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파 박정희’ 진실과 허구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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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전 대통령을 둘러싼 쟁점 세 가지… 침략전쟁에 참여한 ‘원죄’ 외엔 입증 어려워

[조명]‘친일파 박정희’ 진실과 허구 사이

수억원의 국민기금을 바탕으로 ‘친일 인명사전’ 편찬 사업을 벌이고 있는 민족문제연구소 홈페이지(www.minjok.or.kr)에서는 지금 ‘박정희의 친일’을 놓고 격론이 벌어지고 있다. 지난 8월 29일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가 친일인사 3090명을 자체 선정해 명단을 발표한 후 나흘 동안 이곳 자유게시판에는 5000건에 가까운 글이 올라왔다. 발표 이전 1년 8개월 동안 게시된 글이 300건에도 못 미친 것을 감안하면 ‘폭발적’이라고 할 만한 반응이다.

이 가운데 ‘박정희’라는 주제어로 검색되는 글만 1000건이 넘는다. 친일 진상 규명을 둘러싼 사회적 논란의 중심에 박정희 전 대통령이 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현상이다. 언론도 편찬위의 명단 발표를 보도하면서 “이날 발표된 명단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을 비롯…”이라는 식으로 박 전 대통령을 맨 앞자리에 세웠다.

민족문제연구소 홈페이지를 비롯한 온·오프라인 토론장에서 벌어지는 친일 논쟁은 곧 ‘박정희 논쟁’이다. 그 대부분은 “민족을 가난에서 구원한 성웅을 친일파라니”와 “박정희가 친일파가 아니라면 누가 친일파란 말인가”로 편이 갈려 서로 한 치의 양보도 하지 않는 형국이다.

이처럼 친일인사의 대명사처럼 돼버린 박 전 대통령의 ‘친일’이란 어떤 것일까. 현재 벌어지고 있는 ‘박정희 친일 논란’은 주장만 있고 내용은 거의 없다. 박 전 대통령을 명단에 포함시킨 편찬위조차 아직은 구체적인 친일행위를 제시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어디까지가 친일인가”라는 논란에 앞서 먼저 이 부분을 점검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간도특설부대에 근무했나 박 전 대통령의 친일과 관련해 가장 뜨겁게 쟁점화한 부분이 ‘간도특설부대 근무설’이다. 이를 주장한 측을 유족측이 ‘사자(死者)에 대한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러니만큼 가장 구체적이고 현재진행형인 논제라고 할 수 있다.

1938년 9월 창립된 간도조선인특설부대는 만주 지역의 항일 무장 세력을 토벌하려고 만든 부대다. 이 부대는 동북항일연군이나 팔로군과 여러 차례 교전을 벌여 상당한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따라서 박 전 대통령이 이 부대에 몸담은 사실이 확인된다면 ‘구체적인 친일행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

‘간도특설부대 근무설’을 강력하게 제기한 인사는 연변 조선족 작가 류연산씨다. 그는 지난해 국내에서 출간한 저서 ‘일송정 푸른 솔에 선구자는 없었다’(아이필드)에서 박 전 대통령이 간도특설부대에 자원 입대했고 1939년 8월 대사하 전투에도 참여했다고 주장했다. ‘재만(在滿) 조선인 친일행적 보고서’라는 부제를 단 이 책에 류씨는 다음과 같이 썼다.

“박정희는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오래지 않아 만주에 와서 간도조선인특설부대에 자원 입대하였다. 특설부대에 있는 기간에 그는 동북항일연군 토벌에 나섰고 그 공으로 신경육군군관학교 제2기생으로 입학하였다.”

그러나 류씨의 이런 주장은 국내 박정희 연구가는 물론 친일 연구가로부터도 광범위한 호응을 얻지 못하고 있다. 박 전 대통령은 1937년 3월 대구사범을 졸업한 뒤부터 1940년 4월 만주 신경군관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교사 의무복무기간인 3년 동안 문경소학교에 재직했다. 즉 근무 기록과 제자들의 증언, 간도특설부대 출신 인사들의 증언 등 국내 자료로 볼 때 ‘알리바이’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류씨는 박 전 대통령이 간도특설부대에 근무했다는 근거로 현지 기록과 관련자 증언을 들고 있다. 현지 기록이란 1991년 베이징에서 발간된 ‘중국조선민족발자취 총서 4-결전’(민족출판사)을 말한다. 이 책에 실린 ‘악명 높은 간도특설부대’라는 제목의 글에 “박정희는 간도특설부대 중대장급 군관이었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류씨는 “이 책은 지금까지 중국 조선족 역사 연구에서 가장 방대하고 신빙성 있는 자료집으로 인정받고 있다”며 “박정희가 간도특설부대 출신이라는 사실은 연변 역사학계가 공동으로 인정한 정설”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국내 연구자들은 이런 주장에 회의적이다. 조갑제 월간조선 편집위원은 1998년 출간한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2’(조선일보사 刊)에서 이 부분을 인용한 뒤 “박정희는 간도특설대에 근무한 적이 없다”고 단언했다. 친일연구가인 정운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사무처장도 “간도특설부대 근무설은 어불성설”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정 처장은 지난해 낸 저서 ‘실록 군인 박정희’(개마고원)에도 ‘간도특설부대 근무설’은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간도특설부대 근무설’에 대해서는 박 전 대통령의 둘째딸인 박근영 육영재단 이사장이 ‘일송정 푸른솔에…’ 출판사인 아이필드 유연식 대표와 여기에 추천사를 쓴 김삼웅 독립기념관장을 서울중앙지검에 고소해놓은 상황이다.

[조명]‘친일파 박정희’ 진실과 허구 사이

독립군을 토벌했나 박 전 대통령은 1940년 4월 만주 신경군관학교에 입학해 1942년 3월 예과를 우등으로 졸업했다. 그해 10월 일본 육사 본과 3학년에 편입, 1944년 4월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황군(皇軍) 육군 소위로 임관한 때는 소련-만주 국경지대인 치치하얼에서 3개월간 견습군관 생활을 한 뒤인 1944년 7월 1일이었다. 이른바 ‘독립군 토벌설’과 관련이 있는 시기는 중국 열하성 흥륭현 반벽산에 주둔한 만군 제8단에 배속된 그해 7월 중순부터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정확히 1년 1개월 동안이다.

‘일송정 푸른솔에…’의 저자 류연산씨는 월간 ‘말’지에 기고한 ‘독립군 때려잡던 박정희, 왜 거짓말하나’라는 글에서 박 전 대통령이 1944년 특설부대의 장교로 열하성에서 중국 항일부대인 팔로군 토벌에도 참여했다고 거듭 주장했다. 대구가톨릭대 역사교육학과 교수 출신으로 2001년 ‘알몸 박정희’를 출간한 최상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장도 박 전 대통령이 만군 제8단 근무 시절 ‘조센징 토벌’에 적극적이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에 대한 구체적이고 확실한 자료는 아직까지 나오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만군 장교 시절 박 전 대통령은 주로 전투와 무관한 내근직에 있었기 때문이다. 만군 제8단의 주적은 반벽산 주변의 마오쩌둥 휘하 팔로군이었다. 이른바 독립군과 교전할 기회가 별로 없는 부대였다. 게다가 박 전 대통령은 대부분의 기간을 제8단 단장인 중국인 당제영 상교(대령)의 부관으로 복무하다 일제 패망을 맞았다.

교전할 기회가 있었다면 부관직을 맡기 전 잠시 일선 소대장을 할 때일 것이다. 정운현씨는 저서 ‘실록 군인 박정희’에서 이와 관련해 박 전 대통령과 가장 가까이에서 근무했던 중국인 동기생 고경인씨의 증언을 소개했다. 고씨에 따르면 박 전 대통령은 부관이 되기 전 2~3개월 동안 소대장으로 작전에 참여했다. 그는 ‘그러나 박정희가 토벌작전에 참가한 적은 있으나 그의 부대가 팔로군과 교전한 적은 없는 것으로 안다’고 증언했다.

따라서 박 전 대통령이 ‘독립군을 때려잡았다’는 설은 구체성이 결여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정씨도 저서에서 이 부분에 대해 “박정희가 토벌작전에 참가한 사실만큼은 분명히 확인된 셈”이라면서도 “다만 그가 독립군 토벌에 ‘적극’ 나섰다는 주장은 다소 과장된 것으로 보인다”고 결론짓고 있다.

독립군과 내통했나 일제 패망 후 박 전 대통령은 ‘해방 후 광복군’에 편입된다. 그는 현지 중국인 장교들에 의해 무장해제당한 뒤 베이징으로 가서 임시정부 변사처장 최용덕 장군 휘하의 광복군 ‘평진지대’에 편입, 귀국할 때까지 약 10개월간 중대장으로 복무한다.

박 전 대통령의 친일시비와 함께 등장하는 ‘비밀 광복군설’은 이 해방 후 광복군과는 또 다른 차원의 얘기다. 박 전 대통령이 5·16쿠데타에 성공하고 권력기반을 갖추면서 시작된 만군 시절에 대한 미화작업 가운데 하나로 자주 거론되는 것이 바로 이 부분이다.

봉천군관학교 출신 만군 항공장교로서 여운형 선생의 건국동맹 지하운동을 주도한 박승환씨에 대한 얘기는 이미 여러 연구자를 통해 실체가 드러났다. 박승환씨와 박 전 대통령의 관계를 과장해서 만든 ‘비밀 광복군설’은 일부 아부꾼들의 조작이라는 것이다. 박 전 대통령과 만군 제8단과 베이징 ‘해방 후 광복군’에 함께 편입됐던 신현준씨는 “해방 전에는 광복군이 있는지도 몰랐다”고 증언한 바 있으며, 역시 박 전 대통령과 만군 제8단에 같이 근무한 방원철씨도 “박정희는 박승환을 만난 적도 없다”고 주장했다.

최근에는 박 전 대통령이 신경군관학교에 입학하기 전인 1939년 3월 김구 선생을 만났다거나 만군 장교 시절 조선인 병사를 임시정부의 독립군으로 빼돌렸다는 등 확인하기 어려운 주장마저 나오고 있다. 박정희 연구가들은 이런 주장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조갑제씨조차 저서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에서 “박정희가 비밀 독립군이었던 적이 없다”고 썼다.

친일인명사전편찬위가 박 전 대통령을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 1차 명단에 포함시킨 근거는 구체적인 친일행위가 아니라 군인이라는 지위 때문이라고 한다. 군인의 경우 직업장교 이상으로 그 범위를 정했기 때문이다. 민족문제연구소 박수현 책임연구원은 “박 전 대통령의 친일행위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는 갖고 있지 않다”며 “다만 선정 기준에 들어가기 때문에 포함된 것”이라고 말했다.

‘황군 장교’라는 사실 자체만도 ‘최악의 친일’이라는 의견도 있다. ‘알몸 박정희’의 저자 최상천씨의 경우 친일의 정도를 3가지로 나눈다. 자원해서 침략전쟁에 적극 참여한 경우, 식민지 지배에 참여한 경우, 식민지 지배 정책에 호응한 경우 등이다. 최씨는 “이 가운데 침략전쟁 참여가 최악의 친일행위”라며 “박정희의 친일은 그런 차원에서 봐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 차원에서 친일진상규명 작업을 벌이는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는 이와는 다소 다른 입장이다. ‘일제 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에서 박 전 대통령 관련 조항은 제2조 2항(일본 제국주의 군대의 소위 이상의 장교로서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행위)이다. 박 전 대통령이 조사 대상에는 들어가지만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행위를 입증하는 작업이 남아 있는 것이다. 정운현 사무처장은 “현재까지 자료로 볼 때 악랄한 행위는 없기 때문에 (입증하기가) 어려울 것 같다”고 말했다.

<신동호 편집위원 hud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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