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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길 교수 “영어교육을 정치 구호로 삼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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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와 사람]박찬길 교수 “영어교육을  정치 구호로 삼지 마라”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발표한 영어 공교육 강화 방안이 온 나라를 벌집처럼 들쑤셔놓고 있다. 교원단체, 학부모 단체, 학계 등이 이구동성으로 인수위 정책을 비판하고 나섰다. 서민들의 사교육비를 줄이고 영어교육을 제대로 시켜보겠다는데 왜 이렇게 말이 많은 걸까. 전방위적으로 쏟아지는 비판의 핵심은 인수위의 정책이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인수위는 비판적인 인사들을 배제한 채 밀실 공청회를 열면서 다른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드러냈다.

이런 상황에서 비판의 목소리가 얼마나 인수위 측에 전달될지 의문이지만, 생산적인 논의를 위해 학계의 목소리를 전달한다는 의미에서 이대 영문과 박찬길 교수의 인터뷰를 싣는다. 박 교수는 우리 사회가 영어교육의 목표를 외국어로서 영어로 잡을지, 모국어 수준의 구사 능력을 갖추는 것을 목표로 잡을지부터 논의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영어교육을 정치 구호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박 교수는 현재 영미문학연구회 학술대회 준비위원장으로 3월로 예정된 영어 공교육 강화 방안에 대한 영미연 학술 대회를 준비하고 있다.

교원 단체와 학부모 단체의 비판이 거세다.
“인수위는 새 정책이 사교육 의존도를 줄일 것이라고 말한다. 김영삼 정부 이후 이미 10년간 세계화 바람을 타고 말하기와 듣기를 강조하는 교육을 해왔다. 그러나 공교육이 강화된 만큼 사교육 시장이 커졌다. 이번 인수위 발표도 그때와 동일한 의도를 가진 정책인데, 경험적으로 사람들이 믿지 않는 것이다.”

인수위의 취지에는 공감하나.
“사교육 의존도를 줄임으로써 국민 부담을 줄여주겠다는 취지 자체는 옳다고 본다. 오랫동안 문법과 독해 중심 교육을 해온 탓에 회화나 듣기 능력이 상대적으로 뒤처진 건 사실이다.”

인수위의 바람대로 사교육을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보나.
“실현 가능성이 없다. 사교육 시장에 종사하는 내 후배나 제자들한테 얘기를 들어보면, 학원가는 대박이 났다는 반응이다. 사실 쉽게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왜 그런가. 인수위는 공교육을 강화해서 사교육을 받지 않고 대학에 갈 수 있게 하겠다고 말한다. 이를 위해 국가 영어능력평가 시험을 도입하겠다고 한다. 겉으로만 보면 사교육 부담이 줄어들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학생들이 대학에 가기 위해 국가 영어능력평가 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받아야 할 텐데, 점수 따는 능력을 기르는 점에서는 학교가 학원을 따라갈 수 없다. 학생들이 학교보다 사교육에 의존할 가능성이 높다. 이건 아주 빤히 보이는 결과다. 공교육 영어 시간을 두 배로 늘린다고 하더라도 이 문제는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더 큰 문제는 대입 3단계 자율화 방안이다. 그렇게 되면 중상위권 대학은 틀림없이 논술이나 심층면접 형태로 더 높은 영어 실력을 요구하는 시험을 만들 것이다. 본고사가 당장 부활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공교육에서 다룰 수 없는 다양한 영어 능력 평가 방법을 대학이 개발할 것이고, 사교육 시장은 거기에 대응해서 지금보다 더욱 다변화할 것이다.”

정책 목표와 정책 실행 수단 사이에 이렇게 큰 괴리가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영어를 정치적 구호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실현 가능성과는 상관없이 교육 문제를 정치적 관점에서 접근했다. 국민들의 영어 콤플렉스와 스트레스를 건드려 정치적 이슈로 만든 것이다. 이 당선인이 “영어 문제를 정치화하지 말라”고 했는데, 정작 영어를 정치화하는 사람은 당선인 자신이다. 인수위가 내놓은 정책들은 10년 전 얘기를 되풀이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지난 10년 동안 한국 영어교육은 아주 많이 바뀌었다. 초등학교에서는 3학년부터 영어 수업을 하고, 대학에서도 원어민 강사진의 비율이 높아졌다. 마치 그동안 우리 교육이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처럼 말해서는 안 된다.”

인수위는 영어를 잘하면 국가경쟁력이 강화된다고 한다. 영어 능력이 국가 경쟁력인가.
“인수위 발표에 깔린 논리 중 하나가 ‘영어는 경쟁력이다’라는 담론이다. 그 논리는 아주 단순해 보인다. 그러나 그 논리를 완벽하게 부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여러 가지 근거를 들이대면서 정당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 경제에서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 한국 경제의 미국 시장 의존도 등을 거론하면 나름대로 설득력을 지닐 수 있다. 그렇기는 하나, 잘 가려서 봐야 한다. 많은 사람이 지적하듯, 영어 실력에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 단순히 영어회화를 못해서 수출이 안 되고 일자리가 안 생기는 것인가. 어떤 기업에서 100명이 일한다고 했을 때, 그중 회화를 꼭 써야 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지 냉정하게 따져봐야 한다. 시민들의 영어회화 능력이 올라가면 외국 자본 유치나 외국인 거주 환경에서는 개선되는 점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얼마 만큼 기대한 경제적 효과를 가져올 수 있을지에 대해서 누가 계산해본 적이 있나.

가령 한국인의 토플 점수가 5점 상승하면 그에 따른 부가가치 창출 효과가 얼마인지 계산해본 적이 있나. 영어가 경쟁력이라면 영어에 능하지 않았던 이전 세대가 일구어놓은 지금의 한국 경제가 굉장히 허약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 일본도 우리 못지않게 영어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사회지만 일본 경제가 망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정보화 수준 향상과 매체 환경 발달로 최근에는 외국과 접촉 환경이 크게 넓어졌다. 실제 기업에서 외국을 상대로 비즈니스할 때 대부분 서류 작업으로 진행한다. 실제로 외국인을 만나서 직업 대화해야 하는 사람들은 일부다. 이런 점을 면밀하게 검토해보면, 읽기와 쓰기가 말하기나 듣기보다 훨씬 더 많이 활용되는 능력일 것이다.

특히 정보화 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말을 못하는 게 문제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제대로 읽지 못해서 생기는 문제가 더 많다. 나는 신문 국제 뉴스에서 해외 언론을 인용하는 보도가 나오면 인용된 기사의 원문을 찾아본다. 제대로 된 것도 많지만 전체적인 맥락을 파악하지 못한 기사가 많다. 외국과 교류할 때 정말 중요한 건 말이든 글이든 맥락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우리것으로 만드는 일이다. 말을 못하는 게 문제라는 주장은 정책을 수립하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영어 콤플렉스 때문에 나온 게 아닌가 싶다.”

영어는 빨리 배울수록 효과가 있다고 한다.

[이슈와 사람]박찬길 교수 “영어교육을  정치 구호로 삼지 마라”

“영어교육의 초점을 ‘언어 학습(learning)’에 두느냐 ‘언어 습득(acquisition)’에 두느냐에 따라 다르다. ‘학습’이라는 건 영어를 외국어로서 배우는 것, 다시 말해 모국어의 틀이 뿌리내린 다음 글을 통해 영어를 배우는 것이다. 습득’은 어린 아이들이 모국어를 익힐 때처럼 말을 통해 영어를 배우는 것이다. 지금 일관되게 습득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데, 습득 차원의 접근은 바람직하지 않다. 문화적 정체성은 차치하고, 그게 가능한지 따져봐야 한다. 가능하기는 하다. 하지만 극히 예외적인 경우에만 그렇다. 가령 한국 내 외국인 학교나 영훈 초등학교 같은 곳은 영어로 수업한다. 외국인 학교는 영어 커리큘럼을 갖추고 전 과목을 영어로 수업하고, 영훈 초등학교에서는 절반 정도를 영어로 수업한다. 말 그대로 ‘영어 몰입 교육’을 하는 것인데, 문제는 4조 원을 투입해서 영어시간을 지금의 두 배로 늘린다고 하더라도 그만한 수준의 환경을 전국의 모든 학교에서 갖출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두 학교 다 대학등록금 수준의 비용이 들어간다. 우리 사회에서 그만한 돈을 부담할 수 있는 가정이 몇이나 되는가. 말이 안 되는 소리다. 경제적으로 불가능하다.”

환경만 갖추면 한국어와 영어를 모두 잘할 수 있나.
“상당히 능숙하게 구사하는 정도까지는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완벽한 바이링궐(이중언어 구사자)이라는 것은 해로운 환상이다. 예외적인 천재가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이다. 영어는 외국어로서 충실히 배워야 한다. 이 전제를 분명히 하지 않으면 영어교육이 왜곡될 소지가 많다. 또 하나, 언어를 습득한다는 것은 개인의 정체성과 자아를 변환하는 일과 맞먹는 일이다. 영어가 품고 있는 문화적 가치에 완벽하게 동화되지 않는 한 영어를 완벽하게 구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언어 능력은 개인의 정체성과 밀접한 상관 관계가 있다. 나는 아이들을 문화적 무국적자로 만들려는 시도에 대해 매우 분노한다. 사람다운 삶이란 자신이 태어난 공동체 안에서 다른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교류할 때 가능한 것이다. 한국인은 한국어 공동체 속에서 그런 삶을 구현할 수 있다.”

구체적인 대안은 무엇일까.
“대안이 없다는 것부터 인정해야 한다. 대안 자체가 없다고는 할 수 없어도, 단기적인 대안은 없다. 이 사실을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된다. 인수위에서 ‘영어 공교육이야말로 제2의 청계천이다’라는 말을 했다가 워낙 비난이 거세니까 발뺌을 했는데, 그게 그 사람들 인식이다. 임기 내에 가시적인 성과를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영어 교사를 두 배로 확충하는 것 같은, 물량으로 표현할 수 있는 업적을 내고 싶어하는 것이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영어교육을 정치구호로 삼지 말라는 것이다. 단기간에 성과를 내기 위해 무리한 정책을 쓰면 망하는 수가 있다. 제발 시한을 정하지 말고 다양한 의견을 수렴해서 침착하게 진행하기 바란다. 더구나 인수위 정책은 이미 지난 10년간 실천해오고 있는 것들이다. 그 10년간 일어난 변화의 공과를 면밀히 검토해서 보완하는 방향으로 추진하는 게 맞다고 본다.”

한국 사회에서 영어가 갖고 있는 상징권력이 워낙 강하다. 영어가 가진 권력을 줄이는 방법은 무엇인가.
“쉬운 일이 아니다. 영어가 가진 아우라는 한국 사회의 특수한 역사적 경험에서 생겨난 것이다. 해방 후 한국사회는 미국의 절대적 영향력하에서 발전해왔고, 지금도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다. 대단히 슬픈 이야기지만, 현실이다. 또 하나 지적하고 싶은 것은, 한국 사회에서 영어 능력은 단순한 어학 능력으로 받아들여지는 게 아니라 한 사람의 총제적인 지적 능력을 나타내는 지표로 통용된다는 점이다. 영어 능력이 뛰어나면 다른 분야의 능력도 뛰어날 것이라고 생각하는 식이다. 그런 사회적 조건을 참작한 성찰이 선행되고, 그것을 바탕으로 영어에 대한 과수요를 줄이는 게 바람직할 듯하다. 구체적으로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일은 영어가 필요하지 않은 업무에서는 영어 점수를 요구하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다. 영어 공용화론처럼 온 국민을 스트레스로 몰아가는 일은 없어야 한다. 영어가 사회적 권력이 된 이유에 대해 냉철하게 반성할 필요가 있다.

“나는 아이들을 문화적 무국적자로 만들려는 시도에 대해 매우 분노한다. 사람다운 삶이란 자신이 태어난 공동체 안에서 다른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교류할 때 가능한 것이다. 한국인은 한국어 공동체 속에서 그런 삶을 구현할 수 있다.”

<글·정원식 기자 bachwsik@kyunghyang.com>
<사진·김석구 기자 sg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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