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히 늙지 않는 ‘5월의 소년’… 내일의 걱정보다 오늘의 행복함에 감사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이 있는 5월. 이 달에 가장 잘 어울리는 인물은 스물한살 청년이 아니라 아흔여섯살의 피천득 선생이다. 항상 아기같이 순박한 마음, 외동딸을 너무 사랑해 글마다 절절이 묻어나는 아버지의 사랑, 평생 가르치는 일을 천직으로 삼아 지금도 제자들과 만나는 피천득선생은 5월의 상징 같다.
피천득선생을 만나러 간다고 했더니 대부분 “어머, 그분이 아직 살아 계셔요?”라며 놀랐다. 30~40여년 전 교과서에서 본, 일본여성 아사코와의 만남을 담은 ‘인연’이란 수필의 필자가 아직도 생존해 있다는 것이 신기한가보다.
선생은 그저 살아계시는 것이 아니라 5월의 신록처럼 싱싱하게 영원한 청춘을 구가하고 있었다. 어린이날, 중국 상하이 여행에서 돌아왔다는 선생은 피곤함은 전혀 모르는 듯 천진난만하고 꿈꾸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상하이는 70년 만에 다시 간 거예요. 아는 이의 초대를 받아 한 닷새 머물다 왔죠. 완전히 유럽같이 변했더군요. 내가 70년 전에 그곳에서 만나 좋아했던 메리 루(몇번이나 물어서야 이름을 들었다)라는 중국여성을 찾아 만나보고 싶었는데 내가 알고 있는 주소지엔 살지를 않더군요. 여자들은 남자보다 오래 사니까 꼭 살아 있으리라고 믿었는데….”
혹시 불로초나 노화방지약이라도 있나 싶어 구석구석 살펴보았지만 그 흔한 비타민병도 눈에 띄지 않는다. 아흔여섯이란 나이도 그렇지만 그 연세에 꼿꼿한 자세는 물론 흰머리도 많지 않고 귀도 밝다는 것이 경이롭다.
“글쎄 건강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지요. 아마 누구와도 경쟁하지 않고 별로 욕심이 없어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것이 건강비결인 것 같아요.”
서울 반포동 32평 아파트는 ‘욕심없음’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유명한 영문학자이자 작가이면서도 책이 별로 없다. 제자들에게 꼭 필요한 책은 영구 무상임대해 주었기 때문이다.
화첩이나 달력에서 잘라낸 듯한 르누아르의 그림은 스카치테이프로 붙여두었다. 침대 역시 1인용 간이침대. 동네를 지나가다 누가 버린 것을 가져왔다는 식탁과 의자 역시 짝이 맞지 않는다. 그 흔한 소파도 없고 첨단 가전제품도 하나 없다. 아흔여섯인 당신이 젊은 시절에 헌책방에서 샀으니 족히 100년은 넘었으리라는 낡은 책, 좋아하는 작가와 음악가의 사진들, 가족과 손주들 사진뿐이다. 그나마 쿵쿵 소리로 옆집에 피해를 주기 싫어 못 박아 액자를 걸지 않고 스카치테이프로 붙이거나 바닥에 세워두었다. 이런 검박한 풍경 속에서 그는 오히려 황제처럼 풍요로워 보인다.
“부자는 돈이나 재산이 많은 사람이 아니에요. 추억이 많은 사람이 진짜 부자지요. 파리의 개선문은 나폴레옹이 세운 것이지만 그의 것이 아니라 그곳을 거니는 연인들 것이거든요. 꼭 좋은 그림을 소유해야 행복한 것도 아니죠. 기억 속에 넣어두면 됩니다. 좋은 기억은 욕심으로 살 수 있는 게 아니랍니다.”
식사에도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주로 채식을 하며 소식을 한다. ‘아침은 혼자, 점심은 친구와, 저녁은 적과 함께 먹듯 하라’는 서양속담을 지키면 된단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아침은 거르고 저녁만 푸짐하게 그것도 1차, 2차 술자리까지 이어지니 배도 나오고 건강도 나빠진다고 걱정했다.
영원한 어린아이
작가 최인호씨는 피천득선생을 ‘전생의 업도 없고 이승의 인연도 없는, 한번도 태어나지 않은 하늘나라의 아이’라고 표현했다. 선생이 환하게 웃을 때는 개구쟁이 소년이 즐거워하며 미소짓는 것 같다. 꾸미지 않는 순수함과 어린아이다움이 그의 또다른 건강비결이다.
“날 사귄(?) 덕분에 저런 훌륭한 이들과 항상 함께 있으니 잉그리드 버그먼은 호강하는 거야. 아무리 유명하고 예쁜 배우들도 시간이 지나면 다 잊혀지는데 난 수십년간 변함 없이 저 사진을 간직하고 매일 보고 생각하거든. 잉그리드 버그먼도 행복할 거야.”
선생의 시 구절이나 수필의 문장을 기억해서 말씀드리면 칭찬받은 꼬마 아이처럼 “아이, 고맙습니다”라고 진심으로 행복해한다.
교제관계도 아이 같다. 청탁성 등 이해관계나 명함에 적힌 직함으로 누굴 만나지 않는다. 그저 함께 해서 즐겁고 기쁘다면 그 누구와도 만난다. 국회의장을 지낸 샘터사 발행인 김재순선생과는 첫눈이 내리는 날, 서로 전화해서 알려주는 사이. 30년 전 아버지를 따라 세배왔다가 인연을 맺은 김재순선생의 막내아들 성구씨(샘터 사장)와는 한달에 한번 정도 목욕탕에서 만나 등 밀어주는 사이. 그리고 서울대 영문과 교수 시절의 제자들은 칠순이 넘은 후에도 여전히 선생을 찾아오거나 초대해 점심식사도 하고 대화도 나눈다.
다시 태어나도 지금처럼 살고 싶다
“나의 생활을 구성하는 모든 작고 아름다운 것들을 사랑한다. 고운 얼굴을 욕망 없이 바라다보며 남의 공적을 부러움 없이 찬양하는 것을 좋아한다. 여러 사람을 좋아하며 아무도 미워하지 아니하며 몇몇 사람을 끔찍이 사랑하며 살고 싶다. 그리고 나는 점잖게 늙어가고 싶다.”
선생은 예전에 당신이 쓴 ‘나의 사랑하는 생활’이란 글과 똑같이 점잖게, 그러면서도 귀엽고 사랑스럽게 늙어가고 있다.
“사람이 저렇게도 늙을 수가 있구나 하고 그분의 늙음을 기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즐거웠다. 나이들수록 자신의 말년에 대한 근심은 더해만 간다. 마땅한 본을 보여줄 늙음의 선배가 귀하기 때문이다….
연세가 들수록 확실해지는 아집, 독선, 물질과 허명과 정력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집착 등은 차라리 치매가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도 늙음을 추잡하게 만든다. 그런 것들로부터 훌쩍 벗어난 그분은 연세와 상관없이 소년처럼 무구하고 신선처럼 가벼워 보였다. 그러나 그런 것들부터 벗어난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선생의 미수연과 구순잔치에 참석했던 작가 박완서씨의 회고담이다. 그는 이렇게 후배들에게 ‘저렇게 잘 늙고 싶다’는 꿈과 희망을 준다. 정작 그는 자신이 늙었다는 것을 못느낀다고 했다. 나이 때문에 못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체질상 술, 담배는 평생 하지 않았고 운동도 산책이 전부인데 지금도 동네나 서울대 캠퍼스 등을 산책한다. 예전에 읽던 책을 다시 읽고 브람스 등 클래식 음악을 듣고 제자 등 친지들을 만나 데이트를 하는 생활은 ‘강의’만 빼고는 교수시절과 별반 다름이 없다. 오월의 신록을 보는 황홀함도 청년시절과 별 차이가 없고 지금도 예쁜 여자를 보면 가슴이 벌렁벌렁 뛰는 것은 아니지만 보석을 발견한 듯 기쁘고 행복하다. 선생의 오감은 전혀 나이를 먹지 않는다.
“죽어서 천당에 가더라도 별 할 말이 없을 것 같아요. 억울한 것도 없고 딱히 남의 가슴 아프게 한 일도 없고… 신기한 것 아름다운 것을 볼 때마다 살아 있다는 것이 참 고맙고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약에 다시 태어난다면 지금 내 삶과 똑같은 생을 살고 싶어요. 공부하고 가르치고 내가 느낀 아름다움을 글로 남기고… 훗날 내 글을 읽는 사람들이 ‘이 사람, 사랑을 하고 갔구나’하고 한숨지어 주기를 바라는 게 욕심이라면 욕심이죠. 그것도 참 염치없는 짓이지만….”
“여름방학엔 우리 딸 서영이가 와요. 서울대에 강의하러 온다고 했어. 절대 결혼하지 않을 줄 알았더니 결혼도 하고, 애도 안 낳을 줄 알았는데 그 아들이 아주 실력있는 바리올리니스트야. 그런데도 하버드 대학에 다녀요. 미국도 하버드 병에 걸렸나봐. 서영이가 오면 이런저런 이야기도 하고 맛있는 것도 먹으러 다녀야죠.”
어릴 때 그렇게나 편애하고 애지중지해서 조금만 아파도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는 딸 서영씨는 올해 환갑이다. 환갑인 딸을 기다리는 선생의 표정은 10대 소년 같다.
5월 29일은 선생의 생일. 라일락 향기, 사향장미의 붉은 빛깔, 푸르디푸른 하늘, 초록의 모든 것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나뭇잎들… 올해로 아흔여섯번의 5월을 맞는 피천득선생은 그것만으로도 행복해보였다. 그의 해맑은 얼굴 위로 선생이 쓴 오월이란 글이 겹쳐졌다.
-오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한살 청신한 얼굴이다/ 하얀 손가락에 끼어있는 비취가락지다/ 오월은 앵두와 어린 딸기의 달이요, 오월은 모란의 달이다/ 그러나 오월은 무엇보다도 신록의 달이다/ 전나무의 바늘잎도 연한 살결같이 보드랍다/…/ 신록을 바라다보면/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즐겁다/ 내 나이를 세어 무엇하리/ 나는 오월 속에 있다-
백살이건 백스무살이건, 그 계절이 언제건 피천득 선생은 영원한 오월의 소년이다. 너무 사랑스러워 볼이라도 만져주고 싶은….
<글/유인경편집장 alice@kyunghyang.com >
<사진/김석구기자 sgkim@kyunghyang.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