 내년 2월 에콰도르가 대선을 치른다. 2007년 집권한 코레아는 빈민층을 중심으로 지지기반을 강화했다. 차베스의 승리는 에콰도르 야권에 결정적 타격이 될 수 있다.

2014년 3선에 도전하는 볼리비아의 모랄레스도 지지율이 30%대로 내려앉은 처지라 차베스의 도움이 절실하다. 차베스는 2005년 대선 때도 모랄레스의 선거운동을 지원했고, 모랄레스가 취임한 후엔 베네수엘라의 정책 노하우를 전수했다. 모랄레스는 선거 결과가 발표된 10월 8일 “차베스의 승리는 베네수엘라 민중을 위한 승리일 뿐 아니라 라틴아메리카와 볼리바르 동맹을 위한 승리”라며 축하했다. 코레아도 트위터에 “베네수엘라 만세, 위대한 조국 만세, 볼리바르 혁명 만세”라는 글을 썼다.

암수술 두차례, 건강에 대한 우려 커
물론 차베스의 베네수엘라가 마냥 장밋빛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차베스는 만성적인 식량·전기 부족과 높은 강력범죄율, 다변화하지 못한 산업구조 등의 문제를 해소하지 못했다. 서구 경제전문가들은 베네수엘라 정부가 2012년 국내총생산(GDP)의 15%에 이르는 재정적자를 기록한 점, 인플레이션율이 18%나 되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시설투자가 뒷받침되지 않아 석유산업의 생산력이 감소하고 있는 것도 차베스 정부의 안정성을 위협하고 있다.

차베스 개인에게도 문제가 있다. 차베스는 지난 1년여간 암수술을 두 차례 받았다. 올 초에도 쿠바를 오가며 항암치료와 방사선치료를 받았다. 차베스는 자신의 건강에 대한 의구심을 떨쳐버리기 위해 지난 7월 기자회견을 열고 “암에서 해방됐다”고 선언했다. 선거운동 기간엔 수도 카라카스 거리에서 비를 맞으며 춤추는 모습을 선보이며 건재함을 보여주고자 애썼다. 그러나 수술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암이 완치됐다고 단언하기 이른 시점이다. 몇 년 내에 암이 재발한다면 6년 임기를 채우지 못할 수 있다.

대선을 앞두고 차베스는 유권자들에게 “그간 저질렀던 실수들을 인정한다”며 “당선된다면 더 나은 대통령이 되겠다”고 약속했다. 앞으로 6년은 국정을 운영하기가 과거보다 쉽지 않을 것이다. 야권은 적전분열했던 지난 대선들과 달리 통합후보를 내세우며 차베스를 압박했다. 야권 후보 카프릴레스가 패배하긴 했으나 그가 얻은 44.87%의 득표율은 결코 낮은 수치가 아니다. 이번이 4선이기 때문에 그간 차베스를 통제불가능하고 비민주적인 반미주의자로 바라봤던 서구 언론의 공세도 강화할 것이다. 차베스는 남미 사회주의 운동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의 성패 여부가 남미 정치의 앞날을 좌우할 수 있다. 차베스는 그 어느 때보다 거센 도전에 직면해 있다.

<최희진 경향신문 국제부 기자 daisy@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