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프로야구는 팬 손 안에 있소이다

관중 600만 시대 ‘이유있는 비난’… 성적 부진 LG·감독 경질 SK ‘곤욕’

프로야구 관중 600만 시대가 눈 앞이 다. 지난해 세운 역대 최다관중 592만8626명을 훌쩍 뛰어넘어 650만 관중을 돌파할 것으로 한국야구위원회(KBO)는 확신하고 있다. 풍성해진 수치만큼이나 프로야구 팬층이 견고해지고 있는 가운데 각 구단은 인기 못지 않게 책임감도 커졌다.

8월 18일 오후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2011 프로야구 두산과 LG의 경기. LG가 5-3으로 패하자 LG 팬들이 입구를 막고 선수와 코칭스태프를 기다리고 있다. / 연합뉴스

잘했을 때 나오는 칭찬이 늘었지만, 잘못했을 때 따르는 비난도 거세졌다. 8월 14일 LG 트윈스 선수들과 코칭스태프는 경기가끝난 뒤 잠실구장 중앙문으로 나오지 못했다. 여름 이후 가파른 내림세로 9년 만의 포스트시즌 진출이 불투명해진 것에 대해 박종훈 감독과 선수 대표의 해명을 요구하는 LG 팬 500여명이 진을 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필이면 구단 고위층과 저녁 회식이 잡혀 있는 날이었다. LG 선수단은 이런저런 대처 방안을 논의할 틈도 없이 침통함을 가슴에 담고 오른쪽 외야 담장으로 연결된 뒷문으로 도망치듯 빠져나가야 했다.

그로부터 나흘 뒤인 18일 잠실경기에서도 LG 팬은 경기 후 잠실구장 중앙문 앞을 지켰다. 선수단도 이번에는 그냥 빠져나갈 수 없었다. LG 박종훈 감독이 작심한 듯 팬들 앞으로 나왔다. 확성기를 들고 남은 시즌 최선을 다할 것을 직접 다짐한 뒤에야 팬들을 돌려보낼 수 있었다.

감독과 구단이 팬 달래기 직접 나서
프로야구 인기 상승과 함께 보다 강력해진 팬의 힘이 구단과 선수단을 움직이고 있다. LG 선수단은 청문회 뒤로 김기태 수석코치를 필두로 집단 삭발을 하는 등 땅에 떨어진 명예를 되찾으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였다.

프로야구 팬들의 움직임은 80년대 초창기에도 다른 종목에서는 찾아보기 힘들 만큼 유별났다. 홧김에 구단 버스를 불태우는가 하면, 청문회를 요구하며 구장 출입문을 파손하기도 했다. 그라운드에 뜨거운 라면 국물이 날아드는 등 위험천만한 상황도 꽤 나왔다. 90년대 이전만 해도 심심찮게 나오던 풍경이다.

그때와 비교하면 요즘 팬의 움직임은 꽤 조직적인 데다 이성적인 편이다. 구단을 향한 메시지는 보통 구호 또는 플래카드에 담는다. LG 청문회에서도 ‘DTD, LG 가을야구는 또 내년입니까’, ‘66685876’(LG 최근 8년 팀순위) 근성 없는 공놀이’란 문구들이 중앙문 앞에 떴다. 최장기간 포스트시즌 실패사를 쓰고 있는 LG의 현실을 개탄하고, 분발을 촉구하는 내용들이었다.

SK 와이번스의 인천문학구장 관중석도 플래카드로 도배됐다. 8월 18일 김성근 감독을 전격 경질한 구단을 향해 직격탄을 날리는 내용들이었다.

김 감독은 지난 4년간 한국시리즈 4차례 진출에 3차례 우승을 이룬 이력을 남겼다. 그러나 재계약에 대한 구단의 지그재그식 행보가 김 감독을 불편하게 하며 결별 수순에 이르게 했다. 유례 없이 좋은 성적을 낸 사령탑을 해고한 것은 어떤 식으로든 비상식적 처사였다. 지난 4년간 승승장구하는 구단의 모습에 기뻐했던 팬들은 스탠드 시위로 대응했는데 SK 또한 이에 직접 반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8월 23일 오후 프로야구 두산-SK 경기를 앞둔 인천문학구장에 경호원들이 배치되고 있다. 인천문학구장에서는 지난 18일 김성근 감독 경질에 항의하는 관중들이 운동장에 난입해 유니폼을 태우는 등 집단행동을 벌였다. / 연합뉴스

SK 신영철 사장은 팬들의 노기가 가라앉을 기미를 보이지 않자 지난 8월 24일 문학 두산전에 앞서 취재기자들을 상대로 인터뷰를 자청했다. 김 감독 해고 배경을 놓고 돌고 있는 갖가지 얘기에 대한 사실 관계를 해명하며 팬들이 마음을 돌려주기를 희망하는 메시지였다. 90도 가까운 인사로 인터뷰를 하는 등 팬을 달래기 위한 행동도 곁들여졌다.

이 같은 풍경은 프로야구 인기가 지금처럼 상승곡선을 긋는 한 앞으로도 종종 나올 것으로 보인다. 누가 봐도 이해가 어려운 팀성적, 그리고 상식 이하의 행동이 나왔을 때는 언론만큼이나 팬들이 속도를 내 시정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팬들이 조직화·세력화돼 가고 있는 것은 커뮤니티의 발달 때문이다. 수년 전만 해도 팬들 사이의 소통은 구단 홈페이지와 몇몇 사이트의 대화 공간으로 한정됐지만, 최근에는 트위터 등 각종 SNS(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의 진화로 팬들간 교류가 활발해지고 있다.

팬들이 만든 선수 애칭 언론이 받아 사용
집단 시위 등 순발력 있는 움직임이 가능해진 것이 바로 SNS 덕분. 김성근 감독이 경질된 바로 그날 저녁 문학구장 스탠드가 시위의 물결로 뒤덮인 것 또한 매스컴에만 의존해 구단 소식을 접했던 과거에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일이다.

언론의 역할 일부가 팬들의 몫으로 넘어간 것도 있다. 프로야구 선수들의 애칭 또는 별명, 트렌드를 담은 신조어 등은 언론이 만드는 게 아주 일반적이었지만, 이제는 팬들이 만들어놓은 것을 언론이 받아서 키우는 흐름으로 바뀌어가고 있다. ‘무등산 폭격기’ 선동열, ‘국민타자’ 이승엽 등 전통의 애칭들은 언론의 산물이다.

그러나 최근의 것들은 아니다. 올 시즌 유행했던 한화 이글스 한대화 감독의 별명 ‘야왕’이 대표적이다. 아울러 삼성 라이온즈 류중일 감독이 시즌 초부터 부진했던 용병 라이언 가코를 두고 “나는 가코 믿을 거야”라고 한 얘기가 ‘나믿가믿’으로 화제가 되고 언론에 심심찮게 소개된 것도 야구팬이 중심이 된 네티즌이 만든 용어다.

LG를 힘들게 하는 용어인 ‘DTD’(‘내려갈 팀은 내려간다’는 네티즌 용어)도 마찬가지다. ‘Down team is down’의 약자로 네티즌이 만들어낸 용어가 초반 질주 뒤 약세 상황을 맞은 LG의 시즌 페이스와 비유되며 널리 확산됐다.

이 말은 원래 김재박 전 감독이 현대 유니콘스 지휘봉을 잡고 있던 2005년 초반 상승세를 보인 롯데의 미래를 두고 “내려갈 팀은 내려간다”고 언급하면서 비롯됐다. 그러나 당사자인 김 전 감독이 2007년 LG 사령탑을 맡으면서 매시즌 중반 이후 내림세를 탄 것을 배경으로 그 말이 유행어가 되고, DTD라는 신조어가 탄생한 것은 촌철살인 포인트를 잡아낸 팬들의 작업이었다.

팬들의 목소리는 갈수록 커지고 있다. 이제 그 목소리에 팀의 운명과 선수의 이미지, 그리고 구단 관계자의 미래까지 달라질 수도 있다.

<안승호 스포츠경향 기자 siwoo@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